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 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21인 신작 시집》(1982)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경상남도 하동군 노량 앞바다 한려수도에 이르는 유로 연장 212km의 급류 산협 강이다. 진안 고원 남쪽 일대의 물을 모아 임실, 순창 등 산악지대를 누비며 곡성에 이르고, 보성강 물을 합하여 소백산맥을 뚫고 흘러오다가 구례군의 물과 지리산 물을 합하여 유역 면적 4,986km²의 넓이를 포괄하여 흐른다. 섬진강은 전국 5대 강 중에서 가장 깨끗한 강으로, 은어, 다슬기 등 40여 종의 담수어와 남한 특산종의 40%가 살고 있는 조화된 생태계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강이다. 이렇게 힘차고 생명력 있는 섬진강을 소재로 한 <섬진강 1>은 김용택 시인이 1982년 문단에 나오게 된 첫 작품으로, 이 시를 쓰던 당시 김용택은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에 살며, 모교 덕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는 자연적 아름다움을 통해 아이들에게 산 교육을 하였고, 그만큼 섬진강을 믿고 진메마을을 사랑하였다. 그는 이후 <섬진강>이란 제목으로 30편에 가까운 시를 더 쓰게 되는데, 특히 이 시가 발표될 무렵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후유증으로 충격과 아픔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남도 사람들이 시름에 잠겨 한숨을 짓던 역사적 격랑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시인 김용택은 섬진강을 젖줄로 살아가는 남도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과 응어리진 그들의 한과 설움을 보여 주며 포용력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쓰다듬어 주고자 했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김용택이 체험한 농촌의 현실, 정치와 사회의 문제를 역사의 흐름이라는 차원 높은 눈으로 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시인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자연과 일체감이 되어 남도의 젖줄인 섬진강을 통해 농촌의 실정과 상흔이 남아 있는 남도 들의 한과 아픔을 대변하고 그들을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읽는 한국의 명시」 김원호 지음
맹태영 옮겨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