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달마산(達磨山)과 미황사(美黃寺)
달마산(達磨山)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송지면 서정리와 북평면 서홍리에 걸쳐 있는 산.
개설
달마산(達磨山)[470m]은 호남정맥에서 뻗는 기맥이 한반도 최남단으로 가기 전 해남군
남단에서 암릉(巖陵)으로 솟은 산이며, 송지천의 발원지이다. 달마산에 관한 최초의 지리지
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암군 산천조이다. 달마산은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도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산이었다고 한다.
달마산의 능선 길은 약 12㎞ 이상이 된다. 능선의 기암괴석이 아름다워 남도의 소금강(小金剛)
이라 불린다. 능선에 오르면 완도와 진도의 다도해가 조망되고, 날씨가 좋은 날은 제주도
한라산까지 조망된다. 산림청에서는 2002년 10월에 전국의 100대 명산으로 선정하였다.
명칭 유래
달마산은 인도의 승려이며 중국 선종의 비조인 달마대사(達磨大師)와 관련되어 산 이름이 유래
되었다. 달마산의 산 이름은 해남에서는 가장 오래된 산 지명이며, 인근의 두륜산(頭輪山), 완도
상황봉(象皇峰, 象王峰)과 함께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기도 하다.
자연환경
달마산의 봉우리는 관음봉, 달마봉[불썬봉], 떡봉, 도솔봉이 있으며, 주봉은 달마봉이다. 지층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설옥리층이며, 대표 암상으로는 시대 미상의 석영, 견운모편암, 박층의
규암, 암회색천매질암이다. 달마산의 기암괴석들은 미황사 사적비(美黃寺事蹟碑)[1692]에
기록된 창건 설화에서 “일만불이 다투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산자
락에는 작은 금샘과 큰 금샘, 총창샘, 용담, 방지가 있으며 수정굴, 미타혈, 용굴 등이 있다. 4월
초에 진달래가 만개한다.
현황
달마산 자락 송지면 쪽에는 미황사, 도솔암, 청주사 등의 사찰이 있다. 2017년 11월 18일
달마산 중턱에 남도 명품길 달마고도가 개설되었다. 2018년 11월 3일 미황사 일원에서 달
마고도힐링축제를 개최하여 달마고도를 찾는 등산객에게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였다.
달마고도는 미황사에서 시작하여 큰바람재, 노지랑골, 몰고리재 등 달마산 주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총 연장 17.74㎞의 걷기 여행길이다.
달마산 등산 코스는 다음과 같다. 1코스, 송촌마을-송촌1제-임도사거리-능선-달마봉[봉대]-
미황사[5.5㎞, 3시간 소요], 2코스, 미황사-달마봉-문바위재-작은금샘-대밭삼거리-하숙골재
-떡봉-도솔암-도솔봉[중계소]-마봉리약수터[9.2㎞, 4시간 소요], 3코스, 송촌마을-송촌1제
-임도사거리-능선-달마봉-문바위재-작은금샘-대밭삼거리-하숙골재-떡봉-도솔암-도솔봉-마봉
리약수터[12.2㎞, 7시간 소요]가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지명조사철』(북평면지명제정위원회, 1959)
『한국지명총람』16-전남편Ⅳ(한글학회, 1984)
『마을유래지』(해남군, 1987)
황도훈, 『국역해남지지류총람』(해남문화원, 1997)
『해남군지』상(해남군지편찬위원회, 2015)
「전남 해남군, 달마고도 17.74㎞ 18일 개통」(『프라임경제』, 2017. 11. 9.)
한국지질자원연구원(https://mgeo.kigam.re.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미황사(美黃寺)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達磨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조가 창건한 사찰.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
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
(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
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
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년
(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성간
(省侃)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년
(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
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
(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
(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이 중 미황사 응진당(美黃寺
應眞堂)이 보물 제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
로서 1598년 만선(萬善)이 신축하였으며, 1971년 주지 이하덕(李河德)이 일부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 등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
년에도 중수되었으며, 1982년의 수리 때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
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이 밖에 절 뒷산 사자봉
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
참고문헌
『전통사찰총서』 6(사찰문화연구원, 1996)
『한국의 명산대찰』(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뒤돌아서서 밧줄을 잡고 내려오는 코스네요












































































2021-01-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