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가”(갈 6:11-17) 2013. 8.11.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아온 아들을 7년만에 아버지가 서울에서 만나면서, 어릴 때 헤어진후 오랫동안 보지 못한채 살아온 아들을 그의 다리에 있는 화상 흉터를 보고서야 자기 아들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는 탈북자 본인의 증언을 얼마전에 들은바 있습니다. 옛날 고구려 주몽왕은 부러진 칼을 맞추어 봄으로써 찾아온 유리왕자가 친아들임을 확인했다는 고사도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언젠가 천국에 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케 하는‘예수님의 흔적’같은 표식이라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행여나 이만하면 손색 없는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자신하며 살았는데, 죽은 다음 막상 주님 앞에 가서보니 흔적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면 그같은 낭패도 없을 것입니다. 그같은 일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마태복음 7:23절 말씀에 보면“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받고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별한 표시나 흔적이 있었습니다.
구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대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시는 표시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몸에 할례의 표식을 지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브라함의 첩의 자식인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아서인지, 성경은 말하기를“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롬9:7)”하셨을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 와서는“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9)”고 하였고 또 오늘 본문 말씀에도 있듯이“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 구약 출애굽기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코자 하실 때 특별히 모세에게 명하여 애굽 바로의 백성들과 철저히 차별화하여 구원하십니다. 바로 그 최종적인 차별화의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이지요. 그것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자기의 집 대문에 칠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밤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자들을 칠 때, 그 피를 칠한 집은 넘어가므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만은 살아남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유감스럽게도 후에 광야에서 계속적으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때에 결국은 망하였던 것입니다. 그 망한 이유에 대하여 히브리서 3:18-19절은“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즉 유월절도 좋지만 결국 믿음을 버리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고 말씀하신대로, 무슨 육체의 할례나 대문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칠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을 때, 모든 구원과 영생의 축복이 임하는 것임니다. 시편(시40:6)과 히브리서(히10:16)에“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하셨고, 로마서(롬10:9-10)에도“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만, 그 흔적이 육체에 새겨지고 남아있는 것 뿐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는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 안에 가만히 침투한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할례를 자랑하면서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선동하여 신앙을 미혹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면서 예수만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이상한 다른 복음으로 성도들을 미혹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여 저들의 이단성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얻는 것이기에 할례받은 육체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결론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11절에서 15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1-15)”
사도 바울은 이같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며 전도하였으며, 온 이방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도하는 중에 받은 핍박과 고난을‘자랑과 증거’의 자료로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아마도 17절에서“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는 말씀이 바로 그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수없는 핍박과 고난을 언급하는 중에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친 후에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갖다 버려진 적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고후11:23-28).
그러므로 누군가 우리에게‘너희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할 때,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흔적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진정으로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얼마나 확고하게 믿고 사느냐 라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진정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전도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고, 교회봉사를 위하여 고생하기도 하였고, 신앙생활 중에 괴롭히고 마음에 상처를 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고, 예수님 때문에 주위들로부터 따돌림을 당였하거나 심지어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쩌다가 한 두 번 쓰린 경험을 해 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진정성을 얼마나 지니고 살았더냐 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주님이 그날에“잘하였다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해 주실 때에야 비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한 두 번 경험하여 보았다고 하여 되어지는 차원이 아니잖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흔적”이란 말을 좀 더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흔적은 헬라어로‘스티그마타’인데‘스티그마(표지,낙인)’의 복수이니 아마도 몸에 남아있는 많은 상처들을 생각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은 징벌 차원의 고난의 증거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원래‘스티그마’는 특별히 소유권을 표시하는 낙인이었다고 합니다. 옛날 중동 지역에서는 소떼들의 소유주가 자신의 소의 오른쪽 넓적다리에 인두로 문자를 낙인 찍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함에는,‘나는 영원히 예수님의 소유요 예수님의 노예’라는 자랑스러운 고백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사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라(계7:3).”또 인의 내용이“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계14:1)”인 것을 볼 때, 인침에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43장에도“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사43:1-3)”고 하였고, 요한복음 10장에도“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고 약속해 주신 줄 믿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흔적을 말할 때에 두가지로 그 의미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수고하여 받은 흔적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너는 내 것이라고 인쳐주신 흔적입니다. 즉 신앙은 인격적이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차원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도“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4:6-9)”고 하였습니다.
여기‘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대목에서 신앙의 인격성을 보는 것입니다. 내 믿노라 또는 아노라 하는 능동적 동작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수동적 근거 위에서만 건전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기에 우리는 비로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에베소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1-14)”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상속할 수 있는 자녀로 삼아주신 이같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인치심의 은혜를 우리가 입었으니,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 때에 마땅히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한 흔적이 생겨나야 하지 않겠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변함없이 믿으며 항상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참된 예수님의 흔적을 마음에 지니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