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과 수평에 의한 기하학적 가변공간. 내.외부 공간의 상호관입. 구조의 명쾌함. 엄격한 비례미와 세련된 디테일. 코어 시스템. 신재료의 사용에 의한 공간개념과 미학의 표현.
미스반데로에_ludiwig mies van der rohe (1886 -1969)
■ 1886 독일 아헨. Aix-Chepelle 에서 5월 29일 태어남
1897-1900 Aix-Chepelle 소재의 Cathedral School을 다녔다.
1900-1902 Aix-Chepelle 소재의 Ecole des Arts et Metiers에서 공부했다.
석공이었던 아버지의 일터에서 일했다.
1902 현장주임으로 일했다.
1903-1904 석공세공인의 공방에서 치장벽토의 장식을 그렸다.
1905-1907 베를린에 있던 부르노 파울의 스튜디오에서 견습 가구디자이너로 일하였다.
1908-1911 베를린에서 피터베런스와 일했다.
1912-1937 베를린에 건축사무실을 열었다.
1921-1925 11월 그룹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1926 독일공작연맹 전시회 대표 건축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젠호프 주거 단지
1926-1932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
1929 바르셀로나의 국제전시회를 위한 독일 파빌리온의 건축가.
1930-1933 뎃사우와 베를린의 바우하우스 교장
1931 베를린의 구축전시회에서 '우리시대의 주거' 라는 제목의 공작연맹파트의 대표
1938-1958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공과대학긔 건축대학학장. 캠퍼스에 새 로운 건물을 디자인하게 된다.
1938 시카고에 건축사무실을 연다.
1948 시카고 고층건물 계획안에서 유리와 철의 커튼월을 처음 적용함.
1950 대구조 스팬 시스템을 적용한다.
1959 독일연방공로상 수상.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영예와 존경을 받게된다.
1963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을 수상하였 다.
1969 시카고에서 8월 17일 사망.
■ 미스는 1886년 3원27일 Char Iemagne의 옛날 도시였던 아헨에서 태어났다.
현대건축 4대 거장 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9년 미국태생으로 미스보다 한 세대나 앞섰던 반면에 1883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월터 그로피우스와 1887 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르 꼬르뷔제는 미스와 같은 세대의 인물들이다. 4대 거 장 중 월터 그로피우스만이 정규 대학에서 건축교육을 받았을 뿐 다른 세 건 축가들은 모두 정규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건축수련을 쌓은 것이 주목할 만 하다.
미스는 15세까지 고향 아헨에서 성당 부속학교를 다녔으며 후에 아버지가 운 영하던 석재시공회장의 현장과 어떤 스터코(석재 종류의 마감재) 시공회사의 제도실에서 건축에 첫 발을 딛기 시작하였다.
19세 되던 1905년에 큰 뜻을 품고 베를린으로 간 그는 처음 일하게 된 건축가 의 아틀리에에서 자신이 나무 구조와 가구에 대한 지식이 너무 빈약한 것을 깨닫고는 당시의 저명한 가구 디자이너이며 건축가이기도 하였던 부루노 파울 을 찾아가 그 밑에서 배우게 된다.
미스는 1908년부터 3년간 베렌스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면서 칼 프리드리히 쉰 켈의 작품 세계에 심취하게 된다.
베렌스 사무실 시절의 끝 무렵에 미스는 화란의 저명한 미술 수집가였던 크뢸 러 일가의 저택 설계를 위하여 오랜 시간을 화란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를계기 로 핸드릭 페트루스 베르나게의 건축에 큰 감명을 받았다. 베르나게가 보여주 는 구조의 진실성과 논리는 미스 자신의 창작 태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스가 제작하여 세계에 발표한 5개의 프로젝트가 현대 건 축운동의 선구자로서의 미스의 위치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첫번째 프로 젝트는 1921년에 있었던 현상 설계안으로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트라세 종착 역의 맞은 편에 자리잡은 삼각형의 대지에 고층 오피스 빌딩을 설계하는 것이 었다.
미스가 제시한 안은 입체의 모든 면이 전면 유리로 감싸여진 결정체로 도로 면에서부터 20층을 단숨에 올라가는 듯한 안이었다. 이 현상 안을 끝낸후 미 스는 유리 고층 건물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겼던 듯, 1922년에 Glass Skyscraper안을 발표하였다.
미스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Free-form Amoeboid의 평면으로 구성된 이 프로 젝트는 우선 평면의 크기가 '프리드리히스트라세안' 보다 작은 반면에 30층 까 지 올려진 입면에 의하여 더 탑의 느낌을 주는 비례를 지니고 있고 미스의 말 을 빌리자면 도로 레벨에서 보이는 건물의 입체감과 유리에 반사되는 성격을 충분히 살리기 위하여 그 외관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조형적 창의력이 풍부한 이 두 고층 건물 안과는 아주 대조적인 '콘크리트 오 피스 건물안'을 미스는 1923년에 제작하여 전시하였다. 현자의 패널만으로 이 루어진 콘테차콜 투시도로 이 계획안은 라멘구조 (철근 콘크리트 구조 방식) 의 성격을 간결하고 우아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 미스의 5개 프로젝트 중 마 지막 둘은 '전원 주택안' 이었는데, 1924년의 벽돌 전원 주택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프로젝트로서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직 그 잠재적인 가능성이 충분히 탐구된바 없다. 서로 직각 방향으로 배열된 조적 벽면들 사이사이로 일련의 연결된 공간이 형성되고 몇 개의 조적 벽들은 지붕 을 구성하는 장방형의 한계를 벗어나 자연 속으로 뻗어나가는 이 디자인은 5 년 후 미스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공간감을 예고해 주 고 있다. 일년 앞서 1923년에 발표된 콘크리트 전원 주택 평면의 Zoning 개념 을 보여주고 있다.
1차 대전 후에 일련의 프로젝트로 명성을 확립한 미스를 알고 있지만, 그에 게는 프로젝트를 통하여 어떤 건축의 문제를 분석하고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 는 습관이 있었고 제자들과 후배들에게도 프로젝트로 끝나는 설계안을 만들어 볼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1960년 미국 건축가 협회 A.I.A의 금메달 수여식에서 미스가 한 짧은 답사에 서 그의 생각을 그의 건축 작품에서 보는 명료함과 간결성을 갖고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학생, 건축가 그리고 관심있는 일반인들에게서 여러 차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갈 길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새로 운 건축을 고안 해 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한 시 대의 끝이 아니고 시작에 처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새로운 정신에 의하여 지 배될 것이며 새로운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힘에 의해하여 움직여질 것이며,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재료를 구사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새 건축이 생길 것 입니다."
" 그렇다면 건축은 문명의 가장 으미있는 노력에만 연관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연관 관계만이 진실합니다. 이 연관 관계를 나는 진실 의 양면 관계라 부르고 싶습니다. 토미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Adequatio intellectus et rei의 '진실' 또는 현대의 철학자가 현대어로 표현하듯이 '진실이 란 사실의 의의'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연관 관계라야 우리 문명의 복합성을 포용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건축이 우리 문명의 형태가 천천히 변 하여 가고 있는 것을 표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독일에서 건축가로 출발할때부터 미스는 과거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했으 며 대신 사용 재료의 특성을 명료하게 전달해주는 기술적 수단을 추구했다. 그는 구축의 엄격한 표현을 선호하여 모든 장식을 거부했다. 그의 많은 계획 은 지어지지 않은채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그 각각의 시대에는 너무나 대담한 유토피아였다. 무엇보다 이것은 사상을 만든 건축이었다.
재료에 내재하는 이런 특질은 이미 미스의 목탄 스케치와 모델에서 확연하다.
특히 유리는 고층건물의 둔감한 외피로서 간주된것만은 아니다. 도리어 유리 는 빛이 굴곡된 벽에 부딪히는 방식에서 반사와 그림자를 만드는 풍요로운 요 소로서 이해된다.
전체의 접근은 어떤 근본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축체계에 새로운 강조를 두는 것으로 구성된다.
■ "규율" 이 말은 미스의 삶과 일의 표어였다. 규율, 질서, 명징함, 진리
첫째 _ 벽돌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응시하는 것
둘째 _ 한가지 재료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어 여러 가지 전통적 재료로 나아가 는 이성적 훈련이다.
셋째 _ 현대의 특징적 재료 철, 콘크리트, 유리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
넷째 _ 현대가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 실용 목적은 물질적 진보의 척도일 뿐이다.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는 일이야말 로 문명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무엇이 기능이고 무엇이 가치있는 일 인가를 하나씩 명확히 해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 미스의 건축에 보편성을 가지고온 건축적 문제 _ 기둥과 피막
미스가 자주했던 "Less is More " 는 말수가 적었던 시절의 성격을 나타낼 뿐 아니라 철저히 아이디어를 정제해 내는 그의 제작 태도를 이야기 해 준다.
솔직함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라는 문제는 철과 콘크리트는 강함을 나타내는 건물의 뼈이다. 유리는 빛나는 베일처럼 그 뼈를 감싸는 외피이다.
미스의 마천루 계획안에서 뼈와 외피가 완전히 분리되어 뼈는 안에, 유리 외 피는 밖에 두고 바닥과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는 일과 날씨로부터 실내를 지키 는 일 사이에 시각적으로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어 있 다.
■ 미스에게 영향을 준 개념
1922년이래 정기적으로 데 스틸의 데오 반 데부르그가 베를린을 찾아오고 있 었기 때문에 미스의 주택 작품에서 보이는 선형 비대칭의 평면 구성은 데 스 틸과의 화가가 즐겨 사용하던 직선 장방형, 사각형 처리법의 어느 부분의 영 향을 받았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벽돌 주택 : 네모난 유리오 벽돌 덩어리 조합은 반통겔루의 작품을 연상시킨 다. 평면계획은 몬드리안의 초기 회화를 연상시킨다. 1910년 (라이트 베를린 전시)에 미스가 라이트로부터 얼마나 강하게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평 면은 전형적인 라이트의 전원주택 그대로이다.
■ 미스에게 건축이란 재료로부터 공학을 거쳐 중요한 형식과 예술서에 이르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교육에 의하면 우리들은... 우연성과 임의성에서 탈출하여 합리적인 명쾌함과 이성적 순서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 다."
바르셀로나 박람회 독일관,바르셀로나(German Pavilion)1929
이 건축은 오늘날 지어졌어도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인 건축이었다. 상대적으로 긴장감 있는 부재의 크기와 요철없이 매끄러운 재료의 대범한 사용은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Fundaci? Mies van der Rohe
La Fundaci? Mies van der Rohe va ser creada el 1983 per l’Ajuntament de Barcelona, amb l’objectiu inicial de portar a terme la reconstrucci? del Pavell? Alemany, dissenyat per 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 per a l’Exposici? Internacional de Barcelona del 1929.
http://www.miesbcn.com
우리들은 모든 연상적인 미 또는 학설 그리고 모든 형식주의를 부정한다.
건축은 시대요구를 공간으로 실체화하고 거주하고 변화하고 새로이 전진하는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니며 오직 오늘 이라는 날만이 형태를 조성할 수 있다. 오직 이런류의 건축만이 창조되어야 한다.형태는 우리들의 직무에서 그 성격상으로 보아 건축의 문제만을 생각해야 한다. 형태는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다. 형태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가 목적이라고 하는 것의 형식주의 라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우리 임무의 본질은 미적인 연상을 통제하고 어떤 것을 제외하고 무엇을 회복시키는 가에 따라서 건물을 자유롭게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미스의 건축사적 사고는 그가 건축에서 형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시그램 빌딩,뉴욕(Seagram Bldg)1945~1958
현대의 사무용 고층 건축물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건축 철학과 예술관을 가장 잘 표현한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삼일빌딩도 이 건축물을 모범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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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즘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미스는 그 시기 공간 속에서 어떻게 용(用)을 관련시킬까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방을 단위로 용(用)에 대응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말을 지었다. 기능개념을 가지고 용(用)을 그 위에 결론짓는다면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행위이다. 행위 그 자체는 사실 용(用)의 실태이므로 그것은 현실에서 가구와 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하며 유동하고 거리낌 없는 광대한 원룸 안에 미스는 가끔 가구를 배치한다.공간은 단지 가구만을 사이에 두고 행위에 직접 장(場)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것도 수용하는 공간을 미스는 '유니버설스페이스'라고 부른다. 또한 정해진 사용실태를 결코 규정하지 않는 공간에 융통성을 주는 것이 코아 시스템이다.
판스워스 주택은 미스가 미국에서 실현시킨 두개의 주택 중 하나로 건축주는 독신 의사 에디스 판스워스 이다.시카고 교외 폭스천 부근에 세워진 이 집은 그가 최초로 실현시킨 클리어스판의 건물이기도 하다. 그 내부공간은 간결한 동시에 자유롭고 L, H형 서비스 코아, 즉 주방 화장실 창고 등이 유일한 폐쇄적 요소였다.테라스, 약간 높은 바닥면 그리고 평지붕, 이 세 부분의 수평면이 여덟 개의 H형강 기둥으로 용접 되어 잔디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내부공간은 설비 코아를 중심으로 상이한 기능을 갖는 공간이 천정까지 도달되지 않는 하프파티션에 의해 구분된다. 또 바닥이 높이 들려 있는 것은 폭스천의 범람에 대처하기 위한 기능적인 해결이었을 것이다.이 집에 사용된 재료는 아주 적은 것이었지만 기발한 사용법으로 훌륭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디테일의 엄격한 배려가 미스의 작품을 다른 에피고넨의 그것과 명확히 다르게 하고 있다. 주위의 풍경 속에서 투명히 나타나는 마치 홀연히 출현한 테크놀로지의 부산물 같은 이 건축은 미스가 이상으로 하는 공간을 구현한 것이다.
판스워드 주택,일리노이(Famsworth House)1946~1950
이 주택은 그의 전작인 바르셀로나 박람회 독일관과 베를린 미술관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지붕판과 바닥판을 잡아주는 U형강의 보에 의해서 결구되어 있는 단순한 구조물이다. 모서리 부분은 유리로만 연결되어 있어 개방된 부분은 건물의 역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집주인은 이 집이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살 수 없다며 미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한편 미스의 주택에서 우리는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린 새로운 타입의 인간을 위해 건설한다는 관념적인 목표설정이 현실의 요청과는 대립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택은 그래서 당연히 고가이며 소수의 부유층에 한정되어 버린다. 다음으로 내외의 공간적 연속성을 실현하기에는 충분한 녹지에 의해 주택 전체가 외계로부터 격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완벽한 조형은 전체의 조화를 파괴하지 않고는 부분적 변경을 허락치 않는다. 때문에 그의 건물에 대한 이용자 측은 자기변혁에 의해서 건물과 완전히 동조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즉, 이용자 자신에게 완전성과 자기억제, 절도와 고상, 우아함과 취미의 풍부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현실과는 무관하였다.
참고적으로 미스는 늘 완벽에 가까운 시공수준을 요구했고 그 때문에 급상승한 공사비를 둘러싸고 미스와 건축주인 에디스 판스워스 의사 사이에서 재판이 일어나기도 했다.그러나 합리주의 건축가중 미스 이외에 자유로운 생활방식에 대한 추상적, 유토피아적, 그리고 고결한 희망을 그와 같이 철저하게 건축에 구현 시킨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비적인 연금술은 '적으면 적을 수록 풍부하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을 반영하는 것이고, 즉 본질에의 지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나타내는 해답은 예술의 과제를 동시대의 절망적인 혼란 속에서 질서를 잡는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자기의 건물을 자연 혹은 대도시의 혼돈 된 상태에서 이성의 오아시스로 자리하게 함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타내는 형태는 무관심이라든지 또 역으로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기 쉬운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며 그의 노력으로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의 비극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크라운 홀,시카고(Crown Hall,I.I.T.)1951~1955
주층의 균질공간(높이 5.5m)를 오크나무로 된 이동식 간막이(높이 2.35m)가 최소한의 구획을 부여
·균질공간 _ 어떠한 용도에도 적합할 수 있도록 특별한 목적을 정하지 않은 무성격의 공간으로 근대건축에서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적절한 크기.가구나 칸막이에 의해 분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지향되었다.거기에서는 건축은 생활에 좌표를 줄 뿐이며 규정하는 정도는 적다.
- 외부는 건물 양끝의 6m짜리 캔틸레버가 좌우방향으로 확산을 강조하며, 입구를 표시
- 테라스의 바닥판이 중심으로서의 강한 중심성을 나타냄
국립미술관,베를린(New National Gallery)1962~1968
높이 만든 기단 위에 자리한 이 건축물은 미술관 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벽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여덟개의 십자형 강철기둥들로 지지되는 정사각형의 지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외주부에는 기둥이 없다. 그러나 이 건물도 역시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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