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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심덕부(沈德符)
1328년(충숙왕 15) - 1401년(태종 1)
고려 후기에, 서해도원수, 문하찬성사, 서경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 · 허당(虛堂).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郎) 심용(沈龍)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 수원부(水原府)의 수령이 되었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다. 이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와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 · 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 ·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로 재임하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북청(北靑)주1 등지에서 동북면에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겨울에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의 요동주3 출병 때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 · 정도전(鄭道傳) ·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 · 경기좌우도 · 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이듬해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비어(飛語)주4에 따른 무고로 인해 일시적으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세자 왕석(王奭)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 · 정몽주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이듬해 치사하였다. 심덕부는 고려 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 토벌에 업적을 남겼다.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부활시킬 것, 제사(諸司)의 서무를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할 것 등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394년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 건설에 큰 구실을 하였다. 한편, 심덕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다섯째 아들인 심온(沈溫)은 세종의 국구(國舅)주5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인 심종(沈淙)은 태조의 부마주6가 되었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이로써 이루어졌다. 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쳤다.
집필자 > 이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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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17권 / 행장(行狀)
특진 보국숭록대부 청성백 심공 행장(特進輔國崇祿大夫靑城伯沈公行狀)
강석덕(姜碩德) 찬(撰)
공은 휘(諱)는 덕부(德符)요, 자는 득지(得之)이다. 대대로 경상도 청부현(靑鳧縣 : 청송군)에 살았다. 문림랑위위승(文林郞衛尉丞) 홍부(洪孚)가 합문지후(閤門祗候) 연(淵)을 낳고, 연이 이조 정랑(吏曹正郞) 용(龍)을 낳았다. 공은 그의 아들이다.
17세 되던 충목왕 원년 음사(蔭仕)로 좌우위녹사참군(左右衛錄事參軍)을 제수하고, 공민왕 8년 무술에 중랑장으로 올라 합문인진부사(閤門引進副使)를 겸직하고, 임인년에 봉선대부합문부사(奉善大夫閤門副使)에 오르고, 계묘년에 봉상대부 전공총랑(奉尙大夫典工摠郞)이 되고, 이 해에 중현대부 소부윤(中顯大夫少府尹)에 제수되었다.
갑진년에 수원 부사를 원하여 나갔더니, 안렴사가 이 고을을 순시할 때에 공이 들어가 보려는데, 안렴사가 바지를 입지 않은 것을 보고 문득 물러나왔다. 안렴사가 아전에게 명하여 꾸짖으니, “의복을 제대로 입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안렴사가 사과하였다.
그의 곧고 아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병오년에 강화 부윤이 되었다. 강화는 구석지고 누추하여 원래 학문을 숭상하지 않았다. 공이 부임한 뒤에 서당을 크게 열고 스승될 선비를 맞아다가 향중(鄕中) 자제들을 모아 시서와 예의를 가르치니, 한(漢)나라 문옹(文翁)이 촉군(蜀郡)의 태수가 되어 학교를 세워 교화를 일으키던 풍이 있었다.
신해년에 통헌(通憲) 대부로서 충주 목사로 나갔는데, 아전들이 순종하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어 고과(考課)에 제일이었다. 얼마 안 되어 모친의 부고를 듣고 도보로 안성(安城)까지 분상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니 거의 죽기에 이르렀다. 계축년에 상복을 벗고 정순대부 판위위사사(正順大夫判衛尉寺事)가 되고, 위조(僞朝) 2년 을묘에 우상시에 올랐다. 공이 지략이 많아 장수의 재목이다 하여,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로 올려 강계 도만호(江界都萬戶)를 맡겼다.
모든 시정(施政)이 뛰어나, 명성이 더욱 높아져서 조정에서 소문을 듣고 봉익대부 밀직부사 의주부원수(奉翊大夫密直副使義州副元帥)로 발탁되고, 병진년에 밀직부사 상호군으로 제수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도로 불러 돌아왔다. 정사년에 동지 밀직사사 상호군(同知密直司使上護軍)으로 제수되었다가 이 해에 서해 도부원수 겸도순문사(西海道副元帥兼都巡問使)가 되고, 무오년에는 밀직사사로 제수되었다.
위조(僞朝)에서 그 공을 기록하여 추성협찬(推誠協贊) 공신의 호를 주고, 곧 밀직사사 상호군으로 옮겼다. 10월에는 사신의 명을 받들고 남경에 갔다. 이 때 명나라 태조고황제가 여러 번 손내시(孫內侍)의 돌아오지 않는 것을 힐문하므로 모두들 사신 가기를 굳이 사양하였으나 공은 명을 받고 난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명나라 서울에 가서는 아뢰는 것이 민첩하였다. 공이 명나라 서울에 있을 대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를 제수하였고, 기미년에 고국에 돌아와 문하사 상호군(門下事上護軍)에 임명되고, 이 해에 문하사 상의회의 도감사 상호군(門下事商議會議都監事上護軍)에 임명되었다.
경신년에 왜구가 전함 1천 척으로 우리나라 남쪽 변방을 침범하여 지나는 곳마다 남김없이 파괴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막지 못했으므로 왜구가 싸우면서 용안진포(龍安鎭浦)까지 와서 적세가 매우 떨치었다. 위주(僞主)가 공을 시켜 누선 40척을 영솔하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적이 배를 네모로 모아 진을 치고 칼날과 살촉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으나,
공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단번에 거의 섬멸하였다. 이로부터는 왜구들이 다시 날뛰지 못했다. 임술년에 서북면 도순문사 겸평양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尹)이 되어, 성과 보(堡)를 수리하여 공사를 끝내고, 갑자년에 개성부 판사로 불리어 돌아왔다가, 을축년에 문하참찬으로 올랐다. 동북면에 왜구의 침입이 있어 공이 명을 받고 가서 토벌하였다. 뒤에 문하찬성사가 되어 명나라 서울에 조회하러 갔다가 병인년에 돌아와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무진년 요동 공격 때 공이 우리 태조를 따라 파사부(婆娑府)까지 군사를 행군했다가 태조가 존명(尊明)의 대의를 주장하고 군사를 돌릴 때, 공이 옆에서 돕고 바친 힘이 많았다. 공양왕 원년 기사(己巳)에 문하좌시중 경기좌우도통사로 올랐다. 재상의 지위에 올라서는 항상 일 보는 하인에게, “내가 밤낮으로 공청에만 있으니 혹 글발을 보내오는데 물건이 딸렸으면 너희들은 받지 말라.”경계했다.
여러 자질(子姪)들이 벼슬을 받게 될 때마다 공은 손발이 얼어 터진 것을 보이면서 경계하기를, “나는 들락날락 이렇게 수고하고서 이런 자리에 올랐지만, 너희들은 무엇을 했다고 앉아서 벼슬만 하느냐.” 하였다. 경오년에 뜬 소문 때문에 토산현(兎山縣)으로 귀양갔다가 일이 밝혀지자 곧 불러서 돌아왔다.
신미년에 다시 좌시중이 되어, 공양왕의 아들 석(奭)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조회하였다. 임신년에 우리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전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할 때의 여러 장수들에게 추후로 상을 주었는데, 공이 공신 1등이 되어 판문하에 제수되었고, 뒤에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갑술년에는 개성에 성을 쌓는데 공이 감독하였고, 이 해 서울을 한양(漢陽)에 정하고 역부의 수를 계산하며 의로써 타일러 부리기를 너그럽게 하니,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축년에는 판문하로 제수되고, 무인년에는 영삼사(領三司)가 되었고, 기묘년에는 좌정승으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병으로 사직하니, 다시 청성백으로 봉하고 1품 녹봉을 받았다.
신사년 정월 모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74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태종은 3일이나 조회를 중지하고 내시를 보내 사제(賜祭)하고 부물을 특별히 내렸다.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麻田縣 지금의 연천군)에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했다가 뒤에 정종의 시호를 피해 안정(安定)이라 고쳤다.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욕심이 없고 담박하여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않고, 거처함이 공손하여 첩이 없었고, 살림살이에 힘쓰지 않고 받고 주는 것은 의에 맞게 하였다. 이러므로 20년간이나 장상(將相) 자리에 있었으나 창고에 남은 재물이나 곡식이 없어 죽은 뒤에 초상과 제사를 겨우 치루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일을 당하면 강직하고 과단이 있어 조금도 사정이나 아첨함이 없었고, 적을 공격함에는 그 괴수만 잡고 나면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평시에 책을 대하여 고요히 있어 마치 문인(文人) 아사(雅士) 같았다. 처음 청원군(靑原君) 송유충(宋有忠)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아들 셋을 낳으니 인봉(仁鳳)ㆍ의귀(義龜)ㆍ도생(道生)인데, 도생은 불교를 배워 중이 되었다. 다시 감문위낭 장인천문(監門衛郞將仁川門) 필대(必大)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으니 징(澄)ㆍ온(溫)ㆍ종(淙)ㆍ정(泟)인데, 온은 병인년 진사과거에 합격하고, 종은 태조의 둘째 딸 경선공주(慶善公主)의 부마가 되었다.
우리 전하(세종)가 잠저에 있을 때 태종이 온의 맏딸을 뽑아 배필로 삼고 즉위한 뒤에 공비(恭妃)로 봉하였다. 이것이 애영(哀榮)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대강이다. 이제 사관이 실록을 편수하는데, 심씨의 자질들이 다 어리므로, 내가 그 집의 사위라고 해서 공의 행장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이 죽을 때에 필시 글 잘하는 분에게 그 행장을 지었겠으나, 거듭 가화(家禍)를 만나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석덕(碩德)은 공(公)의 높은 공(功)과 장한 사적이 장차 매몰되어 없어질까 걱정하여, 평소에 들은 바를 주어 모아 겨우 만분의 1이나마 만들어 조봉대부 한성소윤(朝奉大夫漢城小尹) 강모(姜某)는 지어 바친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권태익(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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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特進輔國崇祿大夫靑城伯沈公行狀 - 姜碩德 撰
公諱德符字得之。世家慶尙靑鳧縣。有文林郞衛尉丞洪孚。生閤門祗候淵。淵生吏曹正郞龍。公其子也。行年十七。忠穆王元年甲申。以門蔭授左右衛錄事參軍。恭愍王八年戊戌。陞爲中郞將兼閤門引進副使。壬寅陞奉善大夫閤門副使。癸卯遷奉常大夫典工揔郞。是年授中顯大夫少府尹。甲辰乞水原府使。廉使行郡。公將入參。見使不褌。使退。使命吏讓之。對以服不如儀。使謝 。其耿介不阿若此。丙午拜江華府尹。是郡僻陋。未嘗講學。公旣至。大開黌舍。迎致師儒。集鄕子弟。敎以詩書禮義。蔚有文翁化蜀之風。辛亥以通憲出刺忠州。吏治民寬。考居第一。尋丁大夫人憂。徒步奔安城。哀毁過禮。幾至失性。癸丑遂服。拜正順大夫判衛尉寺事。僞朝二年乙卯。陞爲右常侍。以公多智略。才堪將帥。陞爲奉翊大夫禮儀判書。充江界都萬戶。敷施雄略。名聲益彰。升聞于朝。擢爲奉翊大夫密直副使義州副元帥。丙辰除密直副使上護軍。未幾徵還。丁巳除同知密直司使上護軍。是年爲西海道副元帥兼都廵問使。戊午除密直司使。僞朝錄其功。賜推誠協贊之號。尋遷密直司使上護軍。十月奉使如京。時太祖高皇帝。屢問孫內侍不復。使者皆力辭。公受命無難色。旣至闕下。專對敏給。公在京師。授匡靖大夫密直司使。己未還國。拜知門下事上護軍。是年拜知門下事商議會議都監事上護軍。庚申倭寇以戰艦千艘。侵我南鄙。所過殘滅靡遺。諸將皆不能禦。轉闘至龍安鎭浦。其勢甚張。僞主命公將樓船四十往討之。賊方舟而陣。鋒鏑磨戛。聲振天地。公略無懼色。一擧盡殲。自是倭寇不復跳梁。壬戌爲西北面都廵問使兼平壤尹。完葺城堡。功旣訖。甲子以判開城府事徵還。乙丑陞爲門下參贊。東北面有倭警。公受節銊討之。以門下贊成事朝京師。丙寅還國。封靑城府院君。戊辰之役。公從我太祖。師次婆娑府。太祖唱義旋師。公協贊翊戴居多。恭讓元年己巳。陞爲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都統使。旣登宰輔。常戒幹僕曰。我朝夕在公。凡書問副以物者。汝毋受 。諸子有除授。輒示其手足皸瘃。因戒之曰。我出入勤勞。方能臻此。汝曹何能坐致爵位。庚午中飛語謫兎山縣。事遂暴白。未幾徵還。辛未起爲左侍中。從恭讓子奭朝京師。壬申我太祖踐祚。追賞回軍諸將。公功第一。授判門下。追封靑城伯。甲戌城松都。公董治之。是年作新邑于漢陽。命公揔治其事。於是量期程計徒庸。曉之以義。使之以寬。民不病焉。丁丑除判門下。戊寅拜領三司。己卯改左政丞。庚辰以疾辭。復封靑城伯。食以一品祿。辛巳正月某甲。卒于第。享年七十四。訃聞太宗輟朝三日。遣中使賜祭賻有加。命有司以禮葬于麻田縣。贈謚▣▣。公禀性仁恕恬靜。喜慍不形。居處恭。無妾媵。不務生産。取與以義。由是爲將相二十年。庫無餘財。廩無餘粟。及卒僅備喪祭。其居官也。遇事剛果。略無私阿。其攻敵也。旣得其魁。未甞妄殺。其燕閑也。對卷蕭然。如文人雅士。初娶淸原君宋有忠女。先公終。生三子仁鳳,義龜,道生。生學浮屠法爲沙門。後娶監門衛郞將仁川門必大女。生四子澄,溫,淙,泟。溫丙寅科進士。淙尙太祖第二女慶善公主。我殿下在潛邸。太宗選溫第一女作配。旣卽位。册爲恭妃。此其終始哀榮之大槪。今玆太史氏編修實錄。以沈氏諸子皆幼。而予贅於其家。徵公行狀。當公之卒也。必有以文鳴世者。著其行述。重遭家難。不知落在何所。碩德懼公之崇功偉烈。將淪沒無傳。綴拾素聞。聊述萬一以進。朝奉大夫漢城少尹姜某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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