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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8월 17일(수)
그동안 코로나로 참 오랫만의 나들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2018년 6월에 영국 선영이 집에 다녀 온 후로 실로 4년만의 외출(?)이다. 오전 11;25분 출발하는 대한항공인데 공항까지 가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도곡동을 거쳐 가는 6009번 셔틀버스가 코로나 상황으로 손님이 줄어 아침 7시에 한 대 있고 10시까지는 운행이 없으니 7시 버스를 탈 수 밖에 없었는데 7시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 2번 터미널에 내리니 8:10, 탑승시간까지는 3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했다.
정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런던까지 14시간이나 걸리는 시간을 계속 낮으로만 간다. 잠시 졸다가 눈 떠 보면 아직도 4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고 남은 시간이 두배나 더 남은 것이다. 비행기가 서쪽으로 갈 때는 지구의 자전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역풍이라 비행시간이 더 걸리고 20시간이 넘도록 낮이 계속된다. 예전에 젊은 날에는 비행기가 좀 더 오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말 주리가 틀리는 지경이다.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은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라니까 외손주 지환이와 동갑내기인데 3살 때 영국 갔다가 잠시 한국으로 돌아 오고 다시 영국에서 학교 다니고 있다기에 한국이 좋으냐 영국이 좋으냐 물어 보니 서슴없이 한국이 좋다고 한다.
인천에서 오전 11:25 이륙후 점심식사가 나왔고 중간에 간식이 나온 후에 런던도착 2시간 전에 식사가 한번 더 나왔는데 영국시간으로 봐서는 저녁식사인 셈이다. 히드로공항이 가까워져서 창문 덮개를 열고 내다보니 하늘은 잔뜩 흐리고 창에 빗물이 스친다. 비가 오는 모양이다. 꼭 14시간만에 히드로공항에 도착했고 입국수속은 자동으로 하니까 금세 끝났지만 짐이 나오질 않는다. 기다리는 사이에 선영이가 나가는 출구 앞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이 왔다. 한참 기다렸더니 짐이 나오는데 10개나 나오고 또 감감 무소식이다. 인천공항 같으면 잠깐이면 짐이 다 나올텐데 영국은 쉬엄쉬엄 하나 보다. 무려 한시간 반을 기다려 짐을 찾아 밖에 나오니 저녁 7시인데 아직 훤하다. 지환이가 엄마 따라 할아버지 마중을 나왔다.
유럽에는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잔디가 다 말라 비틀어 지고 나뭇잎은 단풍이 든 것처럼 누렇다. 다행이 오늘 비가 좀 내렸다고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아서 30분 정도에 갈 수 있었다. 지난 1월에 이사 한 집은 타운하우스라고 하는데 우리식으로는 연립주택인데 1층은 거실, 주방이고 2층은 침실 두 개가 있는 아주 작은 집이다. 집세가 만만치 않아서 작은 집으로 옮긴 것이다. 영국은 위도가 40이 넘어서 우리나라 보다 여름엔 낮이 길다. 8월 중순인데도 저녁 8시가 지나니 어둠이 밀려 온다.
8월 18일(목)
시차 때문인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시차에 빨리 적응하려면 낮잠을 안 자야 하기에 오늘부터 낮잠을 가급적 안자도록 해야겠다. 휴대폰이며 노트북을 잘 챙겨 온다고 했는데 와서 보니 노트북과 USB, 카메라 메모리칩, 외장 하드와 연결하는 멀티 컨넥터를 빼고 왔기에 여기서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는데 빠르면 내일 늦으면 모레쯤 온다고 하는데 그동안 노트북을 쓸 수 없으니 답답하다. 집 바로 옆에 수퍼마켓이 있어서 구경 삼아 수퍼에 가서 맥주와 매일 아침 먹어야 하는 야채를 사왔는데 토마토, 사과와 같은 과일도 그다지 비싸지 않고 싱싱해서 좋았다. 얼핏 보기에 식품가격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싼 것처럼 보인다. 영국물가 알아 주는데 집세, 휘발유, 전기요금 등은 상당히 비싸고 전화, 인터넷은 아주 싼편이다. 여기 있을 동안 쓰기 위해서 유심칩을 사서 안쓰는 전화기에 꽂으니 무선인터넷과 전화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직불카드도 하나 발급받아서 현금이 필요 없게 되었으니 이태리 여행갈 때에 편리하게 쓸 것 같다. 예전에는 여행가려면 현지 돈을 잔뜩 바꾸어 가곤 했고 혹시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오도 가도 못하니까 신경이 많이 쓰였만 지금은 카드 한장만 소지하면 되니까 참 편리한 세상이다.
오늘은 시차적응도 할 겸 나 다니지 않고 집에서 쉬면서 피렌체와 베네치아 여행에 필요한 숙소와 열차표와 배표를 구입하고 친케테레예약을 마무리 했다.
8월 19일(금)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영국 왕립 원예정원(RHS Garden Wisley)이 있다고 해서 다녀 왔다. 선영이가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서 가족도 무료 입장이 가능했다. 이 정원은 일명 The Great Garden이라고 하는데 규모가 정말 커서 하루에는 다 둘러 볼 수 없고 이틀이나 3일을 잡고 구경을 해야 한다고 하니 과연 Great Garden이라고 할만 하다. 오늘은 정원의 절반을 뚝 잘라서 보기로 했다, 정원의 외곽은 오래된 숲이고 중심부는 온갓 꽃들이 만발했다. 숲사이로는 산책로가 있어서 걷기 좋게 되어 있었고 가운데 있는 화단도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어서 길 따라 다니면서 구경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던 배룡나무, 수국, 코스모스, 루드베키아, 장미, 다알리아, 수련도 볼 수 있어 반가웠고 이름 모를 꽃들도 참 많은데 들어도 금세 잊어 버리기 때문에 꽃이름은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군데 군데 멋진 조각들도 눈길을 끈다.
평일인데도 가족단위로 나들이 온 사람들이 참 많다. 꽃을 좋아하는 나는 하루 종일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은데 꽃에 별로관심이 없는 손주 지홍이는 심심해 한다. 정원이 넓어서 하루에 다 둘러 보기에는 힘든 곳이라 오늘은 절반만 보고 다음 날 다시 와야겠다.
선영이 집은 대형 수퍼마켓이 바로 옆에 있어서 참 편리하다. 집도 작고 냉장고도 작아서 많이 넣을 수 없는데 수퍼가 가까우니까 필요한 식품을 매일 사다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웃 수퍼가 대형 냉장고 역할을 하는 셈이다. 영국에 있는 동안 여러 종류의 맥주를 골라 마시는 재미가 좋다. 유명한 기네스 흑맥주를 비롯하여 각 마을에서 생산되는 로컬비어 또한 맛이 참 좋다. 제품마다 향이 특별하고 알콜 도수도 아주 낮은 것부터 10도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과일과 야채가 싱싱하고 가격도 한국과 엇비슷해 보인다.
8월 20일(토)
어제 밤에는 깨지 않고 푹 잤더니 시차는 어느 정도 회복된 듯 하다. 지홍이와 지환이는 지금 방학인데 지홍이는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9월 7일부터 상급하교로 진학하는데 학교가 런던 외곽에 있어서 좀 멀기는 한데 통학버스가 있어서 버스정류장까지만 태워다 주면 된다고 한다. 영국은 신학년도가 우리와는 달리 9월에 시작된다. 지환이는 아직 졸업할 때가 멀어서 다니는 학교에 계속 다닐 건데 집에서 차로 약 5분(길이 안 막히면)인데 걸어서 다니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차량이 많이 다니고 도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아이들이 길 건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방학이라고 하지만 애들은 바이올린레슨이다 수학과외다 해서 매일 바쁜 것 같다.
오늘은 집 근처에 있는 Painshill Park에 가 보았다.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다. 영국은 공원과 Garden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여서 어디나 크고 작은 공원과 Garden이 널려 있다. Painshill Park은 18세기 전형적인 영국식 공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공원을 다 돌아 보려면 적어도 4시간은 걸린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여러 개의 호수가 다리로 이어지고 공원 남쪽으로 흐르는 강과 언덕에 있는 포도밭도 구경할만 하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발아래 굽이쳐 흐르는 강과 포도밭을 만나게 된다. 가족단위로 산책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간혹 데이트를 즐기러 온 연인들도 보이는데 공원이 무척 조용하고 고요한 느낌이다.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언덕 위에 세워진 Gothtic Temple인데 이름처럼 고딕양식을 뽐내는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Gohtic Temple에서 강변으로 내려 가면 건물 벽체만 남아 있는 성당건물이 강변에 있는데 18세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무너진 벽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 주는 듯하다. 강과 호수에는 오리가 많은데 종류도 다양하다. 체격이 큰 개리도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가까이 가도 잘 달아 나지 않아서 개리들의 노는 모습을 가까이 가서 촬영했다. 봄에 부화한 애기들은 다 자라서 어미만한 체격이 되었는데 5월쯤이면 애기들을 데리고 다니는 개리 가족의 모습도 볼만하다.
호수가에는 클리스탈 글로토라는 인공동굴도 있고 인조석으로 만든 여러 가지 조각들도 볼 수 있다. 아마 공원을 조성하면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일부러 만든 것 같다. 공원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가 숨겨져 있는데 Mausoleum이라는 유적의 흔적을 만났다. 물론 유적은 다 사라지고 작으마한 돌담만 남아 있다. 호수와 호수를 잇는 작은 다리도 아름답고 아름드리 소나무들도 볼만하다. 호수엔 낚싯대를 펼친 사람들도 보이고 입구에 강아지 환영이라고 써 붙여 놓았던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온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준비해간 샌드위치를 먹고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다 돌아 왔다.
8월 21일(일)
일요일인데 성당은 차를 타고 한참 가야 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아이들이 교회 가는 길에 엊그제 갔던 Wisley Garden에 나를 내려 주고 교회 마치면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엊그제 절반을 보았기에 오늘은 그때 보지 않았던 코스로 돌았다.
실내식물원에 들어 가보니 열대, 아열대식물들이 많았다.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식물들도 많아서 호기심이 발동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넓은 호수가엔 억새가 많이 보이는데 벌써 억새가 피었다. 한국 같으면 시월이나 되어야 필텐데 이곳 기온이 더 낮은가 보다. 넓은 정원 이곳 저곳을 둘러 보다가 입구에서 아이들을 다시 만나서 실내 식물원으로 가서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애들이 크고 나면 이 사진들이 추억이 되겠지.
8월 22일(월)
오늘 저녁에는 뮤지컬 미녀와 야수를 보기로 했다. 오전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서서 런던 구경부터 했다. 집에서 런던까지는 약 35km로서 수원에서 서울 정도 되지만 차를 가지고 런던에 들어 가면 주차도 힘들고 길이 막혀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늘 대중교통으로 다닌다. 집에서 약 15분 거리인 뉴몰던 열차역까지 승용차로 가서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열차를 갈아 탄다. 런던 워털루 열차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런던 시내에는 못 가는 곳이 없다. 맨 먼저 간 곳은 소호지역에 있는 차이나타운인데 촌스럽게도 중국식으로 칠한 붉은색 건물과 깃발이 휘날린다. 땅값비싼 소호지역에 차이나타운을 만들었으니 이곳에 점포를 가진 중국 사람들은 부자가 아닐까 싶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중국식당에 들어 가 요리를 몇 가지 시켰는데 가격도 착하고 맛도 괜찮은 편이었다.
소호지역에는 뮤지컬을 공연하는 극장이 여러 군데 있는데 오늘 저녁에 보려는 미녀와 야수를 공연하는 극장도 소호거리에 있으니 런던구경을 하고 저녁엔 이곳으로 다시 돌아 오면 된다. 소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트라팔가광장을 둘러 보고 그린파크를 거쳐 버킹엄궁까지 가 보았다. 옛날에 몇 번 왔던 곳인데 오랜만에 다시 오니 낯이 설었다. 버킹엄 앞 광장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댄다. 이곳이 에리자벳2세 여왕이 주로 거주하는 곳인데 영국에서 돌아 오자 며칠 후에 여왕의 서거 소식이 들렸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하이드파크가 나오는데 너무 많이 걷는 게 힘들어서 그린파크 잔디밭에 놓인 의자에서 쉬고 있는데 그 의자가 공짜가 아니었다. 좀 있으니 관리인이 와서 의자 하나당 1파운드씩 내라는 것이다. 웬 의자가 있나 했더니 세상엔 공짜가 없다.
뮤지컬 공연은 낯시간에 하는 극장도 있지만 대개는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하여 10시쯤이 막을 내린다. 영국이 뮤지컬의 본고장인 만큼 런던에 가면 뮤지컬 한 두편은 꼭 보는 게 좋다. 한편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려지면 출연 배우들만 바뀔 뿐 10~30년 계속 공연하기 때문에 무대장치가 완벽하게 된다. 오늘 보는 미녀와 야수는 만화영화로도 인기가 있었던 작품인데 아이들만 좋아 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 찾는 뮤지컬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사진촬영은 금지된다. 중간 휴식시간에는 화장실도 다녀 오고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맥주를 사서 마시기도 한다. 땅값이 비싼 런던이다 보니 앞줄과의 좌석 사이가 너무 좁아서 한사람이 움직이려면 모두 일어서야 하고 무대를 향한 경사가 너무 급해서 안전사고의 위험도 있어 보인다. 뮤지컬 표는 인터넷으로 미리 사거나 당일 현장 발권도 가능하며 공동티켓 매표소에서 살 수 있는데 매진이 아니라면 공동티켓 매표소에서 공연 임박해서 사면 아주 싼 가격에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 봐도 되고 내일 봐도 되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방법이고 시간이 빠듯한 여행객은 미리 사야 하기에 보통 15만원 이상은 주어야 표를 살 수 있다. 공연은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 끝났는데 지하철 타고 열차 갈아 타고 뉴몰든에서 승용차 타고 집에 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8월 23일(화)
오늘도 런던 나들이를 했다. 열차와 전철 갈아 타는 방법만 알면 대중교통으로 런던 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늘은 런던의 동쪽지역을 목표로 하고 먼저 세인트폴 대성당에 갔다. 전철이 빠르기는 한데 2층버스를 타 보니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차창 밖으로 시내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다.
110m 높이의 거대한 돔이 있는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을 대표하는 성당이기도 하며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성당으로 돔 크기만 해도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Christopher Wren이 설계한 건물로 1675년 6월 21일에 첫 돌을 세웠고 건설을 시작한 지 30년 만인 1710년에 고딕과 바로크가 혼합된 양식으로 완공되었다. 하지만 서쪽 탑의 이중 지붕이나 난간 등은 크리스토퍼 렌 경의 설계와 달리 1718년에 추가되어 변형되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서면 메인 돔 아래 십자형 배치의 빈 공간이 보이는데 당시 건축 화가였던 James Thornhill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지하로 내려가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2만 8천여 명의 군인들이 잠들어 있는 추모비와 함께 넬슨, 웰링턴, 나이팅 게일, 윈스턴 처칠 등 200여 명의 유명인들의 납골당도 있다. 특히 렌 경의 묘비에는 ‘Lector, si monumentum requiris, circumspice’(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여, 그의 기념비를 찾고 있다면 주위를 둘러보라)라고 적혀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세인트 폴 성당의 돔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데 꼭대기에 올라 가면 런던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17톤에 이르는 거대한 종 Great Paul은 13시에 5분간 타종한다. 돔으로 올라 가는 계단이 위로 갈수록 좁아져서 내려 오는 사람과 비켜 가면서 올라 가야 한다. 이 성당은 특히 1981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찰스 왕세자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며 1965년 윈스톤 처칠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Tower of London은 지척간인데 걷기 싫어서 버스를 타고 세번째 정거장에서 내렸다. Tower of London은 런던 시 동쪽, 템스 강의 북측 강변에 있다.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대관식(1066년의 크리스마스)을 마친 뒤 토착상인사회를 지배하고 중요한 항구였던 런던 소(沼)를 통제할 목적으로 곧 바로 요새를 세웠다(런던 소는 19세기 들어서 그 하류에 선착장을 건설하기까지 가장 중요한 항구로 사용되었음). 화이트 타워라고도 불리는 중앙 본체는 로마 시대 때 지은 성벽 바로 안쪽에 노르망디의 케인 지역에서 실어온 석회석을 재료로 1078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12, 13세기에 성벽 밖으로 요새를 넓혔고 화이트 타워는 안팎으로 동심원(同心圓)을 이룬 방벽의 중심이 되었다.
안쪽 '장막'(방벽)에는 13개의 탑이 있는데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블러디 타워, 비첨 타워, 웨이크필드 타워이다. 바깥 방벽에는 6개의 탑과 2개의 능보가 있다. 그 둘레에는 해자(垓字)를 파서 템스 강에서 물을 끌어왔으나 1843년부터는 물을 빼버렸다고 힌다. 해자 바깥 성벽에는 대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銃眼)이 있으며 그중 몇 개에서는 지금도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포를 쏜다고 한다. 영국 왕실의 의전에 쓰이는 보물과 의복들은 이곳 지하에 있는 Jewel House에 보관한다. 런던 탑 건물 전체의 면적은 7㏊이다. 유일한 육로 출입구는 남서쪽 귀퉁이에 있으며 런던 시내와 연결된다. 런던의 주요 교통로로 강을 이용하고 있었을 때는 대개 13세기에 만든 수문으로 드나들었다. '반역자의 문'이라는 수문의 별명은 오랫동안 감옥으로 쓰이던 런던 탑에 호송되는 죄수들이 이 문으로 지나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많은 죄수들이 이곳의 타워 그린에서 살해되거나 처형되었으며 성 바깥의 타워 힐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오늘날 화이트 타워에 있는 무기창고와 그 옆에 있는 17세기 후반의 벽돌 건물에는 중세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무기와 갑옷, 투구가 소장되어 있다.
런던 탑은 17세기까지 왕의 공관으로 쓰였다. 이 당시에는 조폐국·법령보관소·공문서보관소·왕립동물원(라이언 타워) 등도 이곳에 있었으나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탑 안에는 수비대가 있으며 런던 탑 경내에서는 런던 시장과 주교의 관할을 받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곳은 국왕을 대신하여 육군원수 중에서 임명되는 관리장관이 장악하고 있다. 이 곳의 관리장관은 타워 그린에 있는 16세기 여왕의 집에서 살며 보초 근위병을 다스린다. 그들은 지금도 튜더 왕조 때의 제복을 입고 있다.
Towoer of London 바로 옆에 테임즈강을 가로 지르는 Tower Bridge가 있다. 테임즈 강은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의 주요 무대여서 하루에 수백 척의 배가 케임즈 강을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6m 이상인데다 다리와 강 수면이 10m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배들이 쉽게 통과하지 못했던 탓에 개폐식 다리를 짓게 되었다.
1894년 완공된 빅토리아 양식의 타워 브리지는 원래 초콜릿 브라운 색상으로 칠했는데 1977년 붉은색과 흰색, 파란색으로 도색을 해 현재와 같아졌다고 한다. 총 길이가 250m, 다리 하나의 무게만 해도 1,000톤 가까이 되며 들어 올리는 데에 1분 30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에는 다리 중앙이 위로 올라가며 ‘八’ 모양이 된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현재는 다리가 올라가는 횟수가 일주일에 2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타워 브리지 옆에는 타워 브리지의 설계와 역사를 볼 수 있는 ‘타워 브리지 전시장’이 있다.
Tower Bridge를 따라 테임즈 강을 건너서 테임즈 강변을 걸으면서 바라보는 런던 풍경도 볼만하다. 3년 전에 왔을 때 선영이랑 식사를 했던 Sky Garden 건물도 보인다. 이 건몰의 맨 꼭대기 층은 천정이 유리로된 식당인데 자연채광을 받으며 온갖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서 마치 실내식물원에 온 듯 하다. 창밖으로 테임즈강과 런던시가지를 바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명소로 꼽힌다.
다시 테임즈 강을 건너서 Monument로 갔다. 1666년 9월 2일 Pudding Lane에서 발생한 화재는 바람을 타고 런던의 60% 이상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5일 동안이나 계속된 화재로 13,000여 가옥이 파괴되었다. 대화재 후 Christopher Wren이 도시를 재설계하면서 지금과 비슷한 도시의 모습이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 뒤 1671년 크리스토퍼 렌과 Robert Hooke은 화재가 날 당시의 발화점에서 61.57m 떨어진 곳에 61.57m의 높이로 불멸의 런던을 상징하는 기념탑을 지었는데 1677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고 한다. 기둥 기단부 둘레에 새겨진 부조는 도시를 재건하는 찰스 2세를 보여 주고 있으며 311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대화재 기념탑에 오를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근사한 런던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근처 Bank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워터루역에서 열차로 갈아 타고 집으로 돌아 왔다.
8월 24일(수)
오늘은 뮤지컬 레미제라불을 보기로 해서 점심식사를 하고 런던으로 나가는데 연3일 런던행차를 한다. 방학 중이라 지홍이, 지환이와 함께 나갔다. 뮤지컬은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하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코번트가든에 갔다.
소호 구역에서 좀 더 북쪽의 런던 중심부로 향하다 보면 코벤트 가든 구역을 만나게 된다. 코벤트 가든은 런던 지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만큼 런던 여행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숨겨진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닐스 야드의 골목을 걷다 보면 진짜 런던 속 런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 공연과 맛있는 음식,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대영 박물관도 만날 수 있으니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면 유서 깊은 작품들과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이 꽃을 팔던 시장이 바로 코번트 가든이다. 17세기 때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코번트(수도원) 소유의 토지가 있었던 것에 유래해 코번트 가든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건축가 Inigo Jones가 북부 이탈리아의 리보르노 지역에 있는 광장을 본떠 주거 광장으로 바꾸면서 마켓이 들어섰고 더불어 테임즈 강 근처에 있는 지리적 위치 덕에 외국에서 들여오는 상품들이 코번트 가든으로 먼저 오게 됨에 따라 차츰 번성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옷이나 책, 그림, 공예품, 골동품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과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시장을 보러 오는 관광객보다 거리의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나 거리 공연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더 많다. 이곳에서는 온종일 거리 공연을 볼 수 있는데, 실력도 수준급이다.
코번트 가든구경을 마치고 극장으로 갔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은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뮤지컬이다.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이 혁명과 속죄를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뮤지컬 이전에 1980년에 콘셉트 앨범이 발매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4일에 프랑스 영화감독 로베르 오셍 (Robert Hossein)의 감독 아래 공연으로 제작되어 파리 실내 경기장에서 초연되었다.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Claude-Michel Schönberg)가 작곡을 담당했고 알랭 부블리유(Alain Boublil)가 극본을 썼다.
이 듀오는 또다른 뮤지컬 미스 사이공도 함께 만들었다. 이후 런던과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그동안 여러 편의 뮤지컬을 보았지만 영상미에 있어서 레미제라블은 단연 으뜸이라는 생각이다. 무대장치도 훌륭하고 은은한 조명이 무대를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것 같았다. 무대 전체가 마치 한푹의 그림이거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이 뮤지컬은 1987년 토니 어워드에서 최고의 뮤지컬 부문을 비롯하여 8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노래로는 I Dreamed a Dream, Do You Hear the People Sing?(민중의 노래), One Day More(내일이면), On My Own 등이 유명하다. 2012년 영화판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판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레미제라블’ 정말 멋진 뮤지컬을 보았다.
8월 25일(목)
어제도 밤늦게 귀가 해서 피로가 쌓인 듯 하다. 그래서 오전에는 쉬었다가 오후에 지홍이와 같이 런던으로 나갔다. 오늘은 대영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대영박물관은 영국에 올 때마다 가는 곳이지만 갈 때마다 감동은 다르다. 미리 예약만 하면 입장을 빠른데 예약없이 가면 많이 기다려야 한다. 입장료는 없지만 예약은 필수다. 이렇게 엄청난 유물을 입장료도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럽다.
대영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류 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이 볼만하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로마 등에서 시작된 고대 문명에 대한 전시품들이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미라와 로제타석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붐비는 섹션이다. 또한 내부에는 한국관이 2000년 11월에 신설되었는데 구석기 유물부터 조선 후기 미술품까지 두루 전시하고 있다.
대영박물관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로제타 스톤이나 람세스 2세 석상과 그리스 신전 부조물을 비롯해 이집트의 미라 등 그리스 양식의 건물 내에 전시된 엄청난 양의 수집품들을 관람하다 보면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 시대로의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작품을 시대별로 관람하거나 전시관별로 관람할 경우 시간이 아주 많이 소요된다. 여유가 있다면 찬찬히 다 둘러보는 것이 제일이지만 바쁜 여행 일정에 동선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최대한 많은 작품을 둘러볼 수 있도록 이와 같은 관람 순서를 추천한다. 4 전시실 → 6 전시실 → 10 전시실 → 18 전시실 → 24 전시실(25 전시실 내려갔다 올 것) → 27 전시실 → 33 전시실 → 34 전시실 → 67 전시실 → 66 전시실 → 63 전시실 → 56 전시실 → 55 전시실 → 65 전시실 → 52 전시실 → 49 전시실 → 41 전시실의 순서가 좋다고 한다.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곳은 이집트유물이다.
4 전시실(고대 이집트)의 유물 중 람세스 2세(Colossal Bust of Ramesses II)는 출애굽기 시절의 파라오로 알려진 제19 왕조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의 윗부분으로 테베에 있는 람세스 2세의 기념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The Rosetta Stone은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중해의 작은 마을인 이집트의 로제타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이 현무암 비석 조각에는 멤피스의 신관이 선포한 일상적인 법령이 세 가지 언어로 새겨져 있어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돌이라고 할 수 있는 로제타 스톤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대가 발견하였으나 이후 나폴레옹군이 영국군에 패하여 도망 가다가 돌을 버리고 간 것을 영국군이 습득하여 영국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6 전시실(중동)의 라마수상(Colossal Statue of a Winged Lion)은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님부르 북서쪽 궁전에 있는 거대한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은 날개가 달려 있으며 인간의 머리를 하고 있다. 악령으로부터 문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2개의 수호상 중 하나이며 다섯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정면에서 보면 다리가 4개지만 측면에서 보면 5개로 보인다.
18 전시실(고대 그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Parthenon)은 아테네의 상징으로 수호신 아테네에게 바쳐진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물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경의 유물로 19세기에 영국으로 가져왔으며 엘진 대리석이라고 불리는 이 부조물들을 보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우수한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인 켄타우로스와 라피스족이 싸우는 전투를 보여 주는 조각상은 무척 유명하며 달의 여신 셀린느의 이륜 전차를 이끄는 말의 두상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지홍이가 좀 심심해 해서 서둘러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물렸더니 기분이 전환되는 것 같았다. 하긴 아이들은 이런데는 관심이 있을 수 없지만 자주 보다 보면 나중에 커서 기억에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8월 26일(금)
오늘은 집에서 차로 한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곳을 둘러 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잘 틈을 이용해서 이른 아침에 Box Hill로 갔다.
Box Hill은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런던 서쪽 Surrey지역에 있는 높지 않은 언덕에 숲과 산책로가 있는 하이킹코스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이곳도 National Trust에서 관리하고 있는 자연경관지역 중의 하나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가 자욱하다. 언덕에 올라 가니 강이 흐르고 건너편 산기슭에는 아름다운 주택들이 목가적인 풍경이다. 동네 사람들이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기도 한다. 안개가 걷히면서 구름이 되어 언덕과 산자락 위로 올라가는 풍경이 참 멋지다.
집에 돌아 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애들을 태우고 이번에는 Shere마을로 갔다. 집에서 Shere까지는 40분 정도 걸리는데 로맨틱 홀리데이를 촬영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캐머론 디아즈와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로맨틱 홀리데이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L.A에서 잘 나가는 영화예고편 제작회사 사장인 아만다(카메론 디아즈)는 아름다운 외모에 넘쳐나는 돈, 화려한 인맥 등 누가 봐도 성공한 여자다. 부족할 것 없는 그녀에게도 골칫거리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맘처럼 되지 않는 연애문제.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남자친구는 회사의 어린 직원과 바람이 나고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끔찍하기만 하다.
영국 전원의 예쁜 오두막집에 살면서 인기 웨딩 칼럼을 연재하는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 그녀는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와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여자와의 약혼을 발표한다.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받은 그녀는 자신의 삶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두 여자는 온라인상에서 ‘홈 익스체인지 휴가’를 보낼 수 있는 사이트를 발견하고 2주간의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서로의 집을 바꿔 생활하기로 계획한다. 각각 L.A와 영국으로 날아간 아만다와 아이리스. 예쁜 오두막집에서 오직 혼자만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마음먹고 있던 아만다에게 아이리스의 매력적인 오빠 그레엄(쥬드 로)이 불쑥 찾아온다. 첫눈에 호감을 느낀 둘은 조심스럽게 데이트를 시작하지만 그레엄은 자꾸만 아만다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반면 L.A로 간 아이리스는 아만다의 친구이자 영화음악 작곡가인 마일스(잭 블랙)를 만난다. 푸근한 외모와 따뜻한 유머감각을 지닌 섬세한 감수성의 이 남자와 서로의 감성을 조금씩 이해하며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낯선 여행지, 그러나 왠지 익숙한 이 감정!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크리스마스 휴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실 최고의 러브스토리가 아닌가 한다.
Shere마을에는 작으마한 개울이 흘러 가고 동화속의 집들처럼 참 아름답다. 동네 아이스크림 집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맛이 좋아 길게 줄을 서고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커피를 마시던 카페 Whate Horse도 인기가 좋다.
Shere에서 약 10분 거리에 Gomshall마을이 있는데 옛날 방아를 찧던 물레방앗간이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지만 참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런데 이 물레방앗간 레스토랑도 코로나로 인하여 손님이 없어 문을 닫고 매물로 나와 있다. 도로변에 있는 레스토랑은 야외에 테이블을 놓았는데 주위에 얼마나 꽃들을 많이 심었는지 식당이라기 보다 가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작은 개울에는 가재가 있어서 한 마리 잡았다가 놓아 주었다. 이 식당에서 영국 대표메뉴 Chips and Fish를 시켰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Gomshall마을을 떠나 돌아 오는 길에 Guildford를 들렀다. 길퍼드는 색슨 시대에 왕실의 장원이었으며 교회탑은 노르만 침공 이전의 양식을 보여준다. 도시 설립인가는 1257년에 나왔는데 노르만 양식의 성곽 이외에도 중앙로를 따라서 역사적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스태그힐에는 에드워드 모페 경이 설계한 현대적 대성당이 있는데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에서 2번째로 지어진 성공회성당(1936~68 건축)이다. 1927년 이 교구는 윈체스터에서 떨어져나왔다. 근처에는 1966년 설립된 서리대학교가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자동차공업 및 경공업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으며 북동쪽으로 44㎞ 떨어진 런던까지 통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살기 좋은 주택지구가 되었다. 언덕 위에 있는 길퍼드성은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적이다. 성곽 주변에는 산책로와 꽃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찾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오늘은 이른 아침 Box Hill로 시작하여 Shere, Gomshall 그리고 Guildford까지 참 여러군데를 둘러 보았다.
8월 27일(토)
오늘 지환이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날이라 레슨 선생님 집까지 같이 가서 레슨 끝날 때까지 테임즈강변을 산책하며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댁은 킹스턴인데 집 바로 뒤편이 테임즈 강이었다. 주말이라 카약을 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강에는 고니, 오리, 갈매기가 많이 보인다.
고니는 원래 겨울철새인데 그냥 주저 앉아 사는 녀석들도 많은가 보다. 이곳은 런던보다 테임즈강의 상류에 해당하는데 물이 아주 맑았다. 그런데 런던을 지날 무렵이면 황토빛이 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강변에는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고 정박 중인 배들이 무척 한가로워 보인다. 지환이가 레슨을 마치고 Notting Hill로 갔다. 주말에 소수민족축제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축제는 다음 주에 열린다고 해서 노천시장구경을 했다. 길에 설치한 판매대에서 이것 저것 팔고 있는데 그림, 쇼핑백, 과일, 음식, 골통품... 없는 게 없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지 인파속에서 아이들 잊어 버릴까 손을 꼭 잡고 다녔다. 파스텔톤으로 칠을 한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사진 찍기에 좋은 풍경이라 거리 모습을 많이 담았다. 이곳은 Notting Hill영화를 촬영한 곳이라는데 나는 그 영화를 못 봤지만 그 영화 때문에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주인공이 살던 푸른 대문집과 지금은 카페가 되었지만 책방 앞에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영화주제가 ‘She’도 인기 있는 곡이다. 역시 영화의 위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인데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잉글랜드 런던의 노팅힐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하여 1999년 5월 21일에 개봉한 영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영화 각본은 이전에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제작했던 리처드 커티스가 썼다. 덩컨 켄워시가 제작했고 로저 미셸이 감독했고 줄리아 로버츠, 휴 그랜트 등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서점 주인 윌리엄 대커의 이야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 애나 스콧이 책방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몇 분 후 윌리엄은 애나와 길거리에서 부딪치고 오렌지 주스를 그녀에게 쏟는다. 윌리엄은 그녀에게 옷을 갈아 입을 장소를 제공하고 모든 남자의 로망인 여자 사이에 긴장된 구애가 시작된다.
《노팅힐》은 비평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극장가에서 흥행을 해서 지금까지 개봉한 영국 영화 중에 최고 수익을 얻었다. 영국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다른 두 개의 부문에 지명되었다. 또한 영국 코미디상과 영화 음악으로 브리트상을 포함 다양한 부문에서 수상을 했기에 이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것 같다.
태국식당에 들어 갔는데 이 식당은 건물 전체가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태국음식 몇 가지를 주문해서 나누어 맛을 보았는데 먹음직 했다. 옛날에 태국에 골프 자주 갈 때 태국음식이라면 우리식의 볶음밥을 ‘나시꼬랑’이라고 하던데 비슷한 걸 하나 시켰더니 태국에서 먹던 그런 맛은 아니었다.
8월 28일(일)
오늘부터 5박6일 일정으로 이태리 북부지역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베네치아, 피렌체 그리고 친케테레다. 12시 40분 비행기라 아침 9시에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웃집 사람의 차량에서 밧테리를 연결하여 시동을 걸어 보려고 해도 케이블이 없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어서 서울서 올 때 충전용 긴급 밧테리를 가지고 왔기에 연결해서 조작을 해 보아도 여전히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러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 가서 비행기를 놓칠까 봐 우버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게트웍공항에 도착하니 아직도 시간적 여유는 있어서 탑승수속을 하고 정시에 이륙했다. 이태리는 영국보다 시간이 한시간 빠르다. 실제 비행시간은 약 2시간인데 베네치아 마르코폴로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3시 30분이었다. 공항에 접근 할 무렵 베네치아 상공을 지나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베네치아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리가 창가가 아니어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공항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셔틀버스를 미리 예매해서 갔기에 바로 버스에 오를 수 있었으나 공항에서 배를 타고 베네치아로 가는 방법도 있는 것을 도착해서야 알았다. 베네치아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니까 공항이 아주 가까운 곳이다. 베네치아는 원래 섬인데 육지와 다리를 놓아서 버스와 차랑이 다니고 열차도 들어 가는데 베네치아 시내로는 차량이 일절 못다닌다. 베네치아섬에 숙소를 잡으러면 비싸기도 하거니와 시설도 낡아서 메스트레지역에 호텔을 예약했다. 베네치아에서 배를 탈 수 있는 이틀짜리 승선티켓을 미리 예약해 왔는데 선착장 매표소에서 예약확인서를 보여 주고 표를 받았다.
이 표는 48시간내 몇 번이고 회수제한 없이 배를 탈 수 있고 육지인 메스트레까지 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호텔은 메스트레 철도역에 인접해 있어서 우선 체크인을 하고 짐을 넣어 놓으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내판에 메스트레라고 쓰인 버스가 있어서 열차 역으로 가나 보다 하고 탔는데 역은 나오지 않고 동네를 빙빙 돌아 다니고 있어서 운전사에게 역으로 안 가냐고 물어 보니 이 버스는 역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렸다. 그런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을 붙잡고 역으로 가려면 몇 번을 타야 하느냐고 물어 봐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구글지도를 켜서 메스트레 역을 검색해보니 걸어서 15분이라고 나온다. 15분이면 좀 멀기는 하지만 내비 안내를 보면서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걸어서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쾌적해서 좋았다. 저녁 7시에 리알토다리 근처의 전망대룰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바로 호텔을 나서면서 데스크에 물어 보니 2번 버스만 호텔앞에 선다고 한다. 그걸 모르고 메스트레라고 쓰인 버스를 냉큼 집어 탔다가 혼이 났다. 데스크에에서 일러 준대로 2번 버스를 타니 베네치아 버스터미널에 내려 준다.
리알토다리까지는 약 30분이 걸리는데 수상버스를 타도 되지만 몇번 배를 타야 하는지도 잘 몰라서 그냥 걸어서 갔더니 예약한 7시에서 5분 정도 지났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방금 7시 예약자가 들어 갔는데 나도 들어가라고 해서 전망대에 올라 갔다. 전망대는 백화점 옥상인데 그런대로 베네치아 경치를 360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따라 구름이 끼어서 노을은 볼 수 없지만 대운하와 건물들 그리고 멀리 산마르코 성당과 종탑까지 볼 수 있었다. 이 전망대는 입장료는 없는데 한번에 50명씩 입장 시키고 15분후에는 나와야 한다. 그래도 이 전망대가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예약까지 하고 간 보람은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땅거미가 밀려드는 시간이라 가게에는 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대운하를 따라 버스터미널로 돌아 오면서 해저문 베네치아 풍경을 열심히 담아 보았는데 베네치아는 좌고우면 할 것 없이 셔터만 누르면 작품이 되는 것 같았다.
버스터미널로 돌아 오니 해는 완전히 지고 어두웠다. 호텔직원이 알려 준대로 2번 버스를 타니 호텔 정문 앞에 내릴 수 있는데 시간은 약 20분 정도 걸렸다.
저녁식사를 하려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길 건너편 메스트레역에 먹을만한 식당이 있나 해서 건너 가 보니 피자집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키오스크로 주문을 넣고 기다리면 순서가 온다는데 30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포기하고 길거리에 있는 피자집에서 피자 한판을 사서 호텔 방에서 먹었다. 피자 한판에 5유로, 맥주 한병 2유로로 저녁을 해결했는데 피자는 절반이 남아서 내일 아침에 먹기로 했다.
8월 29일(월)
6시 30분부터 제공되는 호텔의 아침 식사가 제법 먹을만 했다. 과일도 풍성하고 아침에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잔은 정신을 확 깨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다니자면 힘이 딸릴지도 모르니까 아침을 든든히 먹어 두었는데 이렇게 잘 차린 아침 식사가 9유로라면 꽤 괜찮아 보인다. 선영이가 이태리는 소매치기가 극성이라서 소지품을 잘 간수해야 한다고 귀가 아프도록 말을 해서 전대에 돈과 여권, 신용카드를 넣고 허리에 찼다. 카메라장비 때문에 출사용 카메라 배낭을 짊어 졌는데 신경이 많이 쓰인다. 고급카메라를 목에 걸고 큰 배낭을 진 내가 소매치기에게 표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제처럼 2번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일단은 대운하를 따라 걸어서 산마르코성당까지 가기로 했다.
베네치아에 있는 많은 운하는 118개 섬 사이를 이어주는 수로역할을 한다. 이 섬들 사이로 중심 수로인 그란데 운하가 2개의 넓은 만곡부 주위를 흘러 도시를 통과한다. 너비 37~69m이며 평균수심이 2.7m인 그란데 운하 주위에는 많은 대저택, 교회, 해상주유소 등이 있다. 19세기까지 안토니오 다 폰테가 설계한 리알토 다리가 그란데 운하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지만 나중에 다리가 3개 더 건설되었다.
400여 개에 달하는 베네치아 다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감옥과 팔라초 두칼레(도제의 궁전) 사이에 짧게 서 있는 '한탄의 다리'이다. 두칼레궁전에서 재판을 받은 죄수가 이 다리를 건너서 감옥에 들어 가면 나오지 못하기에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마르코성당 앞의 넓은 광장에는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으로 언제나 몹시 번잡하다. 이곳이 베네치아 여행의 핵심이라고 봐야 할 곳인데 산마르코성당과 두칼레궁전 그리고 종탑이 바로 이웃해 있다. 산마르코성당은 무료입장이나 돔까지 올라 가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두칼레궁전과 종탑도 예약을 해야 하는데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 왔더니 줄이 얼마나 긴지 기다리다가 시간 다 보낼 것 같아 포기하고 부라노와 무라노 섬으로 가는 수상버스를 탔다.
무라노 섬까지는 30분, 부라노 섬은 한시간이 걸리는데 먼저 부라노섬으로 가서 돌아 올 때 무라노에 둘리기로 했다. 이 섬에 가는 수상버스도 미리 구입한 티켓에 다 포함되기 때문에 별도 요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한시간 정도 달리니 알록달록 페인트칠을 한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라노는 모든 건물을 파스텔톤으로 페인팅을 하여 미치 동화의 나라에 온듯한 기분이다. 원래 이 섬에는 레이스가 유명한데 레이스 벅물관도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레이스는 베네치아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간다고 하는데 집집 마다 현관을 레이스로 장식하고 있는 걸로 봐서 레이스는 이들 생활속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시내에는 크고 작은 운하가 있고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건너 다니는데 물이 깨끗하고 작은 물고기들이 몰려 다니는 것도 보인다. 운하와 집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화보촬영하기에 딱 좋은 곳인데 우리나라에서 많은 연예인들도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한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부라노섬을 보니 베네치아에 와서 이곳을 못보고 가면 너무나 억울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베네치아로 돌아 가는 길에 무라노 섬에 들렸다. 무라노는 유리세공으로 유명한 섬이다. 베네치아에서 2km 떨어져 있는 무라노 섬은 5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진 지역으로 섬들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고풍스러우면서 알록달록 아름다운 가옥과 운하, 다리 등으로 베네치아에 버금갈 만큼 정취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13세기 이래 베네치아 유리 제조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베네치아에서 유리세공기술자를 이 섬으로 이주 시켰다고 하는데 유리세공기술이 다른데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 섬에 가면 공장에서 유리세공을 하는 과정을 견학 할 수 있고 거리의 가게에서는 여기서 생산된 아름다운 유리제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물이 담긴 유리컵을 가지고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 부라노와 무라노섬 투어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날씨까지 받쳐 주어서 사진도 너무 잘 나와 기분이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숙소로 돌아 오니 늦은 밤인데 식사를 하려고 주위를 돌아 다녀 봐야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아서 허름한 중국식당에 들어 갔다. 뷔페식으로 음식을 준비해 두어서 소고기 두어 조각, 생선 찜 한 마리, 닭다리 두 개를 담고 맥주 한병을 추가했다. 먹고 나서 계산서를 보니 36유로를 달란다. 내가 볼 땐 10유로도 안될 것 같은데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고 인상 한번 쓰고 나왔는데 중국놈들 정말 형편없다. 이상하게 숙소주변에는 중국식당이 많이 보이던데 아마 나 같은 여행객 바가지 씌워 먹고 사는 놈들인가 보다. 한국 여행객이 혹시라도 메스테레역 근처에 묵는 경우라면 절대 중국식당은 가지 말라고 인터넷에 올려 놓으려고 한다. 오늘 좋은 곳 여행했는데 기분을 중국놈 때문에 다 망쳐 버렸다.
8월 30일(화)
오늘은 10시 26분 열차를 타고 피렌체로 이동하는 날이다. 아침식사를 어제처럼 호텔에서 하고 짐을 다 챙겨서 7시에 체크아웃 하고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로 갔다. 이틀짜리 배표가 오늘 저녁까지 유효하기에 수상버스를 타고 산마르코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에는 아직도 못 가본 곳이 많은데 베네치아를 언제 또 다시 오겠는가.
수상버스는 급행이 있고 완행이 있는데 내가 탄 배는 완행이라 모든 선착장을 다 둘러서 간다. 하긴 바쁜 건 없으니까 천천히 가면서 사진만 열심히 찍으면 된다. 산마르코에서 철도역으로 돌아 오는 수상버스는 급행을 탔더니 상당히 시간이 절약되었다.
열차 출발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상점에서 점심용으로 샌드위치를 샀다. 철도의 종점인 산타루치아 역에는 열차가 들어오고 출발하는 플랫폼이 여러개 있는데 열차표를 잘 못 보고 영뚱한 플랫폼에서 기다렸다. 출발시간이 5분도 안 남았는데 열차가 들어오지 않아서 옆에 있던 사람에게 표를 보여 주고 물어 보니 피렌체 가는 플랫폼은 목적지가 나폴리로 되어 있는 건너편이라고 알려 준다. 허겁지겁 달려가서 출발직전에 겨우 열차를 탈 수 있었으니 큰 실수를 할뻔했다. 나이탓일까, 왜 이런 실수를 하는 건지 자신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혼자 여행하는 것이 좀 두렵기도 하다.
열차는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여 미끄러지듯 달린다. 열차가 무척 쾌적하고 승객도 그다지 많지 않다. 피렌체까지는 2시간이 걸리는데 차창가에 스쳐 가는 이태리 농촌풍경을 보는 것도 여행의 일부분이다.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SMN)역에는 정시에 도착하였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예약된 숙박시설을 찾아 가서 주인으로부터 열쇠를 받는 일인데 이미 메일로 여러차례 연락하여 1시경에 집근처에서 주인이 기다리기로 했다. 역에서 숙소까지는 헤매지만 않으면 15분 거리인데 초행길이라 찾아 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구글지도를 켜고 따라 가는데 좁은 골목이 많다가 보니까 정확치를 않아서 한참 헤매다가 겨우 주인을 만났다. Air B&B를 통하여 예약을 했는데 호텔처럼 간판이 있는 게 아니라 다세대 주택의 방 한칸 정도라고 보면 된다. 룸에 들어 가보니 침대 하나에 좁은 주방과 샤워시설이 고작인데 하룻밤 숙박비는 100유로(우리 돈으로 15만원)니까 웬만한 호텔 요금을 받는 셈이다. 그래도 위치 좋은 곳에는 방 구하기가 쉽지 않다. 숙소는 두오모성당을 걸어서 5분 정도에 갈 수 있는 위치인데 집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서 골목을 헤매기 일쑤였다.
우선 짐을 풀고 오후에 예약된 곳부터 보기로 했다. 오후 2시 30분에 우피치미술관을 예약했는데 한국가이드가 안내하는 팀에 끼였다. 3시간 정도 진행하는데 가이드비로 4만원을 냈다. 한국에서 온 젊은 사람들과 함께 모두 6명이 한 팀이 되었다. 입장권을 미리 사 왔는데 우피치외에 다섯 곳을 더 볼 수 있는 복합티켓을 샀기에 피렌체 마지막날 까지 사용하면 된다.
우피치 미술관은 시뇨리아광장에 인접해 있으며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두 개의 건물로 되어 있다. 입장 하기 전에 회랑의 조각들도 볼만 하다. 메디치가의 창업자 코시모1세와 그의 아들, 손자의 조각이 있고 우리도 잘 알 수 있는 유명한 철학자들과 미술가, 시인(단테)의 동상이 즐비하다. 미술관에 입장하면 그동안 말로만 듣던 유명한 그림들이 너무 많아서 눈길을 뗄 수가 없는데 이것 저것 다 볼려면 시간도 부족하거니와 나중에 머리에 남는 것이 없어서 가이드는 중요한 작품들만 중점적으로 소개했다.
주로 14세기~15세기의 르레상스시대 작품들인데 13세기까지를 신이 지배하던 시대라면 르레상스시대는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작품들이 하나 같이 인간미가 넘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엄숙하게만 그렸던 성모상도 어머니 느낌이 나는 인간적인 성모상으로 바뀌었다. 이 시대를 주름잡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드로 다빈치, 베로키오, 티치아노, 카라바조, 렘브란트, 치마부에, 두쵸, 조토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우피치 미술관의 건물은 조르조 바사리가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를 위하여 1560년도부터 짓기 시작하였다. 그의 치안 판사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우피치(uffizi)는 이탈리아어로 사무실을 뜻한다. 그 후 알폰소 파리지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가 이어서 건축하여 1581년도에 완성하였다. 안마당은 상당히 길고 좁으며 끝에 가서는 공간을 구획짓는 도리아식 기둥들을 지나 Arno 강으로 열려 있다. 건축 역사가들은 이것을 유럽 최초의 규칙적인 가로라고 한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바사리(Vasari)는 마주보는 정면의 연속적인 처마 돌림띠(cornice)와 층 사이의 끊어지지 않는 돌림띠 그리고 궁궐의 정면이 서 있는 연속적인 3개의 계단을 통해 원근법적 길이감을 강조하였다. 기둥사이의 벽의 벽감(niche)에는 16세기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조각으로 채워져 있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 이후 그들의 미술품 컬렉션은 마지막 메디치 가의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가 상의를 한 끝에 피렌체 시에 기부하였다. 우피치 미술관은 최초의 현대적 박물관 중 하나이며 1765년에는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개방되었고 1865년에 정식 박물관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한 곳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2016년에 2백만명이 방문했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은 미술관이 되었다. 성수기 (특히 7월)에는 대기 시간이 다섯 시간에 이른다. 입장권은 사전에 온라인으로도 구매 가능하며 상당한 대기 시간을 줄여 준다. 작품을 전시하는 데 사용하는 방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리기 위해 개조하고 있다.
우피치미술관을 나와서 단테의 생가를 찾았다.
단테 생가는 좁은 골목길에 있어서 찾아 가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세계 도처에서 찾아 오는 방문객으로 골목이 늘 번잡하다.
명실상부한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이자 14세기 르네상스의 문화사적 지평을 연 인물 단테. 필생의 역작 《신곡》으로 중세의 암흑을 단숨에 걷어냈던 작가 단테. 초라한 추방자의 모습으로 고난의 비아 트레첸토를 묵묵히 걸어갔던 피렌체의 망명자 단테. 그의 삶은 거친 유랑으로 점철되었고 그토록 사랑했던 피렌체는 끝내 그를 버리고 말았다. 단테의 뼈저린 시련과 한에 사무쳤던 유랑은 위대한 문학과 정신을 낳았으니 그 책이 바로 《신곡》이다.
피렌체에 남아 있는 단테의 흔적을 찾으려면 먼저 그의 전신 조각상이 말없이 서 있는 도심 동쪽의 산타 크로체 광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관람객을 응시하는 단테의 시선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조각상은 원래 산타 크로체 광장을 마주 보고 있는 성당 입구 정중앙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성당 오른쪽 입구를 지키고 있다. 피렌체의 유서 깊은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는 단테의 무덤도 있지만 사실 그 안은 비어 있다. 단테의 진짜 유해는 긴 유배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라벤나의 산 피에르 마조레 성당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테(Dante : 본명은 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는 1265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300년이 되던 해, 단테는 인생의 중간 전환점인 서른다섯 살에 상상의 지적 여행을 출발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고 이를 역으로 계산하여 1265년이 나온 것이다.
도심의 골목길을 따라 헤매다 보면 카사 단테 박물관이 불쑥 나타난다. 이 박물관은 피렌체에서 유일하게 단테의 생애와 작품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을 잘 맞추면 단테의 《신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는 연극배우의 무료 공연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아홉 살 소년 단테가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자주 만났던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은 단테의 집에서 불과 몇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단테는 ‘단테의 성당’으로 불리는 그 성당에서 어머니 몬나 테사와 함께 기도드리던 베아트리체를 몰래 훔쳐보곤 했다. 소년 단테는 소녀에게 끝내 말을 걸지 못하고 속만 태웠다. 정작 그 성당에서 단테와 결혼식을 올린 사람은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젬마 도나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에는 베아트리체와 젬마, 두 여인의 무덤이 모두 안치되어 있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존경받던 겔프 백당의 귀족 출신이었다.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그는 열두 살에 귀족 가문의 딸인 젬마 도나티와 조혼을 했다. 그러나 이미 단테에게는 아홉 살 때 만나 연모의 정을 품었던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가 있었다. 그 아리따운 소녀를 처음 본 것은 1274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포르티나리 가문에서 개최한 파티에서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단테는 그녀를 ‘진주의 빛깔을 가진 소녀’로 기억한다.
단테는 젬마와 결혼한 후에 우연히 아르노 강의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열여덟 살의 꽃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베아트리체를 만나 몇 마디 어색한 말을 주고받는다. 첫 번째 운명적 만남 이후 9년 만에 다시 만나 겨우 대화를 나눈 것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이성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에서 새로운 시대에 지식인이 몰두할 수 있는 지선(至善)의 궁극적 대상을 발견했고 이를 평생 동안 찬미하는 삶을 보낸다.
개인이 이성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하는 것은 중세에는 장려되지 않았던 인간의 사적 감정이었다. 단테에 의해서 아름다움에 매혹당하는 삶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베아트리체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정신적 몰두는 르네상스 미학의 상징적 원동력이 되었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단테가 르네상스 시대정신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단테의 이런 아름다움의 극단에 대한 지적 몰두 방식을 Dolce Stil Novo라고 불렀다. 굳이 번역하자면 ‘상큼하고 새로운 스타일’이다. 단테는 《신곡》의 〈연옥 편〉 제24곡에서 “나는 사랑 때문에 영감을 받았을 때 붓을 든다. 마음속에서 사랑이 내게 속삭여주는 대로 나는 글을 써간다”라고 돌체 스틸 노보를 설명했다.
개인의 감정이 통제되던 중세와는 달리 사랑에 빠진 ‘상큼한 삶’이 긍정되었으며 아름다운 사랑을 찬미하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태동한 것이다. 단테가 추구했던 돌체 스틸 노보는 이후 300년 동안 이탈리아와 피렌체 사람들을 탐미의 세계로 이끌었고 이 최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적 몰두를 통해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젬마와 결혼했던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만났던 아르노 강의 산타 트리니타 다리도 단테 추종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피렌체의 명소다. 이 다리가 유명해진 것은 영국 화가 Henry Holiday(1839~1927)가 1883년에 그린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나다〉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모습을 한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접근하며 어색하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청년기의 단테는 겔프 백당의 기사로서 피렌체를 위한 전쟁에 종군했고, 승리도 거두었다. 전사(戰士)의 삶을 살았던 단테의 적군은 인근 도시 아레초(Arezzo)의 기벨린당이었다. 단테는 피렌체를 사랑했고 피렌체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의 삶은 숙고하고 명상하는 삶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이었다. 단테는 동시대의 피렌체 시민들처럼, 자신의 자랑스러운 도시가 ‘치타(cittä : 도시)’의 완벽한 모범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피렌체의 공직자로서 자랑스러운 고향을 섬기고자 의사와 약사 길드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피렌체의 모든 귀족은 피렌체에서 공인하는 ‘중요한 길드’에 소속되어야만 정치나 행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의사나 약사로서 활동한 적은 없지만 의사와 약사 길드에 등록한 단테는 피렌체의 각종 공직 기록에 그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단테와 직접 관련된 유적은 아니지만 피렌체 사람들이 단테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는 피렌체 두오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각 도시의 주 성당을 두오모(Duomo)라고 부른다. ‘집’을 의미하는 라틴어 도무스(Domus)에서 유래한 단어로 ‘하느님의 집’이란 뜻이다. 피렌체 두오모 내부의 북쪽 벽면에는 도메니코 디 미첼리노(Domenico di Michelino, 1417~1491)가 1465년에 그린 〈단테와 신곡〉이 크게 전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피렌체 시민들이 단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미첼리노에게 주문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작품 속의 단테는 그의 명저 《신곡》을 펼쳐 들고 책에서 솟아나는 빛줄기를 15세기의 피렌체에 비춰주고 있다. 작품 왼쪽에는 연옥에서 지옥으로 가는 군상의 모습이 기괴하게 보인다. 결국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한 위대한 저자의 불행을 묘사하고자 단테는 성 밖에 서서 피렌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단테는 비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피렌체를 늘 그리워했다.
단테의 인상적인 조각상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은 베키오 광장에서 아르노 강으로 연결되는 우피치 미술관 1층 로지아다. 피렌체의 대공 코시모 1세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의뢰하여 건축한 우피치 미술관 로지아의 외벽 기둥에는 피렌체를 빛낸 천재들의 입상이 일렬로 서 있는데 그중에서 단테의 입상은 단연코 앞자리를 차지한다.
1290년 6월 9일, 단테가 추구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베아트리체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피렌체의 공직에 나서서 한창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상큼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추구를 통해 지인들을 확보해가던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의 죽음은 더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한편 피렌체 내부분란으로 축출된 단테는 긴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오랜 유배생활 중에 사면령도 내려졌지만 단테는 끝까지 피렌체로 귀환하기를 거부하다가 1321년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던 해에 낯선 도시 Ravenna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위대한 시인의 때늦은 귀환을 학수고대하던 피렌체 시민들은 르네상스 천재들의 무덤이 모셔져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단테를 위한 ‘빈 무덤’을 만들었고 관 위에는 단테를 기다리다 지친 천사가 장미꽃을 든채로 잠이 든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장 위대하신 시인을 찬양하라. 우리를 떠났던 그의 정신이 귀환하시도다(Onorate l’altissimo poeta, L’ombra sua torna, ch’era dipartite).”
돌아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돼지고기와 피자 그리고 맥주를 사왔다. 숙소에는 간단히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돼지고기를 굽고 피자와 함께 맥주를 한잔 했더니 그동안 소매치기 걱정에다 숙소찾아 다닌다고 고생했던 피로가 확 풀리는 듯 했다. 커피도 있어서 한잔 하려고 물을 끓이고 포트를 전열판에서 내려 놓았더니 싱크대 나무판에서 연기가 나서 얼른 집어 올렸는데 커피포트 밑바닥이 닿은 부분에 약긴 누른 표시가 났다. 이거 주인이 알면 변상하라 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피렌체 야경도 좋을텐데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술도 한잔 하고 나니 잠이 밀려 와서 일찍 자리에 들었다.
8월 31일(수)
오늘은 하루 종일 피렌체 투어를 하는 일정이다. 약간 덥기는 하지만 계속 날씨가 좋아서 날씨 덕은 보는 것 같다. 오전에 두오모성당과 조토종탑 그리고 세례당을 예약해 놓았기에 먼저 두오모 성당으로 갔다.
웅장하고 화려한 두오모성당의 외관에 비하여 성당 내부는 매우 단순하다. 두오모 돔은 올라 가는 계단이 좁아서 올라 가는 사람과 내려 오는 사람이 만나면 몸을 비켜 주어야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여 입구에서 제한된 인원만을 들여 보낸다. 계단이 몇 개인지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올라 가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호흡이 가쁘고 등줄기에 땀이 흘러 쉬어 가며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한번 오르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이 돔을 설계하고 만든 브루넬레스키는 수백, 수천번을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시계공이자 금속 세공사였다. 그러나 20대 젊은 나이에 참가한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공모전에서 떨어진 브루넬레스키는 경쟁자였던 로렌초 기베르티를 뒤로 하고 금속 세공에서 떠나게 된다. 이후 로마를 여행하며 악마의 집이라고 불리던 당시 세계 최대의 돔인 판테온을 보았고 여러 연구를 했지만 40세가 넘도록 건축과 금속 세공에 있어서는 별다른 업적이 없었다. 그러나 원근법의 수학적 법칙을 발견하였고 이 덕분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공사에 참여할 명성은 얻을 수 있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당시로써는 한 번도 실현되지 않은 대규모 돔을 건설하면서도 새로운 방법으로 건축하겠다고 해서 세간을 놀래켰다. 브루넬레스키 이전에는 아치나 돔을 쌓기 위해 그 아래에 나무로 된 틀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는 방법을 사용했다. 작은 다리의 아치를 세우는데도 지지틀이 필요한데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을 틀 없이 세우겠다는 브루넬레스키의 발상에 다들 황당해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 기울어지면 쓰러져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한 것 아닌가!
1420년 8월 7일 반 세기 넘게 손대지 못했던 돔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지점의 높이는 대성당 벽체 높이 42 m 위에 얹어진 팔각형의 드럼 높이 9 m를 더한 도합 51 m 위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완성되어 있던 드럼 위에 다시 13.6 m 높이까지 석재로 드럼을 연장했고 그 위의 경사진 돔 부터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벽돌과 mortar를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 드럼이 팔각형인 관계로 돔 역시 팔각형이 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수치가 기입된 설계도'를 도입하였으며 시공을 정확한 수치로 하려고 노력하였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까지는 석공집단이 감으로 공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실제로 이 성당의 드럼은 부정확한 치수로 건설되어 각 변의 길이가 달라 정팔각형도 아니었다. 드럼 평면의 각 꼭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중점들이 여럿 생기는데 중심도 안 맞는다는 소리다. 물론 나중에 공사에 참여한 브루넬레스키는 이것은 고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위에 돔을 건설해야 했다.
하중을 줄이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돔을 안쪽의 두꺼운 돔과 바깥쪽의 얇은 돔으로 이중 구조를 만들어 빈 공간만큼 무게를 경감시키고 안쪽 돔과 바깥쪽 돔을 격자 형태의 뼈대로 연결시켜 돔의 구조적 강도는 유지했다. 또한 팔각형 돔에 맞춰 8개 대리석 뼈대를 돔 외각에 추가로 건설해 돔이 하중 때문에 바깥으로 팽창하는 힘을 상쇄시키고 석재와 목재로 이루어진 고리들을 돔 사이 사이에 삽입하였다. 거기다가 돔의 모양을 반구형이 아니라 좀 더 급한 경사의 첨두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돔의 하중을 반구형에 비해 좀 더 아래로 집중되게 만들어 구조적으로 안정되었다.
석재보다 가볍고 원하는 형상으로 쌓기 좋아 벽돌을 주로 사용했는데 벽돌을 일종의 헤링본 방식으로 쌓았다. 벽돌을 지그재그 모양이 되도록 교대로 방향을 바꾸면서 벽돌이 맞물리게 배열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벽돌의 결합력이 강해졌고 미세하게 벽돌 벽의 아래가 위쪽보다 좁아져서 공중에서도 벽돌들이 아래로 추락하지 않게 되었다. 이 덕분에 공중에서 최소한의 목재 틀만 가지고 바로 벽돌을 쌓으면서 돔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고, 막대한 목재를 비계와 아치 틀로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비로소 공사를 실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벽돌 4백만 개를 사용해 만든 돔의 무게는 4만 톤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돔 아래에 목재 틀을 세우지 않는 대신 한쪽만 지지되고 한쪽 끝은 돌출된 일종의 기중기와 같은 구조물인 '카스텔로'를 돔의 안쪽 면에 세워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돔이 올라감과 동시에 조금씩 위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카스텔로를 사용해 무거운 건축자재를 높은 위치에 있는 작업대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지만, 유능한 공학자이기도 했던 브루넬레스키는 소 한 마리의 힘만으로 거대한 카스텔로가 작동하게끔 기계장치를 설계했다. 당시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기계장치가 고작 소 한 마리의 힘으로 움직이자 사람들은 브루넬레스키를 '새로운 다이달로스'라고 부르며 경탄했다.
1436년 3월 26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대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하고 나서 5개월 후인 같은해 8월 30일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돌을 놓으면서 돔이 완공되었다. 공사가 시작된지 16년 23일 만이었다.
돔이 완성된 후에도 돔의 꼭대기에 위치하게 될 내부의 조명과 환기를 위한 탑인 roof lantern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이 탑은 피렌체 대주교 안토니노 추기경이 1446년에 첫 번째 돌을 놓으면서 공사에 들어갔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행사에 참석한 뒤 병을 앓다가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탑의 시공은 결국 친구인 Michelozzo가 맡았다. 장례식은 그가 건설한 대성당의 돔 아래에서 치러졌으며 5월 15일 대성당 남쪽 측랑 지하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을 덮은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묘비명을 새겼다.
피렌체의 위대한 천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여기 잠들다
돔에 올라 가면 피렌체 시가지가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위대한 예술가의 걸작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 보인다.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 책임자였던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1302년에 사망하고 30여년간 공사가 중단된 뒤 1334년 유명 화가였던 조토 디 본도네가 그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 조토는 67세였다. 조토는 대성당의 종탑 (캄파닐레) 설계와 건설에 온 힘을 다했다. 이를 통해 탁월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13세기 초부터 건축 설계자들의 독보적 지위가 일반적인 공예가보다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 1334년 7월 19일 종탑의 초석이 깔리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조토의 설계안은 캄비오가 대성당에 적용한 폴리크롬 (polychrome, 다채색) 기법을 그대로 따라가 종탑이 '채색'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두오모성당 오른편에 우뚝 솟아 있는 조토종탑은 계단을 통하여 꼭대기까지 올아 갈 수 있다. 여긴 그래도 계단이 좀 넓어서 오르내리기가 편안했는데 종탑에는 비둘기들의 집 배설물 때문에 공간은 모두 철망을 씌워서 꼭대기에 올라 가도 사진을 찍으면 그물이 나와서 도저히 찍을 수가 없었다. 다만 조토 종탑에 올라가면 두오모 돔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6~7세기에 세운 산 조반니 세례당은 3개의 청동문과 그 안에 모자이크로 새긴 8각형 천정이 압권이다. 3개의 청동문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8각형의 독특한 형태로 두오모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성당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청동문 제작을 위해 공모를 했다는데 기베르티가 20세의 약관에도 불구하고 브루넬레스키와 아주 치열한 경쟁을 했다고 한다. 여러 청동문 중 가장 아름다운 문은 동쪽문이다. 광을 내는 바람에 청동문이 아니라 황금의 문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문을 본 미켈란젤로는 감탄하며 "천국의 문(Porta del Paradiso)"이라 불러서 그 후 이 문은 천국의 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천국의 문을 자세히 보고 싶으나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철망으로 막아 두었고 또 철문을 문 앞에 만들어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모두 다섯 칸 좌우 하나씩 10개의 주제로 청동 패널이 있는데 제일 위의 왼쪽부터 보면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이 보이고 오른쪽은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모습과 그런 카인을 질책하는 모습이다.
두 번째 패널의 제일 위, 왼쪽은 노아가 방주를 떠난 후에 감사드리는 노아 가족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천사가 아브라함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천사가 100살이나 먹은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가 임신할 것임을 알려주었고 이때 낳은 아이가 바로 이삭이다. 천사의 예언대로 사라는 두 명의 사내 아이를 낳았다.
세 번째 왼쪽의 에피소드는 에서와 야곱의 탄생이고 오른쪽은 요셉의 형제가 곡식 꾸러미 속에서 금잔을 발견한 모습이다. 네 번째 아래 왼쪽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 강을 건너는 모습이다. 제일 마지막 왼쪽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장면이고 오른쪽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선물을 바치는 장면이다. 오전에 이 세 군데를 보고 나니 탈진 할 것 같아서 얼른 숙소로 가서 좀 쉬었다가 나오기로 했다.
오후에도 일정이 빡빡하다.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베키오다리 그리고 미켈란젤로언덕까지 예정되어 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숙소에서 약 20분 걸어야 한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1873년부터 미켈란젤로의 원본 다비드상을 소장하고 있다. 야외에 있던 다비드상을 좀 더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아카데미아로 옮겼다고 한다. 전시 중인 다른 작품들로는 파올로 우첼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산드로 보티첼리 및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작품을 포함하여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의 피렌체 그림이 있으며 르네상스 시대부터 잠볼로냐의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의 원래 풀사이즈 석고 모델도 있다. 많은 피렌체 고딕 그림뿐만 아니라 갤러리에는 레오폴트가의 방계인 로렌 가문의 대공이 모은 러시아 아이콘 컬렉션이 있다.
아카데미아미술관에서 베키오 다리는 약 10분 거리에 있다. 우피치미술관을 지나면 바로 아르노강이 나오고 긴 회랑을 지나면 베키오다리에 이른다.
1345년에 건설된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아르노 강에는 다리가 9개 있는데 베키오 다리는 상류에서 두 번째 다리다. 원래 이 자리에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나무 다리가 있었는데 홍수로 휩쓸려가자 새로 건설한 것이다. 다리의 설계는 지오토의 제자인 타데오 가디가 맡았으며 아르노 강의 가장 좁은 곳에 세워졌다. 원래 이 다리 위의 상점에는 푸줏간 등이 많아서 늘 냄새가 고약했는데 가까운 곳에 궁전이 있었기 때문에 페르디난도 1세는 궁전 주변에 어울릴만한 보석상들을 이 다리의 상점에 들어서게 하면서 기존에 있던 상점들은 철거되었다.
다리 가운데에 있는 흉상은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금 세공인인 벤베누토 첼리니이다.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아르노 강의 풍경이 아름다운 데다가 세기의 연인인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난 곳이기 때문에 더욱 낭만적인 장소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다리와 주변에는 자물쇠가 많이 채워져 있다. 사랑의 징표인 자물쇠를 열쇠로 채우고 열쇠를 강에 던져 버리는 연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르노 강은 수심이 깊지는 않아 보이는데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러 보이고 바람이 없는 날이면 강변의 건물들이 수면에 반영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열성적인 후원에 힘입어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렇기에 피렌체에 오면 누구나 두오모에 오르고 우피치 미술관과 시뇨리아 광장을 방문하며 예술의 중심지에서 그 옛날 피렌체의 전성기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누구나 들르는 이 여행지들 외에 꼭 추천해 드리고 싶은 곳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피렌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이다. 베끼오 다리를 건너고, 아르노 강변을 걷다 오른쪽 골목으로 표지를 따라가다 보면 미켈란젤로 언덕을 오르는 계단과 만나게 된다.
언덕이라고 해야 그리 높지 않아서 지그재그로 된 산책로로 10여분 올라 가면 넓은 광장에 이르는데 광장 한가운데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모조품이 서 있는데 청동으로 만들었는지 푸른색을 뛴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피렌체는 참으로 아름답다.
특히 노을이 질 때는 더욱 아름답다고 하는데 노을까지 보려면 아직 두 시간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일찍 발길을 돌렸다. 피렌체에서도 버스를 타면 많이 걷지 않고 목적지에 갈 수 있는데 버스노선을 몰라서 매일 걸어 다녔다. 피렌체는 인구가 30만이나 여행객이 주민 숫자보다 더 많다고 하니 놀랍다.
숙소로 가려면 베키오다리를 건너야 하고 아르노강변을 따라 한참 가야하는데 베키오 다리 조금 못가서 큰 마켓이 있어서 여기서 과일, 맥주, 빵 그리고 티본 스테이크를 샀다. 숙소에서 티본 스테이크를 구웠더니 고기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피렌체에 가면 티본 스테이크를 반드시 먹어 보라고 하던데 정말 맛이 좋았다. 오늘 하루는 아마 2~3만보는 걸었을 것 같다.
9월 1일(목)
여행 중에 구월을 맞게 되었다. 오늘은 이태리 서부해안에 있는 친케테레 1일여행에 끼여 가는 날이다. 피렌체에서 출발하는 여행프로그램인데 한국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현지인이 하는 프로그램에 참가 하였다. 아침 7시 30분에 피렌체 역에서 만나서 버스로 이동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60명쯤 되어 보였다. 버스 두 대로 가나 했는데 대형 버스 한 대에 모두 탈 수 있었다. 친케테레는 깎아 지른듯한 해안 절벽 위에 집을 지어 사는 다섯 개의 작은 마을인데 예전에는 뱃길 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도로를 만들어서 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관광열차가 수시로 다니기 때문에 여행하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가 타고 간 버스는 관광열차 출발점인 라스페치아에서 열차로 갈아탔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보니까 험준한 산악지대에 대리석을 캐는 커다란 채석장이 있고 여기서 캔 대리석을 옮겨와 가공하는 석재공장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여기서 나오는 대리석의 질이 좋아서 피렌체의 건물들이 이 돌을 이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피렌체 두오모성당, 세례당, 조토 종탑에 사용된 붉은색, 검은색, 푸른색, 흰색 등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이 모두 이 지역에서 나오는 돌로 지은 것인가 보다.
친케테레 관광열차를 타고 첫 번째 마을인 리오마조레는 마지막에 보기로 하고 통과하여 두 번째 마을인 마나로라에 내렸다. 철도는 험준한 해안절벽을 지나기 때문에 대부분이 터널을 뚫어서 만들었는데 상당히 힘든 공사를 한 것 같다. 역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열차에 내려서 좀 걸어야 마을에 들어 갈 수 있다.
친케테레는 이탈리아 북부의 리구리아 주(州) 라스페치아(La Spezia) 지방에 속해 있는 다섯 개의 작은 마을이다.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 라스페치아 서쪽 해안 절벽에는 마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풍경이 이색적이고 아름답다. 마나롤라는 라스페치아에서 북쪽으로 두번째 마을이며 리오마조레(Riomaggiore)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친퀘테레 중에서 두 번째로 작은 마을이지만 마나롤라는 가장 오래된 마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독특한 해안풍경으로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지중해 해양문명에 속하며 북아프리카에서 침범해오는 해적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마나롤라의 집들은 절벽위에 상자를 쌓은 것처럼 촘촘하게 지어져 있으며 옅은 붉은색과 노란색 등 파스텔풍의 알록달록한 색들로 칠해져있어 동화마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어업과 포도주를 생산하는 일을 하고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유명하다. 산비탈의 바위를 깍아 계단식 밭을 만들어 다랭이밭 경작지를 만들어냈다. 마나롤라를 비롯하여 친퀘테레 마을 해변에는 여름 일광욕을 즐기려는 많은 여행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유명한 명소로는 마나롤라와 리오마조레를 연결하는 사랑의 샛길(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과 포도밭, 산길 등이 있고 14세기에 건설된 산 로렌초 성당이 있다.
라스페치아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있으며 마나롤라 역이 있다. 370번 도로를 따라 마을로 연결되며 마을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해안에는 정기 여객선이 정박한다. 이탈리아의 화가인 안토니오 디스코볼로(Antonio Discovolo)가 살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시 관광열차를 타고 다음 마을인 코르닐리아로 향했다.
코르닐리아는 이탈리아 리구리아주 라스페치아지구에 있는 소규모 기초자치단체이다. 이탈리아 동부 제노바에서 피사로 가는 리구리아 해안에 펼쳐진 친퀘테레 다섯 개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친퀘테레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5개의 아름다운 마을을 말한다. 코르닐리아는 100m 높이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1시에 만나서 다음 마을로 가기로 했는데 약속시간이 되어도 일행이 나타나지 않고 가이드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낙오되면 다음 마을이야 열차를 타고 가면 되겠지만 피렌체로 돌아가는 버스편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당황해서 일행을 찾고 있는데 여자 가이드가 저만치서 오고 있길래 살았구나 싶었다.
이 마을은 역과 거리가 멀고 가파른 언덕이라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로 들어 갔다 가 돌아 올 때는 수백개의 계단길로 내려 오는데 내려 오다 보니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이 계단을 걸어서 올라 가는 사람들도 더러 보이는데 모두 힘들어 한다.
다음 마을은 베르나차
인구는 약 1,000명정도이며 친퀘테레 중 북쪽으로 향하는 네번째 마을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가 없고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지역에서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마을 중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1080년에 베르나차는 해적의 침략을 막기위해 해군부대가 출발거점으로 삼았던 마을이다. 이후에도 항구, 함대, 군인들이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다.
17세기에는 친퀘테레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불경기를 겪어 포도주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19세기에 다시 활기를 되찾아 상업적으로 크게 발전했고 인구도 많이 증가했다. 후에는 베르나차의 주민들이 다른 마을로 일을 하기 위해 떠나면서 농업산업이 많이 감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농업, 와인, 올리브오일 생산이 계속되고 있고 베르나차의 주요 수입은 관광산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이 곳에는 친퀘테레 국립공원과 마을의 중심지인 마르코니(Marconi)광장에 있는
산타 마가리타 단티오키아 교회(Church of Santa Margherita d'Antiochia),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도리아 성(Doria Castle)등이 있다. 이 마을에는 작지만 아늑한 해수욕장이 있어서 해수욕도 하라고 시간을 충분히 주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서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녔다.
다음은 첸케테레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몬테로소
인구는 약 1500명이 거주한다. 지중해에 면한 가파른 절벽해안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은 도보용 터널을 기준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마을을 외부와 연결하는 주된 수단은 1870년에 건설된 철도다. 철도는 남쪽의 라스페치아와 연결되며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철로는 다른 마을로도 연결된다.
마을의 구시가지에는 제노바 공국 시대의 성의 일부가 남아 있고 세례자 요한(St. John the Baptist) 교회는 회중석과 두 개의 복도로 이루어진 바실리카(Basilica) 풍으로 외벽과 정문에는 프레스코(Fresco) 기법으로 그려진 ‘세례의 예수’의 초상화가 있으며 4개의 작은 대리석 기둥과 네모난 모양에 꼭대기는 왕관 모습을 한 오로라(Aurora) 탑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북아프리카 무어인의 침입과 북유럽 바이킹의 외침도 빈번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Mussolini)에 저항하여 레지스탕스(resistance) 활동의 거점으로 역할을 하였다.
해안에는 작은 조약돌 해변으로 관광객과 지역 주민 모두 선호하는 곳으로 여름 휴가철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고 한다. 친퀘테레에서 유일하게 넓은 해변을 가진 마을이다. 몬테로소 마을에서 생산하는 특산물은 화이트와인과 올리브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레몬을 재배한다.
이제 친케테레 첫 번째 마을인 리오마조레로 가는데 배를 타고 지금까지 지나 온 4개 마을과 해안절벽을 감상하면서 이동한다.
리오마조레는 대서양에 면해있는 가파른 절벽 해안가 협곡에 위치하고 있다. 라스페치아에서 서쪽 대서양 절벽 협곡을 따라 북쪽으로 작은 어촌 마을들이 이어져 있는데 이들 어촌 마을 중 유명한 곳 다섯곳의 마을을 친퀘테레(Cineque Terre)라고 부른다. 리오마조레는 이들 다섯개의 마을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첫 번째 마을이다.
13세기 초부터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전해지며 오래된 고성유적이 남아있다. 협곡의 비탈을 개간하여 포도를 재배하고 건조한 해풍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 유명하다. 집들은 해안가 절벽 바위 위에 지어져 있고 연한 붉은색과 노란색, 분홍색 등 파스텔풍의 색채로 칠해져 있어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라스페치아에서 철로가 연결되며 라오마조레 역(train station)이 있다. 해안선을 따라 절벽에는 비탈진 길이 나 있는데 '사랑의 샛길'이라고 불리는 '델 아모레(dell'Amore)'는 친퀘테레 중 리오마조레와 마나롤라(Manarola)를 연결하고 있다. 해안에는 방파제가 있고 관광유람선이 정박하며 370번 도로가 산길을 따라 정기 버스가 라스페치아로 연결된다.
마을의 중심지인 콜롬보(Colombo) 거리에는 많은 음식점, 술집, 기념품 상점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하지만 거리가 좁은 골목길이기 때문에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하고 마을 입구에 작은 주차장이 있지만 성수기에는 주차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절벽을 내려가면 자갈밭 해변이 있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이자 마키아이올리파에 속해있었던 텔레마코 시뇨리니(Telemaco Signorini)가 리오마조레에서 예술적인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하여 친켄테레 다섯마을을 다 둘러 보았는데 아쉬운 점이 있다. 이곳을 오기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친케테레의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보아 왔었는데 그런 작품사진을 기대하고 왔건만 실제로 와서 보니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아서 속은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번 일일투어처럼 와서는 작품 사진을 담을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 보는 그런 사진은 모두 해질 무렵이나 야경 또는 아침 여명 시간에 찍은 것이다. 밤바다와 불 켜진 절벽 위의 건물들!!! 그래서 혹시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이곳 마을에 며칠 묵으면서 노을과 야경, 여명 시간대에 촬영을 해야겠는데 나에게 남은 생애에 그럴 기회가 또 있을까...
라스페치아 관광열차 출발역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피렌체로 되돌아 갔다. 피렌체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되어 간다. 오늘 하루도 실속없이 따라 다닌 긴 여정이었다.
9월 2일(목)
오늘 저녁6시 30분 비행기로 영국으로 돌아 가야 한다. 아침 식사를 일찍하고 맨 먼저 보블리 정원을 다녀 왔다. 브볼리 정원은 아르노 강 남쪽에 있는데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좀 일찍 도착해서 9시에 문을 열 때까지 입구에서 30분 정도 기다렸다.
보볼리 가든(Boboli Garden)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 속한다. 메디치 가문이 피티 궁전을 매수한 다음 1549년 트리볼로(Tribolo)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르네상스식 정원으로 숲, 가로수길 사이로 조각상들이 잘 어우러져 있으며 정원에서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와 유명해진 피렌체 두오모의 모습이 보인다.
이 정원은 전형적인 유럽식 정원이라는데 좌우대칭에 연못이 있고 산책로가 뻗어 있는 것이 베르사이유궁전 정원 같기도 하고 쉔브론궁전 정원 같기도 하다. 넓은 정원에 입장객이 나 혼자 뿐이라 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언덕위로 올라 가니 피렌체 시가지도 내려다 보이고 좀 있다 갈 피티궁전도 보블리 정원 바로 앞에 있다.
11시까지는 룸을 비워 달라고 해서 보볼리정원 구경을 마치고 바로 숙소로 돌아 와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 방 청소하는 사람이 벌써 왔다. 얼른 짐을 챙겨서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피티궁전미술관으로 갔다. 짐을 몽땅 배낭에 넣었더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피티궁전은 1448년 은행가 루카 피티(Luca Pitti)가 위세등등한 라이벌 가문인 메디치가(家)를 누르려고 짓기 시작하였으나 건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사후 메디치가가 매입하였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했다고 추정된다. 원래는 현재의 규모보다 작게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소유권이 메디치가로 이전된 후 1549년에 확장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장되고 개조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피렌체가 이탈리아의 수도였을 시절에는 로레인(Lorraine) 왕조와 사보이아(Savoia) 왕조의 저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피티 궁전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과 갤러리가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팔레티나(Palatine) 갤러리는 대공의 개인적 수집품부터 15~17세기 티치아노(Titian), 라파엘(Raphael), 루벤(Ruben) 등 유명한 화가들의 걸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대 미술 갤러리(Gallery of Modern Art), 은 박물관(Silver Museum), 의상 갤러리(Costume Gallery), 마차 박물관(Carriage Museum), 자기 박물관(Porcelain Museum) 등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다.
피티궁전 앞 광장에서 준비해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한참을 쉬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돌아 다니기도 너무 힘들었다. 피렌체 공항까지 가는 전철이 피렌체 역앞에서 출발하며 공항까지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오후 3시쯤 공항 가는 전철을 타기로 하고 그 때까지 두오모 성당 근처에서 사람 구경이나 하고 놀았다.
두오모성당 근처에는 하루 종일 관광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관광객을 태운 마차도 자주 다닌다. 이젠 영국으로 돌아 갈 시간이다. 이곳을 처음 왔던 것이 1980년이니까 42년 전인데 내가 이 만큼 늙었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그 땐 잘 모르고 와서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냥 껍데기만 보고 갔고 이번에는 미리 공부를 많이 하고 와서 좀 더 내실있게 보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런던 게트웍 공항에 내리니 비가 온다. 영국은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나무가 밀라 비틀어졌는데 단비가 내린다. 선영이가 마중을 나와서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가까웠다. 5박6일의 이태리여정이 아무 탈없이 마무리 되었다. 한가지 찜찜한 일은 피렌체 숙소에서 커피포트 자욱이 난 싱크대에 대하여 체크 아웃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Air B&B에서 메일이 날아 왔다. 216유로(우리돈으로 30만원 정도)를 변상하란다. 일단 변상할 각오는 했지만 너무 많이 청구하는 것 같아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만들어 간 직불카드를 체크인 할 때 집주인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 카드는 더 이상 사용할 일이 없기에 영국에 돌아 오자 마자 바로 말소시켰다. 그러면 인출이 불가능하게 된다. 아니면 Air B&B에서 나에게 소송을 하던지 맘대로 하라고 내 버려 두었더니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연락은 없다. 그동안 이런 일은 한번도 없었는데 다음에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9월 3일(토)
오늘은 집에서 쉬면서 사진정리나 하려고 한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3T짜리 외장하드를 하나 구입해서 지난 6월 제주 여행 때부터 써 왔고 이태리여행 중에 매일 촬영한 사진을 모두 외장하드에 옮겨 저장했는데 이상하게도 노트북이 외장하드를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하드가 고장이라도 나서 영영 읽을 수 없다면 그 많은 여행사진을 다 날리게 되는데 큰일이다. 엠텍이라고 하는 회사 제품을 가격이 저렴해서 샀는데 이게 말썽을 피운다. 여러번 시도를 하다 보니 가끔 인식이 될 때도 있어서 급히 USB로 옮기고 USB가 가득 차서 마이크로 SD로 옮기기는 했는데 에러가 났는지 마이크로 SD도 포맷하라고 나오니 참 답답하다.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사진일 경우 메모리는 신뢰도가 높은 제품을 써야 하겠다. 다음에는 가격이 좀 비싸더래도 삼성전자에서 나온 SSD를 써야겠다. 좀 쉬려고 했는데 메모리와 씨름하다가 하루 해가 다 갔다.
9월 4일(일)
일요일인데 성당이 멀어서 가진 못하고 애들이 교회 갔다 온 후 오후에 Bushy Park에 사슴이 많다고 해서 가 보았다. Bushy Park는 킹스타운 지역의 햄튼코트팰리스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데 상당히 넓은 공원이다. 주차를 하고 보니 아주 가까운 곳에 사슴들이 풀을 뜯고 있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나무 그늘에는 수십마리의 사슴이 모여서 쉬고 있고 부지런한 녀석들은 이리 저리 다니며 풀을 뜯는 모습이 평화롭다. 동물원 우리안에서만 보던 사슴을 공원에서 방목한 상태에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사슴을 따라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호수에는 오리, 고니, 물닭 그리고 개리가 떼를 지어 놀고 있고 풀밭으로 올라온 게리를 따라 다니며 사진 찍는 것도 재미있었다.
9월 5일(월)
이십 여일이 금세 지나가고 내일이 귀국 날이다.
오늘은 지환이 학교에서 축구대회가 있다고 해서 가 보았다. 지홍이는 이 학교를 졸업했고 9월부터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는데 학교에서 아는 선생님이 보이면 달려 가서 인사를 하고 얼굴 아는 친구들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지홍이 성격이 참 좋아 보였다. 축구 좋아 하는 지환이는 팀에서 골키퍼를 했다. 경기가 모두 끝나고 종합시상식을 하는데 애석하게도 지환이 팀은 상을 받지 못했다.
귀국전에 한군데라도 더 보여 주려고 선영이는 이곳 저곳을 소개해서 영국이 자랑하는 화가 와츠미술관으로 갔다. 와츠미술관은 한적한 시골 숲속에 있는데 찾아 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올 사람은 다 오는 곳이라고 한다. 와츠미술관은 그가 살던 집과 작업실, 조각작업장, 교회와 가족묘지가 다 모여 있었다. 미술관 관람도 중요하지만 카페에서 파는 빵과 커피맛이 좋아서 일부러 찾아 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와츠의 작품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난다. 대표적인 작품이 희망이란 작품인데 지구로 보이는 둥근 돌에 여인이 걸터 앉아서 눈을 가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줄이 다 끊어지고 딱 한가닥만 남은 악기에 귀를 기울이고 연주하는 모습은 절망이자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는데 만델라, 오바마도 연설에 이 작품을 인용해서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묘지 가운데 있는 와츠교회는 그의 부인이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 했다는데 건물의 외관도 특이하고 실내장식도 아주 특이하다. 도자기로 구워서 만든 의자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가족묘에 뭍힌 와츠는 평생을 예술과 함께 행복하게 살다 간 인물이 아닐까 싶다.
오후에는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Newark Priory라는 허물어진 수도원을 촬영하러 갔다.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넓은 목장 한가운데 옛 수도원 건물이 보인다. 그런데 목장은 작은 강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건너 갈 수도 없는데 사유지라 철조망까지 쳐서 도저히 접근 방법이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보니 철조망이 약간 벌어진 곳이 있었다.
사진가들이 들락거린 흔적인 듯 했다. 나도 조심스럽게 철조망을 헤집고 들어 갔는데 목장은 온통 개리와 가축들의 배설물이라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녀야 했다. 목장을 가로질러 수도원 건물까지 접근했는데 지붕은 다 날아 갔고 벽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1189~1199년 사이에 세워진 수도원인데 헨리8세가 성공회를 만들고 캐톨릭과 결별하면서 1538년 수도원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 후로 근처 주민들이 건물을 뜯어 가면서 폐허가 되었는데 근래 영국정부에서 1등급 문화재로 등재하였다고 하니 곧 복원을 하고 잘 관리하지 않을까 싶다. 주변에는 옛 물레방앗간도 있다. 해가 서서히 지는 시간이라 사진이 참 좋게 나온다. 수도원 건물을 빙빙 돌아가며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나왔다.
9월 6일(화)
귀국편은 저녁 7시 30분이라 오전에 Richmond Park으로 갔다. 공원에 가기 전에 테임즈 강변을 산책을 했는데 여기도 개리와 고니가 많고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왕립 Richmond Park는 엄청나게 넓어서 공원 내에서도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정도다. 공원내 가장 높은 언덕을 헨리8세 마운드라고 하는데 여기에 올라가니 멀리 히드로 공항 관제탑도 모이고 런던도 보인다.
주차장에 내려서 들어가니 넓은 잔디밭에 하얀 건물이 보이는데 팸부르크 롯지로 빅토리아시대 총리를 두 번 지낸 존 러셀과그의 손자이자 유명한 철학자인 버트런트 레셀이 살았던 집으로 지금은 결혼식장 겸 카페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오늘도 예식이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 참 아름다운 카페다. 이 공원에도 사슴이 많다는데 숲속에서 쉬고 있는 사슴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으려 다가가니 도망을 친다.
집으로 돌아와서 짐을 챙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히드로 공항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방학이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혼자서 애 둘데리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선영이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너무 절약해서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내년에는 정리하고 귀국하겠다고 하니 남은 시간 아무 탈없이 지내다가 돌아 오길 빌어 본다.
저녁 7시 30분 출발 예정이던 대항항공 비행기는 탑승수속이 끝나고도 움직이질 않는다. 공항이 매우 혼잡하여 대기중이라는데 한시간이나 기다려서 이륙했다. 인천공항에는 다음 날인 9월 7일 오후 4시 30분에 도착해서 셔틀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퇴근시간과 맞물려 어찌나 길이 막히는지 한 시간이면 갈 거리를 집까지 가는데 2시간 반이나 걸렸다.
먼길을 무사히 다녀 올 수 있도록 발걸음마다 인도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