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여름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비엔나에서 환상적인 하룻밤을 보낸 후 ‘해가 뜨기 전’, 각자 정해진 길로 떠나야 하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별을 준비한다.
“이걸로 끝이지?” “그래.” “알아.” “셀린, 우리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거…. 난 그러긴 싫어.” “나도.” “5년 후에 볼까? 아냐, 너무 길어 6개월 후 6시에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건 어때?”
비엔나 강에 떠있는 유람선 카페테리아, 그들이 함께 걷던 시내의 거리와 골목, 이름 모를 묘지, 첫 키스를 나눈 유원지의 대회전 관람차와 첫 사랑을 나눈 공원은 더 이상 비엔나의 풍경이 아닌, 제시와 셀린느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추억이다.
‘제시와 셀린느는 약속한 대로 비엔나 기차역에서 다시 만났을까?’라는 궁금증은 20년에 걸쳐 9년에 한 편씩 ‘비포 시리즈’를 내놓을 수 있는 원동력일지 모른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로맨틱 드라마의 원형에 가까운 캐릭터를 영민하게 창조해냈고, 제시 역의 에단 호크와 셀린느 역의 줄리 델피는 연기와 각본으로 스토리를 완성했다.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제시와 셀린느 같은 캐릭터가 당신의 이상형일지도 모르지만, 현실에 뿌리를 둔 당신은 쉽게 그들과 조우할 수 없는 것이 실제다. ‘비포 시리즈’의 스토리텔링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벗어나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로맨틱 드라마의 전형이다. 줄에서 떨어지는 순간, 극적 긴장감은 풀어지고 관객은 외면하고 만다. 관객은 극중 캐릭터가 나를 대신하여 자신이 꿈꾸는 러브스토리를 풀어주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한 판타지 순정만화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비포 시리즈’ 3부작 전편에서 대단히 사실적이며 독특한 연출 방식을 일관되게 선보인다. 스무 살 무렵의 제시와 셀린느가 처음 만나 사랑을 느끼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낭만적인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둘은 그 배경을 무대로 삼아 딱 하루 동안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를 돌아다니며 서로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한다. 신변잡기부터 삶과 철학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주제까지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말로 교감한다. 그들이 머무르거나 지나친 장소와 거리는 둘의 추억이 깃든 사랑이다. 9년이 지난 후 둘은 <비포 선셋>의 파리에서 재회한다. 그러나 두 연인이 살아온 <비포 선라이즈> 이후의 현실은 더 이상 패기와 이상으로 사랑을 그리던 20대가 아니다.
세상을 본인의 시선만큼 보고, 경험한 만큼 느낄 뿐이다. 제시는 관성적인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셀린느는 여전히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상처를 입었다. 어쩌면 각자 또 다른 사랑과 삶에 실패한 듯 보이는 30대의 이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갈구하듯, 파리 근교와 세느강, 셀린느의 집까지 산책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는다. 제시는 예전처럼 셀린느의 호감을 사기 위해 대화하기보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을 택한다. 어쩌면 본인의 삶의 경험을 통해 그만큼 더 그녀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시는 둘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사랑을 고백하고, 셀린느는 그 사랑을 노래로 고백한다. 그렇게 시간은 다시 9년이 흘러 마침내 3부작의 완결편 <비포 미드나잇>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리스의 어느 공항, 제시는 미국에 사는 엄마에게로 돌아가는 아들 행크를 배웅한다. 2013년 40대 제시는 예전의 세련된 모습이 아닌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약간 배가 나온 중년이다. 아들을 돌려보내는 제시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제시와 셀린느, 이전과 달라진 현실은 아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연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화를 나눈다. 서양 문화권에서 가장 이국적이고 로맨틱한 장소인 그리스에서 그들 대화는 아이들 양육 문제와 직업에 관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완벽하진 않지만 현실에 뿌리내린 커플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여전히 비포 시리즈의 스토리텔링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휴양지 테라스에 제시, 셀린느 커플과 그의 친구인 스테파노스 커플,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20대 젊은 커플인 아킬레아스와 애나, 그리고 노인 패트릭과 나탈리아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그리스 자연식 만찬을 즐기며 대화를 나눈다. 20대부터 70대까지의 커플들이 한자리에 모인 흔치 않은 광경이다. 언제나처럼 사랑과 삶에 대하여 쉴 새 없이 떠든다. 비포 시리즈가 시작된 이래로 시간과 장소가 바뀜에 따라,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도 나이가 들었지만 변하지 않는 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파리의 세느 강변, 오랜 시간이 묻어 있는 그리스의 자연이다. 시간은 영원하지만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바꿔 말하면, 처음 시작은 순간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공간 속에 남아 있는 제시와 셀린느의 추억은 영원하다. 서로의 관계 속에 남아 있는 상처와 사랑처럼.
셀린느는 제시에게 묻는다. “만일 지금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내게 기차에서 내릴 거냐고 물어볼 거야?” 제시가 어떤 대답을 할까. 영화를 이루는 스토리텔링의 기능 중 하나인 ‘대사’를 이만큼 잘 활용한 영화도 드물다. 로맨스의 위대한 유산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처럼 ‘비포 시리즈’를 또 하나의 장르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90년대 배낭여행 세대와 함께 자란 제시와 셀린느 커플이 앞으로 있을지 모를 <비포 더 돈>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성장해 있을지 기대된다. 그들의 나이와 함께 더욱 아련하고 노련해질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