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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도 피에 얼룩져 땅위에 떨어지고"
계엄군 오후 1시 도청앞 집단 발포
화순등지서 무기포획 시위대 무장
공수부대,저항에 밀려 시외곽 철수... 17시 30분 시민들 마침내 도청 접수
두사람의 21일 일기
역사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진실은 기록에 의해 역사화 되고 후대는 그 진실한 역사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5.18 당시 제도언론은 신군부의 통제속에 진실보도는 커녕 왜곡과 날조로 거짓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누군가는 꼭 있었고 그들은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 진다]는 명제를 입증해왔다.
전쟁을 방불케 했던 80년 5월 21일 .
그유혈극을 승리로 이끌고 그 [피의 축제]를 온몸으로 경험한 그날을 기록한 두 민간인의 일기는 진실된 역사기록의 귀중한 본보기다.
당시 전남대앞 신안동에 살았던 김준태시인과 양림동 선교사주택에 살았던 미국인 피터슨목사의 일기를 그대로 옮긴다.
김준태시인일기(1980년 5월 21일 수요일)
아우성소리,스피커소리,밀리고 밀려가는 소리에 잠을 깨 거리에 나갔다.
시내도처의 거리는 이미 어린이고 어른이고 할것 없이 전 광주 시민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공설운동장에서 광주역쪽으로 가면서 보니 시위차량들이 3백50대이상이나 추산돼 보였다.
전남방직과 일산방직 공장앞에선 여자 직공들이 몰려 나와 사이다와 콜라 빵을 시위차량에 넣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시내 곳곳에선 시위차량과 젊은이들을 가두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금남로 일대만 하더라도 30여만명정도가 시위에 참가한셈이다.
시위군중들을 가득가득 태운 버스들,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탈취한 듯한 대형군용트럭 , APC장갑차,민간인용 트럭들, 소방서차들,개인택시들,관용차들,고속버스들이 시내를 질주하며 [도청으로! 도청으로 !]외쳐됐다.
계엄군들은 일단 광주시 외곽으로 벗어나서 대치하는 중이었으나 하늘에는 여전히 군용헬리콥터 가 빙빙 돌고 있었고 도청앞 광장엔 여전히 탱크와 중무장한 계엄군들이 시위군중과 팽팽하게 맞서거나 혹은 부딪치고 있었다.
시위차량 구 저지선 뚫어
오후 1시경. 시위차량들이, 그러니까 탈취한 APC탱크와 버스와 트럭들이 도청앞 계엄군의 저지선을 뚫으려 했다.
시위차량 몇대가 계엄군 저지선을 돌격적으로 통과 했을때,어디서 쏘았을까 .
[빠바빵! 핑핑!펑펑!삐이잉! 뜨르륵 뜩뜩! 뜨르륵 뜩뜩!] 아아,이 어인 일인가 .이어인 일인가. 시위군중들은 도망치며 [공포탄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외쳤다. 아수라장,아비규환,전쟁터였다.
나느 금남맨션 도매상가 앞골목에 있었는데 이 골목에서만도 잠깐사이에 15구의 총맞은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들은 주로 용감한 젊은 사람들에의해 때마침 달려온 트럭에 실려졌으며, 또는 어깨나 다리에 총상을 입은 사람들은 [병원! 병원!]하며 주위사람들에 부축돼 병원으로 옮겨져 갔다. 그러나 시위차량들은 또 밀려가고 있었다.
도청을 향하여 시위차량위에서 펄럭이던 태극기도 어느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에 얼룩진 태극기!] 그때 가톨릭센터 옆 S 산부인과앞에서 어떤 중년신사가 [광주시민들이요 ! 우리총을 가지러 갑시다. 우리 이러다간 다 죽습니다.]라고 울부짖자 거기 모인 사람 모두 [가자,가자, 총을 가지러 가자]하는 것이 아닌가.
헬기 광주 상공선회
무서운 일이었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길래. 이렇듯 처참한 안간살육을 방관하고만 있단 말인가 심지어 철없는 어린 소년이 쓰러져도 멀리 고개를 돌리고 있단 말인가.
나는 이세상에 하느님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마침내 젊은 시위학생등이 광주시외의 면.군에가서 총과 탄약을 그리고 화순탄광에서 TNT를 대형 고성능 다이너마이트를 빼앗아가지고 다시 광주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오후 5시께 계엄군의 최후 저지선이 무너지고 그침없이 LMG총성같은 것이 전시내를 울렸고. [퉁퉁퉁!]오후 5시 30분께 도청은 시위대와 학생들의 손안에 들어간것이다.
계엄군들은 시외로 밀려나가 대치중인 모양이었다. 이제 광주는 [섬]이었다.
그러나 광주는 바다처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멀리 그렇지만 너무도 가까운 무등산위엔 달이 ,붉은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고 있었다.
5월 21일 이날밤 나는 죽은 듯이 꿈꾸고 있었다. 무등산 위에서 흰옷입은 수천명의 어머니들이 울부짖는것을 꿈속에서 보았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땅을 지켜왔던 그 한많은 백의 민족의 어머니들!
피터슨 목사의 일기 (1980년 5월 21일 수요일)
수요일에 우리는 시위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나는 곧장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거리로 내려가 보았다.
나는 그 소리들이 내가 생각했던 성질의 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발견했다.
성난 반정부시위가 아니라 , 그시위는 기쁨과 승리를 마음껏 분출시키는 축제적인 것임을 목격했다.
그들이 내세운 표어는 [계엄령을 철폐하라!] [살인마 전두환을 죽이자!] [김대중을 석방하라]등이었다. 이제 시민들과 군인들 사이의 싸움이 도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나머지 부분에 있었던 군인들은 외곽으로 물러났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겼다!]라고 외쳤다.
시민들의 분위기는 거의 축제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집에 돌아온 후에 우리중 몇사람은 도시전체를 살펴보기 위해 근처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 옥상으로 갔다.
세무서 건물은 불타고 있었다. 우리가 건물에 서있을때 곧 오후 2시께 헬리콥터 한대가 도시전역을 날아다니면서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그것은 시민들이 거리를 떠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결과가 빚어질지도 모른다는 공고문, 혹은 경고문이었다.
오후 2시께는 시민들중 일부가 광주 바로밑 남쪽에 있는 화순마을에서 무기를 포획했다. 그때부터 시민투사들중 많은 사람들이 총을 갖고 다녔다.
나는 장세균목사(현재 독일거주. 편집자주)가 총을 탈취한 사람들은 학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강조하는것을 들었다. 대신에 그들은 젊은 실직자들과 노동자들이었다.
기독병원 총상환자 가득
싸움은 더욱 거세졌다. 정오가 막 지난후에 우리는 민간인 사상자들이 기독병원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병원에 가보니 매우 혼돈스러웠다.
첫번째 민간인 희생자는 낮12시께 도착했다 그는 학생나이의 행방불명자녀들을 찾다가 등에 대검을 맞은 중년남성이었다. 오후 3시 15분께 광주 영공에 몇대의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에 있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사상자들은 병원에 매우 급작스럽게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헬리콥터들은 계속해서 도시영공을 날아다니면서 총을 쐈다. 우리가 오후 4시 30분에 병원을 떠날때 광주 기독병원은 50명이상의 사상자와 9명의 사망자를 접수했다.
팔 다리에 총을 맞은 작은소녀와 위에 피를 흘리고 있는 두사람과 머리에 총을맞은 소년과 포화속에서 얼굴이 뭉그러진 한남자가 있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때 나는 집지붕위에 있는 발코니로 갔다. 그위치에서 나는 도시 영공을 날아다니면서 거리의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 사진을 몇장 찍었다.
10일간에 발생한 모든 사건들 중에서, 군중들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군인들이 발포하는 모습이 내게는 가장 잔인해보였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