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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12
아레오바고 홍기빈
박정인.
칼 폴라니로 얘기를 하려다가, 목회자가 경제학을 잘 모르니까 짧은 시간에 잘 알아듣기 어려울 것 같아서, 바꾸었다. 그게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다.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복지사회가 꽃피운 스웨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복지라는 화두가 어떻게 현실로 연결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실현될까라는 믿음이 안가는데. ‘잠정적’이란 표현을 붙여서 잘 정리를 해준 것 같다. 좋은 정치, 실현가능한 복지. 목사 역할에 대한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글로벌 경제정치연구소 하면서 활발한 활약을 하셨다. 라디오방송으로 경제 이해를 도와주기도 했었다. 나꼼수 팀과도 팟캐스트 방송도 했었다. 경제학자로 <살림/살이의 경제학>으로 홍기빈 선생께서 생각하는 바를 알수 있을 거다.
홍기빈.
책에는 여러 가지 얘기가 있어서. 동기가 여럿이었다. 여기 모이는 분들의 관심사를 잘 몰르겠지만.
우리나라는 맑스주의의 무거운 영향 하에 오래 있었는데, 그 폐해가 심하게 나타났다. 맑시즘과 종교가 비슷하다. 맑시즘에는 영성이란 게 유물론 얘기하면서 싫어한다. 종교의 교조성, 분파성 싫어하듯 말이다. 진보 운동의 맑시즘이 이제 더 이상 도움이 안된다. 그런 방식으로 운동을 해서 다친 사람이 더 많고, 끝난 거라고 얘기를 해야 하는데, 아직 맑시즘에 대해 대놓고 뭐라 못한다. 맑시즘의 잘못된 것들이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쓸데없이 과격하게 나가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그걸 극복하고 싶었다.
또 하나는, 복지에 대한 요구가 있지 않은가. 복지에 대해 임꺽정이나 홍길동 식으로 부자를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 이건 산업사회에서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이삭줍기, 도덕 경제(moral economy), 그거야말로 케케묵은 거다. 근대산업사회의 복지사상에 맞지 않는다.
나는 68년생이고. 70년대의 시대를 기억하는데, 박정희 정권을 따라가는 정부가 그걸 복지라고 말하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복지국가의 유형을 나눌 때, 가장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형태의 유형을 북유럽 유형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어떤 철학사상적 배경으로 말하는지, 그걸 설명해야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비그포르스의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2011년에 썼는데, 당시 진보 정당이 이렇게 될줄 몰랐다. 통합을 하면 말도 안되는 짓들을 그만하고, 현대적인 진보정당이 되길 원했다. 이름만 남았다.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진 다음에, 내가 바라는 역할이 있었다. 그걸 설명하고 싶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동기들이 겹처서 나오게 되었다.
책 요약을 하라면 할 수없다. 너무 분량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세 가지 주제를 짤막하게 논하겠다. 관심 있을 부분만 논하겠다.
첫 번째 부분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잠정적 유토피아’로 설명하겠다. 맑시즘의 폐해를 강하게 고발하겠다. 기독교인들도 가지가지인데, 나는 내노라하는 기독교집안의 내논 자식이다. 친할아버지가 함흥제일교회 만들어서 3.1운동과 신간회 설립에 앞장서신분이다. 그러나 난 교회를 안다닌다. 여기 계신분은 이해하실 거라 생각하고, 기독교와 맑시즘의 평행선을 이야기하겠다. 예수가 와서 설교를 하고 가신 후, 예수가 전해준 메시지는 죽은 후의 피안에 대한 얘기는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서 옆 사람과 사랑하고 행복하란 얘기였는데, 기독교가 예수 사후 예수의 말과 단어, 메시지의 개념을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바뀌어간다. 이 땅에 없는 카이로스 같은 순간 이후의 천국을 논하게 되었다. 그 순간 경배하는 것으로 변질시켰다. 이는 맑스주의가 진보영역에 끼친 해악은 똑같은 거다.
나는 자본주의의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압도적 다수는 힘들게 산다. 땀 정도의 힘듦이 아니라 노이로제 우울증 자살. 인구의 반이 넘는다. 이런 상태의 사람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찌들리는 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즐기고 주인이 되는 생을 원한다. 자본주의가 그걸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그걸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많다. 협동조합, 복지정책 확대를 위한 특정 정당지지, 사회과학 세미나, 자선/기부 사업.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다. 맑스주의는 이런 노력들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바꾸어버렸다. 도그마의 집단으로. 추상적 논리로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겠다는 거다. 그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함께 <자본론>을 들고 세미나 하자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는 생활 정신의 개선의 가능성을 차단시키기 때문에 진보를 심하게 무기력하게 만든다. 맨날 모여서 누가 잘했느니 싸우기만 하고, 분파주의에 취한 모습만 나타난다. 실제 진보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나쁜 의미의 종교인이 되는 경향이 있다.
스웨덴 사람들, 사회주의 정당들은 비슷한 문제에 20세기 초에 봉착한다. 혁명이 오는 그날까지 우리는 맑스를 공부하고 믿자는 혁명파. 그리고 수정주의라고 불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개혁하자는 사람들로 분파가 벌어진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당은 1920년도에 이미 맑스주의를 버렸다. 1986년 창당했는데, 맑스주의 정당의 강령을 계속되었다. 1920년에 한번 수정되는데 그때도 여전하다. 1944년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당지도부는 1920년대에 맑스주의를 이미 폐기했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는 실용주의적이었다. 사회주의를 생각할 적에 유럽이나 남유럽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종교적 구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천년왕국의 공산주의 말이다. 반면에 북유럽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합리적이다. 남유럽은 카톨릭이 강하고, 북유럽은 루터파가 강해서 그런듯하다. 북유럽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같이 지내고, 같이 일하고, 같이 쉬고, 같이 즐기자, 뭐 이런 거다. 여기에는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의미는 없고, 이 자리의 사람들이 형제자매로 소박하게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하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사고방식이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포용한다. 도움이 안되면 관심을 버린다. 그래서 맑스주의 정당을 그만두게 되는 과정을 밟는다, 맑스의 말대로 삼성을 국영기업으로 바꾸자는 거냐, 그럼 운영이 잘되냐 조사나 해보자 이거다. 공기업은 운영 잘 되는 거 없다. 비효율적이다.
나쁜 의미의 실용주의가 될지도 모르는데, 우리나라 민주당처럼 원칙이나 방향도 없었을 거다. 그러나 스웨덴은, 대안적인 원칙을 찾았다. 그게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이다. 이 유토피아는 맑시즘의 유토피아나 종교의 유토피아도 아니다. 사람들이 지금 가장 없었으면 하는 것들을 모아놓고 그걸 없애놓은 세상이다. 철학용어로 쓰자면, 초월적이냐 내재적이냐 하는데, 맑시즘이나 종교가 초월적이라면, 잠정적 유토피아는 내재적이다. 현실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정적 열망, 뭔가 황홀한 세상을 상상하는 지적 능력은 없었지만, 이것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열망, 그게 없어진 세상, 이것이 잠정적 유토피아다.
우리나라에서의 부정적 열망은 뭘까? 주택, 의료, 교육. 이 세가지다. 아니, 주택, 의료, 일자리, 이 세 가지일거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한이 맺힌 문제다. 국세청 자료 통계를 내보니, 중간층의 소득이 130만원이다. 2인이상 가구 소득으로 바꾸면 280만원 정도다. 이걸로 4인 가족이 살아가라면 어떻게 가능한가. 한달 생활비로만 생각하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택, 의료, 노후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절반 이하의 사람들은 절망의 상태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큰 병에 걸리는 것이고, 전세값 올라가는 것이고, 직장에서 짤리는 거다. 자녀가 국립대 못들어가고 사립대 들어가는 거다. 그 심정이라는 게, 무슨 일만 생기면 덜컥덜컥한다. 이런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토피아는, 이 세가지가 없는 세상은 없을까? 유령처럼 떠도는 세상인가?
비그포르스는 진보운동이 맑시주의의 메시아적 종교에 불과한 거고, 원칙도 없이 이것저것 하는 것도 아니고, 잠정적 유토피아가 되어야 한다는 노선을 잡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현실 사람들의 고통을 뒤집으면 나오는 것이 잠정적 유토피아다. 앞서 말한 3가지 문제가 해결된 세상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들에게 맑스주의의 유토피아를 말한다면 그다지 설득력도 없을 거다. 지금 우리에게 말한다면, 그게 가능하겠냐는 반응할 것이다.
다음에 사회민주당이 해야 할 것은 부정적인 열망에 대한 세상, 그 유토피아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가능할지 사회과학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혹세무민은 아니다. 조세구조, 인구, 어떤 정책을 어떻게 바꾸고, 어떤 식의 정책 조합이 가능할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정적 열망에서 나오는 유토피아가 얼마만큼 가능하겠냐 연구하는 것이다.
잠정적 유토피아인 까닭은 계속 수정되는 까닭이다. 아무리 사회과학 조사를 잘한다해도 현실을 다 파악할리 없고, 부정적 열망이 한번에 해결될 리 없다. 부딪히면 새롭게 다시 조사해서 수정한다. 우리 머릿속의 유토피아는 항상 미완성의 모습인 거다. 그걸 바꾸고 바꾸면서 유토피아를 계속 좇아다니는 것이다. 비그포르스 표현으로는 ‘청사진’이 아니라 ‘나침반’이라는 거다. 맑스주의는 청사진/설계도에 가깝다. 잠정적 유토피아는 우선 어느 쪽으로 가야하느냐, 길을 잃으면 다시 나침반을 꺼내보고 다시 전진하고. 리클리닉(스웨덴어)/가이드. 나침반.
맑시즘에 의지하지 말고, 실제 근로자들의 고통을 찾아서 그걸 해결되어진 세상을 유토피아로 설정하고, 사회과학으로 분석하는 것, 이것이 사회민주당의 할 일이다. 복지국가가 스웨덴에서 이뤄진 것은 이런 정치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40년 정도 걸렸다고 본다. 대략 원형이 나타나서 구체화/제도화되는데 30년 정도가 걸렸다.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말이다. 그런데 상상해보라. 우리는 어떤 정당이 30년 계획으로 사회 바꾸겠다고 추진하는가? 스웨덴은 설계도도 없다. 하면서 만들어지는 거다. 이 방향으로 간다는 정치적 의지만 있었다. 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40년간 지속한 거다. 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이래야 가능한 거다. 이게 가능했던 건 잠정적 유토피아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1919년에 채택되지 않은 비그포르스의 당 강령 초안을 보면, 40년대 말의 스웨덴 사회와 닮아있다.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출산수당 등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얘기였던 거다. 스웨덴 당 동지들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거니 말이다. 비그포르스는 자기 자신이 정치인으로서의 실천의 나침반으로 살면서 일관되게 당을 끌고 갔던 거다. 사회민주당 내에서 공유하고, 노동조합을 이끌고, 스웨덴 부르주아까지 설득해서, 나라를 바꿀 수가 있었다.
스웨덴 복지국가 건설과정을 생각하면, 혁명으로는 불가능하다. 복지국가는 설득해야 한다. 세금 내는 사람들에게 왜 당신 혼자 잘 살면 안되는지, 세금을 내야 다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설복하게 해야 하는데, 힘으로는 임시적으로 누를 수는 있어도. 설득해야 하고.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복지제도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지루하고 디테일한 것이기 때문에 계속 실정에 맞게 바꾸어나가야 한다. 이건 매일매일 관리하고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서서히 자라는 거다. 이게 혁명 같은 걸로 되겠는가, 한편으론 설득해야 하고, 한편으론 현실적인 제도를 만들어야 하니. 이걸 만드는 주체는 밑바닥부터 한땀 한땀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장기적이고 오래 지속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한번에 안된다. 우리가 놓치고 포기하면 안된다는 정치적 의지를 모아야 한다.
이젠 복지 얘기를 하겠다. 앞서는 운동론에 대한 것이었고, 이제 어떤 복지국가냐에 대한 얘끼를 하겠다.
스웨덴의 빛나는 성취, 산업사회의 복지는 도덕적 경제의 재분배 차원이라는 것을 명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부분이 잘 인식이 안되어서 복지라는 걸 가난한 사람을 돕는 걸로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하는데 없으면 못하겠다고 한다. 무상급식 논쟁에 불거지는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의 복지라는 것을 이해 못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건이 있었는데, 연말 예산 날치기 통과 시, 복지 관련 예산이 날라갔다. 2011년 년말이었을거다. 그 중 하나가 충격적이었는데, 박원순이 아름다운재단 자선단체 이사장일 때, 복지가 후퇴했으니 우리라도 해야지, 하면서 기부하십쇼라고 하더라. 저 정도 되는 분도 복지와 자선이 대체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자선은 요구할 수 없는 것이고, 복지는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복지라는 것은 사회구성원이라면 마땅히 제공받아야 할 권리다. 이걸 기초로 세웠다는 거다. 이게 스웨덴 사람들의 중요한 기여다. 무상급식 점심밥을 얘기할 때, 스웨덴 기본원리에 입각해서 본다면. 배고픈 이들을 위한 무상급식이 아니라, 학교를 얼마나 세련되게 만들 것인가, 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느냐는 거다.
복지 국 유형을 나눌 때 크게 3가지다. 영국/미국형, 독일형, 북유럽형. 시간관계상 영국/미국형이 북유럽형이 어떻게 다르지만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영국/미국형은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알아서 노동시장에 뛰어들어 경제 문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시장경제라는 게 적응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자도 있다. 영국/미국은 시장소득으로 되지 않는 부분을 메꿔주자는 거다. 이것을 잔여적 복지라 한다. residual, 잔여. 남아있는 계산서들을 누군가 메꿔주어야 하지 않느냐. 복지가 잔여적으로 주어진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 세부적으로 사례별/사안별으로 줄거냐 말거냐를 나눠서 준다. 요약하자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알아서 해야하는데, 부족한 걸 메꿔주는 게 복지다. 부족하지만 해줘야한다는 게 복지다. 그러나 영화 <완득이>처럼 우리사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햇반을 주는데, 이걸 받으려면 자기가 이런 case에 해당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때 별의별 일을 당하게 된다. 그 굴욕감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다. 낙인효과stigma, 주변인들의 시선 생각해보라. 박정희 시절의 복지, 70년대의 급식 시커먼 빵 주고, 피라미드형 서울우유 팩 준다. 돈을 걷는데, 고아원 아이들 3명이 있었다. 80명 중에. 그들에겐 그냥 줬다. 내 기억에 몇 개 더 받았다. 그들은 부끄러워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북유럽식 복지는 원칙적으로 소득정치가 아니라는 거다. 엘란데르 수상, 그가 62년에 선거에 나왔을 때, 사회민주당의 복지를 얘기했었는데, 거기서 복지란 인생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극대화시켜주는 것이라고 했다. 가령, 자녀가 있는데,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하자.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기쁜 소식으로 듣지 않는다. 노후가 날라갔다고 생각한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하위 70%에게 장수가 축복인가? 재앙이다. 내 손으로 죽을 용기는 없으니 누가 끊어줬으면 좋겠는데, 수명이 80세 90세으로 이어지면, 폐휴지 줍는 거 몇십년해야 하는거냐, 학부모의 경우와 할아버지 할머니에겐 선택의 자유가 너무 적다. 살아있는 게 재앙인 거다. 이 사람들이 중세의 농노와 다를 게 뭐냐. 비록 페스트나 기근으로 동네사람들이 죽기는 했어도, 농노들만 굶어죽은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우리가 뭘 간과하고 있냐면,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회가 왔을 때, 돈걱정 없이 선택할 사람 몇 퍼센트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에 10%도 안된다. 엘란데르 수상 얘기는 돈이 있건 없건 노동자가 자본자건 인생의 몇가지 국면에서 최소한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선택의 기회를 보장한다. 이게 스웨덴복지의 이념이다 이렇게 설명한다. 음악교육, 클래식교육 100%보장되어 있으면 재앙이 아닐 거다. 악기구입, 레슨, 재능만 있다면 교육받을 기회주어진다면 그게 왜 재앙이겠는가. 경사지. 화려한 노후생활까지는 아니더라도 돈이 없어서 쪽방으로 가야하는 공포에 시달릴 일 없다면 빨리 죽기를 바라진 않을 거다.
복지는 시장에서 소득을 얼마나 받느냐와 차원과 다른 문제다. 자신의 인생의 자유를 얼만큼 보장받아야 하는가? 똑같이! 클래식 음악공교육이 전형적인 복지다. 공공소비다. 출산수당, 부자라서 덜 주는 게 아니라 최소한 저소득층부터 중산층까지는 똑같이 받는 거다. 여기에는 한 가지 더 보태야 한다.
지금까지는 가치에 대한 복지 원리를 얘기했는데, 경제학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 퍼주고도 유지가 되느냐? 이 차원 말이다. 원래 엘란데르 수상의 말은 1960년대 초 얘긴데, 30년대 중반부터 복지정책이 이미 나타났다. 당시 경제학적 용어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원래 나온 논리는, 사회를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산업발전에 병목이 생긴다. 사회를 효율적인 구조로 유지하지 않으면, 산업의 변화를 사회가 좇아가진 못한다는 건다. 파격적이다. 이 원리를 주창한 사람은 군나르 뮈르달, 1974년 노벨경제학수상자다.
우리 속담에 이런 게 있다. 호미로 막을 것을 불도져로 막는다? 사회가 후졌다는 것은, 경제가 융성하고 강하려면 산업기술이 발전해야 하는데, 사회구조가 후지면 이게 안된다는 거다.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되는데,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그걸 메꾸다 보면 경제전체가 가라앉는다.
KTX가 뚫리고 교통수단이 발전하면 슬럼과 재개발 지역이 생긴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런 피해를 막기 위해 고속철도 뚫을 것을 반대한다? 절대적 개발반대론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게 문제다. 빈집이 많아지고 슬럼가의 범죄율이 증가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렇게 범죄율이 증가하면, 경찰이 증가하고, 교도소를 세워야한다. 이 비용이 더 비싸다. 그걸 왜 내버려두냐. 미리 그 전에 범죄율 올라가지 않도록 학교 더 짓고 교육프로그램 더 신설하고 마을 사람들이 안심할수 있도록 정착 돕는 프로그램 가동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비용이 나가겠는가?
사회정책을 쓴다면, 사후적으로만 쓸려고 하느냐. 그러지 말고 예방적 사회정책을 하자. 지금 호미들고 가서 막자는 거다. 예방적사회정책! 복지정책은 여기서부터 나온다. 지금 산업이 발전하고, 사회 성장, 조치하지 않으면 사회가 후져지고 산업의 병목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빨리 사회를 성숙시켜야한다.
산업과의 관계를 위해 한 예를 소개하면. 영어 교육 문제다. 논란이 많지만, 전세계 지구화, 산업구조의 변화로 봤을 때, 영어교육의 강화를 피할 수 없다. 인터넷 정보가 다 영어라서, 읽을 수 있어야 정보량이 늘어난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력 가질 수가 없다, 영어를 못하면.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줄세우기 시험보는 용도의 영어다. 이런 영어는 말고. 우리말 언어구조의 특징 때문에 영어에 불리한데, 사업구조는 탈산업사회덴, 영어 안하면 낙후될터. 20-30년 후에는 영어 읽고 말하기 못하면 더욱 양극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돈을 풀어서 영어공교육을 늘리면, 사설교육이 망할거고. 그러니까 대안은 전국 사기업을 사는 거다. 공짜에 가깝게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말이다. 인터넷망 까는 것처럼.
영어학원만 아니라 복지도 여기에 들어간다고 뮈르달은 본거다. 생활을 안정시켜서 기쁘게 만들어줘야 높은 생산량이 유지된다는 거다. 스웨덴 30년대에 출산율이 낮았다. 산업구조의 발달로 여성의 노동참여가 늘었지만, 사회구조가 후져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여성들이 애 낳기 귀찮아진 거다.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 사회구조가 애 낳는 걸 행복으로 이해하게끔 출산수당을 주기 시작했다. 당시 출산수당은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를 업데이트 하기 위한 출산수당, 부자건 빈자건 똑같이 수당을 준다. 처음에는 민스 테스트(means test)를 느슨하게 해서, 90% 통과할 수 있게 했다. 종교 여부도 묻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결혼여부를 묻지 않았다는 거다. 잘사니 못사니, 바람 폈니 아니니를 묻자는 게 아니다. 사회를 더 세련되게 만들기 위한 복지. 그렇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정리하자면, 사회구조를 업데이트하고, 높은 산업생산력을 유지하고, 이런 선순환. 이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이를 통해서, 스웨덴 노동공동체에 속한 사람 누구든지 인생에서 최대한 똑같은 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결합되었다.
스웨덴 복지사상은 부자를 털어서 가난한자 돕자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 인생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여기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이게 어떤 귀결을 낳느냐면, 복지를 받으면서 뺀질거리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개인주의 지수. 북유럽 사람들이 일등이다. 뺀질거린다는 거다. 그런 성향이 강해진다. 왜 그러냐면, 스웨덴식 복지국가의 사람들은 부자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거다. 보편적 복지, 사람들은 무서워지는 게 없다. 아이들의 재능이나 건강에 대해서도 경제적으로 크게 두렵지 않게 된다. 자신감이 생겨서 자기능력과 인생개발에만 관심을 갖게 된단다.
미국 같은 경우는 회장 앞에서는 돈있는 놈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 스웨덴 사람들은 그럴 필요 없다는 거다. 국가가 주는 것이기에 누군가에게 부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이게 오히려 사회문제가 될수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복지를 권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 상태에서 30년, 한 세대 지나면, 그리고 한 세대 더 지나면, 북유럽 우파 정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복지가 삭감되기도 하지만, 근간을 흔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2006년에 스웨덴 보수당이 집권했을 때, 이제 우리가 노동당이라며 복지 제대로 하겠다고 해서 되었다고 한다. 우파 정당이라 할지라도 북유럽 근간을 흔들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합의하는 삶의 방식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2006년에 mbc 프로그램 중에 W가 있었다.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핀란드 편에서 한국기자가 핀란드 사람들 만나서 복지국가의 여러 모습을 보여줬었다. 그때 충격적이었다. 그 나라에서 소득이 높은 사람 중에 한명이 나왔는데, 월 소득 3억 중에 1억이 세금이었다.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안아깝다는 거다. 별로 부자집 출신도 아니었는데, 돈없어서 못해본 게 없다는 거다. 박사 공부, ceo 다 할 수 있었다는 거다. 박사논문 쓸 때, 부모가 아팠는데 치료비 걱정없이 공부를 할수 있었다는 거다. 자신의 자식들도 나처럼 될거라고 생각한다고. 토탈 보험에 들어있다는 할까? 나머지 2억 중 1억은 기부한다고 한단다. 말을 들어보니 잘났다는 욕도 나오지만, 담담하게 하는 걸 보니 저 사회에서는 이미 복지국가라는 삶의 방식이 안착이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복지 일 안하지 않느냐? 아기가 태어나면 300만원 매달 나오는데, 기자가 왜그렇게 퍼주냐 하니, 공무원이 아이의 인권이라고 한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아이의 인권을 위해 모두가 똑같은 조건을 주어야 한다는 거다.
한 벽돌공 부부도 소개되었다. 그들에겐 아이 둘이 있는데, 부모가 다 실직상태인데, 솔직히 일하기 싫지 않냐고 물었더니, 질문을 이해 못하다가 돈과 상관없이 일하고 싶다는 거다. 숙련공인데, 일자리가 없어 빌빌거리면 사람들이 우습게 보지 않겠느냐는 거다. 노동의 동기는 돈과도 무관하진 않겠지만, 노동이라는 게 인생의 정신적 동기라고나 할까. 그렇게 자리 잡은 거다. 돈만 전부라는 게 아니란 거다. 반 세기를 저렇게 하니 세상이 바뀐듯하다. 우리 입장에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냥 잠정적 유토피아일뿐이다.
우리가 선택을 해야한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 쉽고 짧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나라 지배층들의 생각을 보면, 그들을 설득해 복지국가를 한다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별의별 일이 벌어질 거다. 이민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없을 거다. 저기로 가기 위해 잠정적 유토피아로 삼고, 모세 40년 출애굽 떠날 각오를 할거냐 말거냐 선택해야 한다. 지금 선택해도 우리 애 때서야 혜택을 볼수도 있을 거다. 후쿠시마와 세월호의 재앙을 기다리겠는가.
종교인들에게 추가로 하고 싶은 말은, 당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가치에 대한 얘기다. 인간이라면,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형상을 가졌다면, 사람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선택해야 한다. 경제학자가 목사 흉내내면 혼난다. 가치에 관련된 얘기는 여러분들이 해줬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사람이 살수는 없다. 세월호에 빠져죽거나 뭍에서 짐승처럼 굶어 죽거나.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어느 사회로 갈거냐.
스웨덴 사회민주당, 정당이 해야할 역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기능을 해야하는데. 루터교가 국교로 있다가, 정교분리 후, 정당이 종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정당도, 철학자도 입을 벌리지 않으면, 종교인들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설득의 역할.
목사.
풀뿌리 운동 15년 해왔는데, 아래로부터의 운동. 매번 실패한다. 평범한 교인들이 못버텨하더라. 어떻게 해야할까? 또 스웨덴은 인구가 적어서 가능했던 거 아닌가? 또 지역구내 좋은 제도들 많은데 잘 실행이 안되는 문제?
홍기빈.
대답하기 쉬운 대답을 먼저 하자면, 인구문제는 쉽다. 우리나라가 옛날에 80년대까지 벤치마킹한 나라는 일본이다. 90-2000년대에는 미국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의 인구는 1억 3천만, 미국은 더 많다. 스웨덴이 우리와 훨씬 가깝다. 우리나라가 말은 5천만인데, 수도권에만 2천만이 밀집했다, 그렇기에 도시국가다. 인구얘기를 하자면, 벤치마킹하기에는 일본/미국 따라간게 어처구니 없는 거다.
프랑스 이하의 크기를 가진 인구. 같은 모델이 적용될 수있다고 생각한다. 스위스는 너무 적으니까 제외하고. 스웨덴 모델이 적실성 있는 것은, 민족 동일성 문제 때문이다. 순수혈통얘기하는 건 아니다. 이주노동자 많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민족적 동질성 큰 집단이다. 스웨덴은 이민자가 많아 그게 사회문제인데, 인구문제는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제도가 많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의지로 바꿔야 할거고. 스웨덴 베끼자는 거 아니다. 가능한 거도 아니고. 스웨덴을 참조대상으로 삼을 반대할 수는 없겠다.
첫 번째 답. 목회에 대한 건 말할 수 잇는 게 없지만, 난 풀뿌리주의자 아니다. 맑스주의 폐해를 또 얘기하자면, 맑스주의자들의 한 집단은 정권획득이고, 한 집단은 아래로부터다. 아주 미치겠다. 말을 막하겠다. 386정치인들이 맑스주의에 대해 이상하게 말한 결과인데. 권력 먹으면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진보정당도 노동운동하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정치편향, 정권잡아야 한다는 거 말이다. 반면, 리버테리안 맑스주의는 아나키즘과 비슷하다. 아래로부터다. 양쪽극단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동전의 양면이다. 실제 삶의 환경을 바꾸려면 권력도 잡아야 하고 제도도 바꾸고 선거도 이기고 돈도 타내야한다. 아래로부터 뭐가 준비되어 있어도, 나침반이 없으면 뭘 할거냐. 나도 그게 제일 고민인 건데, 양쪽으로 나가서 찢어지는데, 선순환 관계로 만드는 운동방식이 뭐가 없을까. 그 문제가 풀리면 다른 형태의 정당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하려면 세 번째 질문이랑 연결되는데, 지자체 제도 좋고 혁신적인 거 있다. 지역 토후들 때문에 각종 네트워크 문제로 제도가 작동 안되는 경우가 있다. 이거를 어떻게 싸워나갈 것이냐. 토후세력을 밀어내고 대처할 양성할 사람들이 있느냐가 문제다.
나는 사회적 시민을 양성하자는 말을 쓰는데, 시민은 부르주아 시민으로 흔히들 사람들이 생각한다. 개인의 이해관계, 권리를 지키자는 시민운동으로 생각하는데, 지금 존재해야 하는 것은, 나 가 아니라, 사회적 시민,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할 능력과 의사를 가질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운동이 개인적 시민들, 권리를 각성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갔다. 우리, 우리의 권리, 우리를 단위로 하는 시민운동을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사회적 시민 양성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뭘 해봐야 않겠는가 싶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회경제적 권리가 있다. 예로, 노동삼권, 어디서 가르치냐. 성교육은 하는데, 노동삼권, 세입자의 권리, 아무도 안알려준다. 연말정산, 종합소득세 계산법에 대해 아무도 안 알려준다. 왜 세무서에서 돈내고 물어봐야 하는가. 기존의 교육이 있긴 하지만, 기존의 노조회원들 교육 위주로 되어있는데, 내 이익을 위해서 실용적인 각도로 알게 아니라, 모든 시민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세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걸 배워야 한다. 야학식으로 사회경제적 권리를 각성해야하는 프로그램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종으로 횡으로 엮는 관계에서 정치인들이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
우리나라 같은 경우 복지라는 게 개인적 차원으로 되어있는데?
우리나라는 색깔 논쟁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극복방안은?
홍기빈.
쉬운 문제다. 스웨덴에서 하는 건데. 이렇게 답하면 된다. 스웨덴은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다. 스웨덴에 대해 불온하고 시뻘겋다고 연결하는 사람은 없다. 곧 이케아 사가 들어올 거다. 반공 이데올로기 뚫는 무기가 생기는 거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못한다고 하는데,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의식이 강하다. 5-60년대 경제성장이 컸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전통에는 어떻게든 내가 해결해야한다는 자립심이 있다. 이게 복지 얘기할 때는 않좋게 나온다. 이걸 넘어서려면, 어떤 논리로 설득해야 하냐면, 산업사회얘기를 해야 한다. 자기가 돈벌어사는 것, 5-60년대 생각은 농사지을 때 해당되는 얘기다. 대농장이 아닌 경우에는 자기가 알아서 하기에 내가 안하면 망한다는 건데, 산업사회에서는 생산과 분배가 개인차원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일하기 싫다고 일 안하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회 분배문제가 따른다. 그렇기에 여기서 개인이 잘사느냐 못사느냐, 이것을 산업사회에서는 사회차원에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이렇게 설득해야 한다. 이래도 설득이 안된다면, 우리나라 지금 가구 소득 중간값 아냐고 물어라. 2인가구 300만원이 안된다. 분배 구조를 바로잡는 것도 사회가 해야할 문제이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목사.
스웨덴 복지 정책과 당시 교회의 역할은 어떠했나?
홍기빈.
내가 모르는 걸 보니, 아무 영향도 못주었을 거다. 루터파 정교분리 강했다. 분리가 심했다. 전개되는 과정에서 교회가 무슨 역할을 했다는 글을 읽지 못했다.
기독교가 제발 사회참여를 좀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교회서 쫓겨난게 80년대의 한 교회에서였다. 데모한다고, 대학교회 시뻘게진다고 나가라하더라. 어떤 경우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는 게 큰 도움을 주지 않나 싶다.
독일, 기독교민주당이 보수적인 복지사상을 제시한 바 있다. 온정주의문제, 받는 사람은 고마워해야하고, 주는 사람은 흐뭇해하고, 독일식 복지 시스템의 비판 받는 이유다.
스웨덴은 완전히 세속화되어 진행되었다. 궁금하긴 하다,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목사.
합리적으로 설득, 대화가 안된다는 문제. 당시 사민당보다 더 심각한 상황 아닌가.
홍기빈.
절망은 이해하겠는데, 사민당이 더 나은 환경이었는지 모르겠다. 스웨덴, 한 분수령되는 사건은 1931년에 일어났다. 스웨덴 부르주아는 노동자를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정당으로 인정을 안했었다. 노동자들이 집회를 해서 평화행진을 하는데, 조준사격을 해서 10명이 죽는 사건이 있었다. 스웨덴 사회가 말이 통하는 사회 아니었다. 피의 혁명 시도하려는 모둠이 있었는데, 사민당이 그걸 막았다. 사람만 죽고 정권도 못잡을 것 같아 치사한 논리로 노동자들을 설득시켰다. 주저앉혔다. 말이 안통하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일 거다.
이런 종류로 말을 섞는데, 아주 황당한 경우 많이 봤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목사.
페르 알빈 한손이 참 인상적이었다.
홍기빈.
한손 얘기를 좀 하겠다. 말이 안통하는 사람과 얘기하면서 느낀 중요한 스킬은,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상대방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 한손이 그랬다. 이 사람이 일자무식이다, 토론을 하면 자기 생각을 깔끔하게 뽑아내는 사람은 없다. 한손이란 사람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상대방보다 더 빨리 알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회의를 주재하면 굉장히 효과적이고 모두가 강력하게 화합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가들 중엔 여러 유형이 있지만, 그중 없는 유형이, 한손이다. 들을 때 주의 깊게 들어서 반영하려는 사람을 한명도 못봤다. 토론의 장 보면 항상 그러하다. 배워할 교훈은 악한 사람은 없다는 거다. 누구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말의 선의는 있을 거다. 그러니까 대화와 토론, 민주사회에서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붙들라는 거다.
한손은 좌파라는 거에 매이지 않고, 우파에 공감하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남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를 더 빨리 알아야 할 거다.
구조적으로 파야할 것으로 생각되는 게, 중산층인 경우 아버지가 돈이 없으면 몰락한다. 혼자 힘으로 중산층을 유지 못한다. 우리나라 소득 중간값, 가계 순자산, 부채 뺀 거, 부동산 다 합쳐서 1억 4천이다. 수도권에서 빌라 하나도 못산다. 이 숫자를 가지고 왜 여러 생각을 하냐면, 자산은 라이프사이클이다. 죽을 때까지 쓸 돈인 거다. 1억 4천으로 어느 가정이 노후를 맞이할 수 있는가, 아찔하다. 우리나라 국민 50%의 월소득은 280에 가진 게 1억 4천이라는 거다.
우리가 더 하나 기억할 것,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불평등한 나라가 많은데, 우리는 1950년에 가장 평등한 나라 중에 하나였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100년 누적된 경우일 텐데, 우리나라는 반세기만에 만들어졌다. 해방직후 이승만 정권 시, 농지개혁 때 조봉암의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을 소멸시켰다. 모범적인 농지개혁이다. 다 고만고만하게 분리된 거다. 공장 상당량은 북한에 있었고, 적산으로 처리되어 정부가 쥐고 있었다. 부자는 없었다. 다 비슷하게 가난했다. 2세대가 지나니까 OCED에서 흉측한 터키 정도 방불케하는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다. 불평등을 양산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거다. 이걸 시정하지 않고서는 복지 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해결하자고 얘기해야 한다.
목사.
예체능계 고등학교 입학하려는데, 할아버지가 부자냐고 묻더라. 소득가지고는 안된다는 얘기다.
홍기빈.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 당부드리는 것은, 사람들한테 우리가 왜 같이 모여사느냐는 질문을 던져달라. 나 같은 사람은 못한다. 닭살돋아해서. 사회라는 게 뭐냐고 물어 달라. 이 질문에 한 시니커한 친구가 이렇게 답하더라. 글로벌하게 잘 나가고 싶은데 영어가 안되는 사람들의 모임. 대한민국의 정의는 나혼자 부자되는 건데, 영어가 안되서 서로 등칠려고 모여 있는 거란다. 반론도 못하겠고, 화는 나더라. 이 상태에서 복지하자는 건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우리가 모여살고 있는 이유가 뭐냐?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 것 같다.
첫댓글 이번 모임을 통해서는 '경제'분야에 대해, 특히 '복지'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지도를 얻게 된 것 같고요. 또 페르 알빈 한손이란 인물에 깊이 놀랐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녹취한 것 중에 가장 길었던 것 같은데, 대화의 밀도도 상당해서,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녹취 푸느라 고생하셨네요. 홍기빈 저자님 모시고 싶은데 인천예요. 어떻게 해야하나요?
책이나 인터넷 검색하면 이메일 주소 알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