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론(緣起論)적 상상력
이언 김동수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기상(奇想)과 역설(逆說)의 배경에는 불교의 연기론적 사고가 그 기저에 깔려 있다.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내려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 스며들어 꽃이 되고, 또 거기에서 열매를 맺었다가 낙과되어 흙이 되는 끊임없는 변신(變身), 그러나 동일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그리 놀라운 변신이나 기상(奇想)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다른 모습들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름이 곧 과일’ 이 되고, ‘실패가 곧 성공’이라는 역설적 은유가 탄생된 것이다. 이는 분명 기상(奇想)이요 또 역설(逆說)이며 ‘낯설게 하기’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일련의 순환적 사고 과정과 추론들을 근거로 탄생된 현대시에서의 시적 변용은, 결국 순차적인 연기론적 인과(因果) 과정에서 중간 과정을 건너뛴 압축 구조라 하겠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을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전문
사람들은 누구나 ‘복종’을 싫어하고 ‘자유’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그러한 통념을 뒤엎고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또한 역설이다. 시적 자아가 일상적인 사고 체계를 갖는 '남들'과는 다른 사고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복종이야말로 '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현 하는 것이며, 참자유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인식한다. 이는 있음(有)이 곧 없음(無)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라는 유생어무(有生於無)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는 불교의 역설적 가르침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전문, '문장',1940. 1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 현실을 ‘매운 계절’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 쫓겨 서릿발 칼날진 북방 고원으로 밀려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절망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망국민으로서의 인식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조국 독립의 꿈을 꾼다. ‘강철 같은 무지개’, 그것은 차갑고 완강한 식민지 현실임과 동시에 그런 속에서도 기필코 광복의 무지개를 맞이해야만 하는 것이 그의 생존 이유요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겨울이란 시련은 그에게 있어 오히려 강철처럼 단단한 이상을 꿈꾸게 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어 ‘겨울은 무지개’라는 비장하면서도 단호한 은유가 탄생하게된 것이다. 강철처럼 차가운 겨울이지만 그 겨울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것이 머지않아 봄의 씨앗, 곧 무지개가 됨을 알기에 ‘겨울은 곧 무지개’라는 역설적 은유가 탄생되어 우리의 무딘 감성을 일깨우고 있다.
역설에는 이처럼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고무(鼓舞) 시켜주는 생명의 미학이 있다. 맺힌 데를 풀어주고, 불목(不睦)의 이질(異質)을 화평의 세계로 고양시켜주는 이러한 생성적 사유방식이야말로 시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요 힘이다.
졸시 「어둠의 逆說」도 1980 년대 말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 감당키 어려운 절망과 실의의 허방에서 몇 날 며칠이고 잠 못 이루다 어느 날 문득,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라고 만해가 외치듯, 나 또한 ‘어둠은 결코 어둠이 아니다.’ 라는 싯구를 탄생시키면서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있었다.
어둠은 출발이다
깊은 나락에서
즈믄 밤을 뒤척이다가도
끝내 홀로 일어서야 하는
침묵
그것은 안으로 안으로 덮쳐오는
어둠을 살라 먹고
산처럼 다가오는
아픔을 살라 먹고
때가 되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빛살의 물결
어둠은 결코 어둠이 아니다
길고 긴 인고의 세월 끝에
쌓이고 모인
말씀과 말씀들이
이렇게 두 손 털고 일어서는
생명의 숲이다
찬란한 탄생의 눈부심이다
-김동수「어둠의 역설」전문, 1987
‘어둠’은 긴 긴 ‘밤’이었고 ‘침묵’이었다. 그러나 화자는 그 어둠에 묻혀 주저앉은 ‘밤’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살라 먹고’ ‘일어서는 밤이었다. 그것도,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홀로’ 일어서야 하는 ‘밤’이다. 그러다가도 ‘때가 되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빛살의 물결’이라는 인식, 그러기에 그의 ‘어둠’은 결코 ‘어둠’이 아니라 ‘찬란한 탄생’이 잉태된 ‘생명의 숲’이라는 역설을 낳게 된다.
‘어둠’이라는 객관적 사실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시인의 주관적 자세에 의해 상황을 역전시킨, 그리하여 패배를 오히려 승리의 출발점으로 전환시킨 ‘어둠은 출발이다’라는 선언적 아포리즘(aphorism). 그것은, 유(有)와 무(無)가 결국엔 하나로 이어져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사상과 공즉색(空卽色)이라고 하는 연기론적 상상력에서 얻은 값진 성과가 아닌가 한다.
첫댓글 하하하하하! <인연(因緣)에 따라 형상을 달리하고 있을 뿐,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본질(identity)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그럴까요? 이는 전생의 쌓은 공덕의 차이가 아닐까요?
우리가 말하는 업보란 전생에 쌓은 공덕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하하하하!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피력해 본다고 했는데, 그 구절과 본문의 주제는 좀 거리가 있어, 지적하신대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단을 삭제하고 '연기'와 '역설'의 관계만을 중점으로 제 나름의 시론(試論)을 한 번 펼쳐 보았습니다.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하하하하! 아이구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이언 교수님의 견해에 어찌 제가 토를 달겠습니디까?
다만 제 느낌을 말씀드린 것 뿐이니 마음에 두지 마시지요! 하하하하하!
허허허! 무는 유를 낳고 유는 또 무로 돌아가 결국 유 무가 돌고 도는 윤회지요.
사고도 마찮가지 입니다. 뒤에 숨어있는 순환적 의미를 간파하기 전에는 낯선 언어들로 이루어진 글자들,
'낯설게 하기'는 현대시의 시적 형상화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라 여깁니다. 졸문 살펴보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