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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회 영성포럼 이기영 목사님의 <아가 2장 강해> 독후감
발표자 : 곽은서
일시 : 2023년 3월 15일 (수)
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 2:1~17)
아가서 1장은 나를 위한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게 주어진 그 누림이 얼마나 큰지 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서 병이 들었습니다. 또 주님께서도 그가 그 누림 안에 있을 필요성이 있으니 깨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신령한 세계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이 삶에 있어서, 주님께 헌신되는 영광의 여정에 있어서 첫 번째 관문은 누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분히 누리지 못하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기쁘지 못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참된 평안이 없으면 다음 단계로 제대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가서 1장은 영적 여정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곧 나를 위한 예수님을 충분히 누리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가서 1장을 이해하고 알 뿐 아니라 나를 위한 주님으로부터 충분한 누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서 구원의 서정을 들여다봅니다. 아가서 1장에서 십자가의 체험,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를 통한 사랑, 십자가의 누림을 나누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누림이 충분하지 못하면 유혹에 쉽게 넘어지거나 실패했을 때 신속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일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체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가 십자가의 체험을 충분히 하도록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아 2:7)고 말씀합니다. 그가 조금 더 십자가의 체험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그냥 두도록 하십니다.
아가서 1장 1절부터 아가서 2장 7절까지는 사랑의 시작이며, 2장 8절부터 3장 5절까지는 사랑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아가서 2장을 읽고 묵상하며 구원의 서정과 사랑의 성장과 사도 바울과 다윗의 영성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하며 더욱더 구원을 이루고 누리며 참여하는 복된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고전 15:9~10). 하나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목적하는 순전한 영성인이 되길 소망합니다(7쪽, 12쪽, 51쪽). 하나님께서 나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목적이 되시는 영성인이 되도록 더욱 추구하겠습니다(마 6:33, 사사시대의 영적 불행, 52쪽).
2. 하나님의 편재와 임재를 바르게 점검하며 적용하는 삶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에 더욱 힘쓰겠습니다(15쪽).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만을 만족하고 주님으로만 충분하다고 고백하며 사는 복된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평안(쉼)을 갖는 복된 영성인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알고 얻고 소유하는 복된 삶이 되도록 더욱 추구하겠습니다(빌 3:7~14, 요 15:7).
3. 히브리서 6장 7절~8절, 고린도전서 3장 9절~15절, 마태복음 25장 30절, 요한복음 15장 4절~6절 말씀을 묵상했습니다(17쪽~19쪽).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공력이 되기 위해 더욱 영으로 사는 복된 삶을 추구하겠습니다. 날마다 점검하여 주님으로, 주님을 위하여 사는 복된 삶이 되도록 더욱 깨어 근신하겠습니다.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공력이 모두 불타 버려서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육체의 일을 행하면서 고작 육체의 열매를 즉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면 그것은 당연히 그 공력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고 설교도 하지만 그것이 고작 육체의 일에 불과하다면 그가 수고한 모든 열매는 가시나무와 엉겅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그 공력은 다 불태워진다고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런 사람이 겨우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저주함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저주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는 천년왕국에서 자기의 유업이 없습니다. 천년왕국에서 자기의 유업을 가진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불에 던져 사른다고 말씀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30)
첫째 부활에 참여된 자는 주님과 더불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주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합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바깥 어두움은 주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시는 바로 그때입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나면 백보좌 심판이 일어나고 그때는 다시 예수님께서 그 왕권을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성부만이 만왕의 왕이 되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4. 사랑의 기에 대해 묵상했습니다(26절). 육체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는 복된 삶이,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만이, 주님의 십자가만이 저의 ‘기’가 되길 소망합니다(갈 2:20, 빌 3:3). 날마다 하나님을 바르게 간증하는 자가 되도록 더욱 삼가 조심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충분한 누림을 갖지 못하면 이 사랑의 기를 잃어버리고 육체와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로 인해 기를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그 “기”라면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늘 자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랑 때문에 얼마나 행복하고 평안이 있고 그 사랑이 내게 어떤 기쁨과 누림을 가져다주는지, 그 사랑이 나에게 언제나 완전한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늘 자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될 것입니다.>
5. 벽에 대해 묵상했습니다(40쪽). 주님의 사랑에 취해 그 사랑에 안주하고 싶은 여인과 주님 사이에는 벽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을 깊이 얻게 된 사람들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그 사랑과 은혜에 취하여 있길 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벽으로 인해 주님과 여인 사이에는 사랑의 단절이 생깁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을 통해 이 벽이 생긴 이유를 묵상했습니다. 이 벽이 제거되고 온전히 주님과 함께 주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을 위해 더욱 정진하길 소망합니다(십자가의 체험, 십자가의 누림, 십자가의 역사, 십자가의 참여).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사랑을 공급받지 아니한 채 한없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하면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또한 한없이 주님과 주님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려고만 해도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항상 상대적이고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더욱 성장하고 깊어지길 소원합니다. 주님께 상대적, 상호적, 개별적(주관적, 탁월한) 사랑으로 반응하도록 영성훈련에 더욱 힘쓰고자 합니다.
6. 목적과 추구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목적하기 때문에(아가 1장과 2장에서는 아직 온전하지 않음) 그 주님을 알고 얻고 소유하기 위해서 추구해야합니다. 추구는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목적하는 것을 전적으로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추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목적하는 신부는 절대로 안주할 수 없고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을 사도 바울의 추구정신을 통해 묵상했습니다(빌 3:7~14, 고전 9:23~27). 제자도를 학습하고 훈련할 때도 이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평생 주님의 제자, 친구, 신부로 세워지기 위해 더욱 추구하길 원합니다. 주님을 알고 얻고 소유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할 때마다 자원하여 기꺼이 포기하는 복된 영성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영적 정체성과 방향성과 목적과 단순한 삶을 더욱 마음에 새기고 이기는 자가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7. 주님이 여인에게 함께 가자고 했던 초청의 말씀을 묵상하며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고 바르게 참여하길 소원합니다(58쪽). 주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3:9, 고후 1:4, 6).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먼저 성장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주의 나라를 맡을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의 나라를 맡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십니다(갈 2:20, 요 4;34). 독후감을 쓰면서 이 공과와 함께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과 구속사를 다시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하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소망하며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의뢰하며 주님께 충성하는 복된 종이 되길 소원합니다.
8. 작은 여우에 대해 묵상했습니다(62쪽~68쪽, 74쪽, 88쪽~96쪽, 137쪽~138쪽, 보고서에 요약함). 작은 여우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이나 잘못된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고(살전 5:23~24)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주님의 좋은 종이 되기 위해서 작은 여우를 잡는데 더욱 힘쓰겠습니다. 몸이 지쳐있을 때, 무심코 행할 때, 익숙함에 속아 점검하지 아니하고 행동할 때, 브레이크를 바르게 잡지 못할 때 작은 여우가 나타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날마다 작은 여우의 정체를 인식하고 치열하게 작은 여우를 잡도록 훈련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들어가기 훈련”과 “나가기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함을 묵상했습니다(빌 2:12~14).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아 2:15)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 속에서의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서만 심령천국을 누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싸움, 주님의 포도원을 망치고 있는 여우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싸움이 싫다고 내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싸워야 승리가 있습니다. 승리가 있어야 영광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 자체를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실질적으로 포도원을 망치는 것은 큰 들짐승이 아니라 작은 여우입니다. 언제나 여우는 몰래 숨어 들어오는 약삭빠른 동물입니다. 작지만 꽃이 피는 포도나무를 망치고 있습니다. 열매를 다 상하게 합니다. 포도원을 허물고 삶 자체를 망가뜨립니다. 영적 싸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작은 미혹들에 우리의 열매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작은 사건, 작은 불평, 작은 속삭임에 우리의 포도원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아 2:15)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내 입술의 작은 말이요, 내 작은 생각이요, 내 작은 감정입니다. 이러한 작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교회와 가정을 허물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작은 여우를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곰과 사자가 쳐들어오면 싸우기 위해 방비하려고 힘쓰겠지만 여우가 몰래 들어오면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작은 싸움에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작은 여우는 부활생명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작은 여우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이나 잘못된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첫째,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습관에 속한 것이 있고 태도에 속한 것이 있습니다. 이 습관과 태도의 문제는 대부분 우리의 몸에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된 연습을 하지 않고는 바뀌지 않습니다. 잠언에는 이 작은 여우에 대한 가르침이 참 많습니다.
둘째, 말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6)고 말합니다.
셋째, 서로에 대해 판단하는 것도 작은 여우의 문제입니다. 잘못된 습관과 태도를 고치지 않고 버리지 않으니 그가 틀림없이 영적으로 성장했어도 보기에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큰 죄를 저지르거나 이기적이거나 독선적인 어떤 자아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틀림없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있는데 그에게 작은 여우가 있습니다. 그 습관과 태도가 바꾸어지지 않으니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허물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넷째, 불성실합니다. 불성실한 사람의 특징은 원칙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불성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기는 하는데 ‘대충’ 합니다. 그리고 ‘적당히’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충하고 적당히 하면서 스스로는 다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흉내만 낸 것입니다. 그리고 불성실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하다가 맙니다.
다섯째, 꾀와 술수입니다. 이것은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서 지혜를 불러올 수 없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고작 얕은 자리 즉 육신의 지혜와 생각 안에서 실용적인 답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거나 이루고자 하는 것이 꾀와 술수입니다. 이것은 죄는 아닙니다.
여섯째, 급한 것입니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입니다. 조금 더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합니다. 영의 기능은 우리 몸의 감각과 같은 것이라서 대체적으로 빠르고 바로 느껴지고 알아집니다. 그래서 지각을 사용하여 분별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말씀합니다. 느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에는 항상 지각을 사용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일곱째, 분을 냄입니다. 욱함입니다.
작은 여우는 반복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시고 나는 가지입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 계셔서 나를 통해 사시고 나를 통해서 그 열매를 맺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이 작은 여우를 잡지 않으면 언제나 사는 것은 나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생명이 나를 통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작은 여우가 가지를 부러뜨리면 헛것이 되며 다 쏟아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포도원 즉 주님과 나의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서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9. 아가서 2장 16절을 묵상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 2:16)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 6:3)
밀실을 경험한 여인은 속함을 압니다. 그런데 여인은 세상으로의 초청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를 사랑하면 그에게서 난 자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를 사랑하면 그의 왕이라는 직분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한, 나도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주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시는 한, 나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소원해야 합니다. 속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가서 2장 16절 말씀과 6장 3절 말씀은 순서의 문제입니다. 2장 16절에서는 그가 내게 속하고 내가 그에게 속한 것입니다. 6장 3절에서는 내가 그에게 속했고 그가 내게 속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그에게 속해야만 그가 내게 속한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이는 내가 그에게 속해야만 비로소 그가 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 7: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습니다. ‘속했다’는 표현은 같은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없습니다.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인다’는 그의 위치가 실종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속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가 내게 속한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에게 속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의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이는 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사도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서 한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3~25)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여기에서 여인은 주님으로 인해서 만족하고 기쁘고 안식과 평안을 가졌지만 여전히 중심은 ‘나’입니다. 그래서 내게 속한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나 예배의 자리에서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평안과 기쁨과 누림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그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내게 속하셨습니다. 나의 주님입니다. 나를 주께 드립니다.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가서 2장 16절의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는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면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는 방 안에 앉아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동문서답(東問西答)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요청에는 전혀 응하지 않은 채로 ‘주님은 내게 속했고 나는 주님께 속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주님이 그 성장으로 부르는 소리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나 자신의 체험 안에 머물러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더 주님과 온전한 사랑 안에 있다고 그렇게 착각합니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하)
나는 백합화입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 2:1)라고 고백했습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주님이 심어놓고서 친히 돌보시고 가꾸어주는 백합화입니다. 백합화는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 앞에 순결합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 외에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순수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돌보시고 주께서 친히 사랑하시는 백합화입니다.
주님은 그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초점은 ‘백합화 가운데서’입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돌보시는 나의 주님입니다. 항상 모든 중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는 ‘그가 함께하고 그가 돌보고 사랑하는 나’입니다. 이 상태에 있으면 이 세상에서 주님이 가장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속했다는 것이 먼저이며, 나는 그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창으로 들여다보며 나와 함께 가자고 부르고 계신데,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지는 관심이 없고 주님으로 인해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고 만족한지 나 자신의 느낌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르시는 그 말씀에 응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 아가서 2장 17절~3장 1절을 묵상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 2:17)
그가 내게 속했고, 내가 그에게 속한 체험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여인은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오라고 말씀하는데 아가서 3장을 보면 정작 왕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아 3:1)
여인은 내가 주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아도 주님이 여전히 내 안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은 내 안에 있어서 나를 취하게 하고, 나를 만족하게 하고, 나를 행복하게 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찾아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어느새 주님의 그 사랑이 내게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흐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의 갈등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인은 침궁에 사랑이 없음을 발견하니 이제는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일어나 성중으로 나가 저를 찾아 나섭니다. 이때가 밤중입니다. 아가서의 한 단어 한 단어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밤중에 찾아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밤을 만나면 성중에 순행하는 자를 만나서 물어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를 만나서 물어야 합니다. 아침을 찾아, 빛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캄캄한데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밤이 왔다고 잠을 자버리면 안 됩니다. 하기 싫을 때 더 해야 합니다. 각 사람이 영적으로 갖는 그 한계를 파악하고, 원인을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위기의 때입니다.
밤이 되어 그가 없으니 그를 찾아 나서야 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찬양도 잃어버리고, 감사도 잃어버리고, 기쁨도 잃어버린 우리가 다시 그를 만나면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행복한 잠이 듭니다. 이제 여인은 아침을 맞으면 다시는 예전처럼 그렇게 신랑이 떠나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신랑만 사랑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할 것입니다. 신랑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신랑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신랑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줄 줄 아는 이 갈등을 통과할 것입니다.>
11. 자기화의 함정에 대해 묵상했습니다(131쪽). 목사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과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더욱 훈련하겠습니다. 성장한 내가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이 나를 통해 사시는 복된 삶, 주님이 나와 함께 나를 통해 일하시는 복된 삶, 주님이 저를 사용하시는 복된 삶이 되도록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의뢰하며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힘써 배우고 훈련하겠습니다.
12. 생명의 흐름을 묵상했습니다(140쪽~141쪽).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내면의 흐름을 분별하고 생명으로 사는 복된 삶이 되도록 점검하며 늘 생명의 흐름 안에 거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생명의 공급과 허비가 균형을 이루어 생명의 흐름이 풍성하도록 기본적인 훈련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우리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이 말씀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과실입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포도나무가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얻어 자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과실을 맺어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과실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을 허비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흐름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랑을 받아 행복하고 기뻐하는데 그 사랑을 주는 자가 되지 못할 때 흐름은 차단이 되고 그 결과 공급도 차단이 됩니다.
물탱크의 물이 사용되어야 다시 공급됩니다. 쓰지 않으면 공급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생명은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사실 섬기는 것 같지만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생명은 공급과 허비 속에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일반적으로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의 상호간의 관계 안에서 성장합니다(엡 4:11~16).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수요는 공급의 어머니입니다. 주를 위하여 필요한 자가 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공급해주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요 15:7) 이 원칙을 이해하면 이 약속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과실을 맺기 위함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필요가 공급의 어머니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