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폭염 속에 그나마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해 볼만한 영화 한 편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볼만한 영화가 없었다. 올해는 왜 그리 볼만한 영화가 없던지! 한해동안 본 영화 중 괜찮았던 작품은 <아버지의 깃발>외에는 생각이 안 난다. 여기저기서 평을 살펴보고 겨우 찾아낸 영화가 데이비드 핀쳐의 [조디악]이다. 전문가의 평이 극과 극을 달리고 있어 어떤 영화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관객이 보면 골치가 아프고 영화 예술적인 작품성은 제법 높은 영화일 것이다. 그것도 포항에서까지도 스케쥴이 없어, 둘째딸이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온다길래 대구로 가서 다 같이 만나, 대구의 중심가인 동성로에 있는 한일극장에서 영화 [조디악]을 보았다. 나는 영화를 잘 골랐다. 이 영화는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였다.
[조디악]은 실화에 바탕을 둔 스릴러로 1969년에서 70년초까지 미국 캘리포오니아주 일대에서 수 십명을 살해한 것으로 판단되는 연쇄살인마 조디악 킬러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영화의 전개는 일전에 봤던 방화 [살인의 추억]과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다른 점은 [살인의 추억]이 감성적이라면 [조디악]은 이성적인 편이었고 또 전자는 송강호의 비중이 큰데 비하여 후자는 주연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으며 모든 연기자들의 호흡과 앙상블이 잘 맞아 들어가는 수작이었다.
1969년 8월 1일 자신을 조디악이라고 소개한 이 연쇄살인범은 샌프란시스코 언론사로 첫 편지를 보낸 이날 이후 1978년 4월 25일 마지막 편지를 보낼 때까지 10여년동안 언론과 경찰을 약올리며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조디악은 자신이 13명을 죽였다고 했지만, 경찰의 공식 발표는 7명이 습격당해 5명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외에도 24명의 희생자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조디악은 화성의 연쇄살인범과 같이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저명한 신문사인 [샌프란시코 크로니클]의 삽화가로 일하면서 조디악을 알게된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는 자신이 추적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디악]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이 영화의 원작이다. 1969년 8월 1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사로 배달된 한 통의 편지 속에는, 최근 1년동안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며 그 증거로 경찰들만 알고 있을 상세한 범행현장 모습을 공개하면서, 그리스어, 모스부호, 날씨기호, 알파벳, 해군 수신호, 점성술 기호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이상한 기호조합을 신문 1면에 싣지 않으면 주말 동안 닥치는대로 12명을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다른 신문사들도 조디악의 편지를 받았고 이 이야기는 드디어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1969년 9월과 10월에도 연속해서 조디악 킬러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9월에는 관광지 나파의 호수가에서 산책하던 남녀가 조디악 킬러의 칼에 무차별로 찔려 여자는 죽고 남자는 가까스로 살아난다. 10월에는 택시기사가 총에 맞아 사망한다. 조디악 킬러는 사망한 택시기사의 피묻은 셔츠 조각을 첨부한 협박 편지를 언론사로 보내고, 스쿨버스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리는 학생들을 죽이겠다고 다음 살인을 예고한다. 샌프란시스코는 혼란에 빠지는데 사건을 추적하는 크로니클 신문사의 사건 기자 폴 에이브리(로버드 다우니 주니어 분)와 경찰청 강력계 형사 데이빗 토스키(마크 러팔로 분)는 수사를 진행하면서, 좀처럼 단서가 잡히지 않는 조디악킬러 사건에 점점 몰입하게 된다.
[세븐]과 [파이트클럽]으로 실력을 발휘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조디악]은 2시간 38분이라는 긴 시간 속에 당시의 복잡한 사건을 전혀 사적인 감정의 이입이 없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철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영화는 사건을 추적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심리 묘사는 대단히 탁월하다. 신문기자 폴 에이브리는 마약 중독에 빠져 폐인이 된 후 결국 신문사를 떠나고, 강력계 형사 데이빗 토스키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작극으로 조디악 킬러의 편지를 썼다는 누명을 쓰고 서서히 망가져 간다. 삽화가였던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는 조디악 추적에 몰두하는 바람에 가정 파탄에 시달리게 된다.
[조디악]은 스릴러물이면서 높은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사건을 추적하는 사람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광기를 들여다보는 면에서 탁월하다. 비교적 비쥬얼리스트로 알려져있던 데이비드 핀처는 이 작품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앞으로 이 사람의 영화가 이렇다면 나는 계속 보러 올 것이다. 과거의 작품들(세븐, 파이트클럽, 에이리언3 등)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예전의 감수성 예민한 시적 상징과 행간의 여백이 풍부한 비유는 거의 사라지고, 이성적이고 객관적 시각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간다.
조디악이 신문사에 보낸 암호는 FBI와 CIA, 그리고 국가안전보장국의 암호해독 전문가들이 풀려고 했지만 풀지 못했다. 어느 고등학교 교사는 고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웃에서 퍼즐 풀던 추억을 끄집어내 사흘만에 암호를 해독했다. 그의 암호 해독에 의하면 조디악이 보낸 그 기호에는 "나는 조디악 킬러다. 나는 살인하는 것이 즐겁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숲의 야생 짐슴을 사냥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사람을 죽일 때의 그 짜릿함은 섹스할 때보다 더 황홀하고 내게는 제일 스릴 넘치는 일이다. 나는 낙원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 곳에서 내가 죽인 자들을 노예로 부리고 살 것이다. 당신들에게 내 이름은 알려주지 않겠다. 내 이름을 알려주면 내가 노예를 수집하는 일을 막으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사건발생 22년 후인 1991년, 조디악의 습격에서 살아난 첫 번째 생존자인 마고와의 인터뷰에서 마고는 용의자들의 사진 중 아더 리 앨런을 지목했다. 그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모든 정황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이미 경찰은 그를 한 차례 수사한 후 용의자에서 제외한 후였다. 경찰은 조디악 검거의 보상이 대단할 것으로 알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각자 자신들이 수사한 일급 내용들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는 흩어진 그 정보들을 조합해서 조디악을 추적한다. 그에 의하면 아더 리 앨런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더 리 앨런은 당국에서 기소를 위한 회의를 소집하기 전날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제 사건은 영구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작품에 나오는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는 탁월하다. 조디악을 추적하는 두 형사(마크 러팔로, 앤소니 에드워즈)와 유력한 용의자 아더 리 앨런, 로버트의 아내, 기자 폴, 영화 전체에 나오는 연기자들의 앙상블은 눈부시다. 그것은 화려함과 능숙함이 아니라 사실적임이다. 그들은 실제의 사건 속에 휘말린 사람들처럼 긴장된 자세로 화면에 등장하고 있다.
첫댓글 정말 괜찮은 영화였죠..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고, 유력한 용의자는 심장마비로 사망.. 슈퍼히어로 경찰같은 건 어디에도 없고,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사실적이었죠...정말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자꾸 생각키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