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12호BC 1480-BC 1400 |
바로가 이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무물 곁에 앉았더라" (출2:15 ) | |
――――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신문 ――― |
오늘의 세계표정 바로의 정치적 핍박과 모세의 망명 굳어져 가는 바로의 통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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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치적 망명길에 오른 모세 |
모세, 정치적 노력이 헛사가 되다. -모세의 망명 어떻게 볼 것인가?-
(BC. 1480년경) 모세가 얼마 전 야밤을 틈타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탈출했다고 한다. 이미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던 모세는 그 어머니 공주의 도움으로 급히 말을 몰아 홍해를 건너 미디안 광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시위대장은 "그는 국가 반역 및 살인죄로 기소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잡히게 되면 사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밝히며 누구라도 그를 숨겨주거나 내통하게 되면 동일한 벌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궁정특별수사대는 모세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알고 히브리인들을 충동하여 모반을 꾀하려 하였으며, 이 일 중에 애굽인 공사 감독관을 살인하여 암매장하였고, 그의 동족들이 그의 뜻에 크게 동조하지 않자 일이 틀어진 줄 알고 국경을 넘어 탈출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이미 국제 경찰조직인 인터폴이 그를 검거하기 위해 모세의 뒤를 추격하고 있으며, 그가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사진:모세의 잠적지 시나이광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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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山에서의 모세
-모세의 선택은 불가피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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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480,미디안 연합)-한편 애굽인을 죽인 것이 탄로 나자 동족에게서 배신감을 느끼고 도 망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족 해방 자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굳게 믿었으나 그러한 기대가 산산이 부수어지는 것을 느끼며, 일이 틀어진 것을 안 그날 왕궁을 떠나 모래 언덕 저편으로 황급하게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는 급히 나오느라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혈혈단신 몸뚱이만이 광야에 내던져진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바로는 군사들과 경찰조직을 풀어 그를 검거하려고 광야로 따라왔다.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모세는 "나는 정말 동족들의 고통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고 순수하게 그들을 돕고 싶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후회하는 빛을 보였다.(사진, 시내산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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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사라진 애굽 왕궁은 권력다툼에 휩싸이다 -권력 다툼은 장기적으로 끌게될 공산이 크다고-
고대 애굽은 크게 왕조 이전 시대와 왕조 이후 시대로 나뉜다. 왕조 시대는 대략 3200년 이전 시대를 말하고 그 이후를 왕조 시대라고 하는데, 왕조시대도 크게 세 시대로 나눈다. 모세가 탈출한 애굽의 왕궁에서는 왕자들 중의 하나가 사라지자 후계구도를 놓고 다시 치열한 권력다툼에 들어갔다고 왕궁 출입기자들이 전했다. 당시 애굽은 힉소스 왕조를 몰아낸 제 18왕조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초대 왕은 아흐모세 1세 이었다. 그는 25년간 재위하고 아문호텝 3세를 이어 툿트모세 1세가 BC 1525년에 재위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 많아 늙었고, 그를 잇게 될 후계자에 대해 정치적인 이해 집산이 어지러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중의 한 관계자는 "이제부터 또다시 피 비린내나는 골육 상쟁의 권력다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라며 안타까워하였다. (사진은 모세 당시 애굽의 바로인 투트모세1) |
현재 중국에선 은나라의 천하평정
(기원전 1500여년경, 중국)-중국을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이 만연한 가운데 최근 하왕조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하남성을 근거지로 한 중국을 통일하여 은나라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동안 폭군 걸왕으로 인화여 흉흉하던 민심이 일순간 잠잠해지긴 했지만 또 왕이 돌변하여 폭군이 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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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계십니까?
철기시대<Iron Age>(鐵器時代)
석기·청동기·철기라는 시대구분은 지극히 기술사적인 시대구분이다. 철의 야금술의 존재는 철기와 쇠똥(슬래그), 목제품에 보이는 철제의 흔적 등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즉물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점에서 철기시대란, 유물·유적을 다루는 고고학자들에게는 편리한 시대구분이다. 그러나 기술사적 시대구분은, 문화 전반을 파악한 뒤의 시대구분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철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점차 감소되고 있다.
【철기의 성립】 철은 구리나 주석과는 달리 사철(砂鐵)·운철(隕鐵:隕石)·광석의 형태로서 지표상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최초로 사용되었던 것은 운철로서, 이집트 제4왕조나 오스만 투르크의 아라자 유구(遺丘:청동기시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운철을 사용한 장신구, 드물게 보이는 단검류는 BC 3000년대 이래 제작되기는 하였으나 고온의 노(爐)가 없었던 것과 원료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량생산은 불가능했고, 또 가격도 황금의 몇 배 이상 되는 귀금속이었다. 또 철광을 제련하여 얻은 괴철(塊鐵)에서 소량의 연철(鍊鐵)을 얻었으나 연철은 약해서 청동보다도 사용가치가 뒤졌다. 그 후 목탄(木炭)과 접촉시키면서 가열하고 작은 망치로 두드리면서 탄소와 화합시켜 강인한 철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이 기술은 BC 15세기경 아르메니아 지역과 소아시아 서부지역에서 개발되어 미타니인(人)과 히타이트인(人)에게 전해졌고, BC 13세기경에는 당시 진행중이던 민족이동 경로를 따라 각지에 보급되었다. 강철은 무기·농구의 재료로 청동보다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하여 이 기술이 전파된 곳에서는 도처에서 철기시대가 열렸다. 남러시아 지역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의 철기문화는 이러한 강철 제조 기술에 기반을 두고 발달하여 소아시아·아시리아·중국 북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기마민족 문화를 형성시켰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인 BC 4세기 초부터 이기(利器), 특히 무기가 철로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전한(前漢)시대에는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기술혁신의 여파는 한반도에도 미쳐 고대국가 형성에 절대적 공헌을 하였으며, 일본에도 파급되었다.
【철기의 영향】 철제품의 출현은 장신구·용기 등에 대한 청동의 대량 사용을 가능케 했다. 서민 출신의 병사들도 철제 공격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의 발언권 또한 증대하였다. 철제 공구(工具)는 삼림의 대규모 벌채를 가능하게 하였고, 또 철제 농구(農具)는 일정 시간 내에 보다 넓은 경작지를 보다 깊이 경작하는 일과 소택지(沼澤地)를 관개(灌漑)하는 일을 용이하게 하였다. 철제 등자(子)의 고안은 기마민족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고, 또한 각 지방에서의 철 생산지의 출현은 물자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한국의 철기시대】 중국에 유입되어 발전된 철기문화는 BC 4∼BC 3세기경에 이미 한반도로 유입되던 이주민들을 통해 한국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철기뿐만 아니라 중국 계통의 청동기도 함께 전래되었다. BC 2세기 초 위만(衛滿)조선의 성립으로 대동강 유역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가 공존했으며, BC 1세기 말 한군현(漢郡縣)의 설치와 함께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철기시대가 발달하여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의 북방지역 부족국가와 삼한이 지속되던 남방지역 부족국가에 급속히 전파되어 철기 부족국가 형성에 기틀이 되었다.철기문화는 1세기경에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뒤이어 백제·신라의 3국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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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와 히타이트법전 |
문학작품으로서는 쿠마르비의 전설과 하실리시의 작품으로 알려진 《제왕감(帝王鑑)》이 특히 유명하다.
히타이트인은 소아시아 이주(移住) 후 얼마 안 되어, 후르리인이나 아시리아인에게서 설형문자와 말[馬]전차(戰車) 등을 배웠다. 왕국의 정치는 처음에는 지방분권적이었으나, 신제국 시대에는 중앙집권화되었다. 사회는 왕족·귀족·사족(士族)·농민·노예로 나뉘고, 개인의 생활은 가부장제도(家父長制度)에 의하여 지배되었다.텔 리피누시왕에 의하여 편찬된 히타이트 법전(法典)은 형법·가족법·민법·상법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형벌은 대체로 엄한 편이 아니었고, 함무라비법전에 비하면 배상에 의한 화해(和解)의 정신이 강하였다. 예술활동은 주로 신제국시대 이후에 나타났으며, 부조(浮彫) 조각작품에 뛰 어난 것이 많았는데, 특히 투드할리야시 4세에 의하여 야지리카야의 암벽에 새겨진 신들의 행렬은 히타이트인의 민족성을 나타낸 웅장한 작품이다. 문학작품으로서는 쿠마르비의 전설과 하실리시의 작품으로 알려진 《제왕감(帝王鑑)》이 특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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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문명이 꽃을 피우다.
독일 고고학자들이 사상 처음으로 3천2백50년전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궁전을 발견했다고 -지중해와 에게해가 교류의 중심지가 되다-
(기원전 1300년경)-에게해를 중심으로 동남북쪽의 제국들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에게문명을 이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에서 처음 일어난 오리엔트 문명은 애굽을 거쳐 지중해와 에게해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 문화가 도입되어 헬레니즘 문명이 형성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BC 1760년경 이미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지고 인도에서는 베다경전이 만들어지는 등 고대세계는 점점 문명이 발달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문화들이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문명이라는 사실은 경건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 만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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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와 바벨론의 원전들
수메르 사람들은 신석기시대 이후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계곡에 정착하여 여러 개의 도시 국가들을 형성하였는데 각 도시 국가들은 각각 자기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10장에 이런 것들이 약간 언급되어 있는데 카쉬("구스"라고 잘못 기록된 곳이 많음) 바벨, 에렉, 악갓 등이 바로 그들이다. 창세기 10장과 또 다른 성경 구절들에 보면 성경은 셈족어인 시날이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수메르를 이르는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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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오리엔트의 역사와 민족 |
성경의 무대가 되고있는 오리엔트 역사에는 실로 많은 민족이 등장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역은 셈족, 이집트 문명의 주역은 함족이다. 이 두 민족은 비슷한 뿌리였음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셈 함족이라고 해서 언어가 유사하다. 또 이러한 증거는 히타이트와 페르시아 민족 사이에서도 보인다. 이들의 언어는 인도, 유럽계 어족이다. 여하튼 결국 이들의 뿌리가 하나라는 성경의 증거가 일치하는 것이다.
◀역사와 문화▶오리엔트라고 하면 인도의 인더스강 서쪽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펼쳐져 있는 지역. 이란·메소포타미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소아시아 및 아라비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지방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중해의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의 의미로 특히 동부 아시아(동양)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어원은 라틴어의 오리엔스(Oriens)로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 ‘동방(東方)’을 뜻하며 로마인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동쪽을 가리켜서 오리엔트라고 불렀다. 따라서 유명한 라틴의 속담 ‘빛은 동방으로부터’의 동방은 그리스 지방을 가리킨다. 이에 대하여 해가 지는 서방(西方)은 옥시덴트(Occident:라틴어로 ‘해 지는 곳’이라는 occidence에서 유래)라고 하였다. 오리엔트 지방은 대부분이 불모의 사막 또는 산악지대로, 오늘날에는 후진지대를 이루나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집트 문명 등 세계최고의 고대문명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이후는 동서문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왔으며 세계사상으로도 큰 역할을 해왔다. 7세기부터는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였고 근대는 고난의 길을 걸어왔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는 국제정치상으로도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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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서 그들은 과연 고귀한가? "아리아인의 유라시아 제패"
(BC 1300년경) 최근 이란과 이라크와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넘보고 있는 아리안 족에 대해 최근 그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들은 원래 기마 인 족으로 "고귀하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아리아'라고 불렸다. 원래 유목민족이었지만 세력을 얻게 되자 그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고대에 이루어진 문명들이 거의 다 파괴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유라시아의 판도는 이들에 의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아버린 것이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고대문명이 거의 다 파괴되었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그들로 인해 새로운 문화의 구조가 짜이게 되었다는 긍정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인도와 이란은 이들에 의해 거의 지배되어지고 있다. 현재도 게르만족과 이란은 서로가 아리아 족의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선민사상은 유대주의와 부딪혀 결국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끔직한 일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반유대잡지의 표지 포스터)
성경용어이해 "여호와"
여호와라는 명칭은 성경의 초기에서부터 (창4:1) 나타나는데 그 구절들은 사람들이 그 명칭을 알았고 또 실제로 불렀음을 암시하고 있다(예,창 4:2614:22).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모세에게 (출6:2-3)"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아브라함 등) 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전문적인 구약성경 연구는 이에 대하여 오랫동안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 관하여 여호와라는 고유명칭이 초장기부터 알려진 것으로 되어 있는 전승과-그와는 대조적으로-그 고유명칭이 모세 에게 처음 알려졌다는 전승을 각각 대하고 있다는 답변을 해왔다. 이 가설은 비록 영향을 미치긴 했을지라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갖는다는 의미를 벗어나서 그 알게 된 대상과 능동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즐긴다는 뜻을 갖는다. 예를 들면, 엘리의 아들들은 분명히 그 이름을 하나님의 "호칭"으로 알았으나 그들은 "여호와를 존중하지 (문자적인 의미로는 '알지') 아니하였다. (삼상 2:12,그리고 3:7,출33:12-13을 대조하여 보라). 그러므로 출애굽기 6:2-3은 우리에게 이제까지는 그 명칭이 하나님을 부르는 한"호칭"의 의미로 밖에는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나 지금은 그 명칭을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 혹은 특성에 관한 진술 곧 그는 자기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시는 거룩하신 구속자요 심판자라는 진술로 알려지게 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출애굽기 6:2-3의 의미에 관한 이 견해는 창세기의 증거들에 의해서 확증되고 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여호와는 누구이신가?"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전능하신 하나님" 혹은 족장들이 사용하던 하나님의 다른 명칭들 중 하나로 대답하였을 것이다. 엘 쉬다이(EL SHADDY) 쉬다이는 필시"산"을 뜻하는 말로서 인간의 무력함과 대조를 이루는 산의 불변성과 항구적인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것이다.그 예로서 창세기 17:1이하 28:3 이하 창35:1143:1448:349:25을 보라.
엘 엘욘(EL ELYON)"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세기 14:18. 엘 로이(EL OLAM) "영생하시는 하나님."창세기16:13 엘 올람(EL OLAM) "영생하시는 하나님,"창세기 21:13. 엘 벧엘(EL BETHEL)"벧엘의 하나님",창세기 31:13 엘 엘로헤 이스라엘(EL ELOHE YISRAEL) "하나님,이스라엘의 하나님."창세기 33:20.그러므로 출애굽기 3장에서 여호와가 "네 조상의 하나님"(6,13,15,16절) 으로 언급될 때 이 다채로운 의미들 전체가 "거룩하신 구속자"로서의 새로운 계시에 첨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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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문화
신석기 시대와 성경
기원전 5000년경 질그릇이 발명되니 고대의 새로운 시대인 신석기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 중에서 이 시대의 발전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여리고 이다. 기원전 8000년경 중석기 시대의 사냥하던 부족들이 여리고의 우물 부근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서서히 그들은 자기들의 집을 유목 생활의 임시 거처로부터 진흙 벽돌로 지은 집으로 발전시켰으며 간단한 관개 시설을 갖춘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 후 여리고에서 신석기시대의 네 기간이 구분되어 있으니 둘은 질그릇이 생기기 이전 시대였고 둘은 질그릇이 생긴 이후 시대였다. 첫 번째 기간은 평화로운 시대였으나 나머지 세 기간은 그렇지 못하였다. 사실은 첫 번째 신석기 시대는 대형 방어벽들을 건축하던 시대로 특징지을 수 있으니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리고에는 성벽이 무너져 내린 후 전혀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다. 질그릇은 아직도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나 고도의 예술 감각을 가지고 있었음 분명하다. 여리고 사람들은 사람의 두개골에 진흙을 바르고 눈에는 조개 껍질을 붙여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상숭배의 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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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에서 종교사업 번창 중
-시작만 하면 떼돈 번다는 말이 들리자-
(기원전 1300년경)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사업은 언제나 불경기가 없는 전천후 사업인 것 같다. 바벨론 에서는 현재 사업이 대기 번창 중이라고 한다. 현재 바벨론 사람들의 생활은 종교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거리 곳곳에는 신이 나타난 곳, 신께 기도 드리는 곳, 신의 이름으로 자비를 베푸는 곳 등, 신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여행자들은 전하고 있다. 특히 광장의 한 벽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시여! 내게 호의를 베풀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기도문을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바벨론 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모시고 가서 장사하는 일도 생기고 있다고 하는 기막힌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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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신문 미술관
그림감상 : 하나님의 손 : 타울의 악화가 작품. 다섯길 원한(후광)으로 둘러져 있는 하얀 공간의 중앙으로부터 소매를 늘어뜨린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축복하고 있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상은 로마네스크의 성당의 내외에 그 전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만. 그리스도 출현이전의 시대. 곧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출33:20-23에 하나님이 "너희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그것을 예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출 20:4-5). 이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 만을 묘사하게 되었다. 신약시대도 하나님은 음성으로서만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셨지만. 이 때에도 그림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경우는 손(보통 오른손)으로서 표현된다. 이 타올의 벽화의 손을 같은 교회에 있는 한 벽화(전능자 그리스도)와 같은 화가가 그린것이 틀림없으며 그 윤곽과 하일라이트의 산뜻한 묘사를 통하여 표현된 정신 내용은 일견 단순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고 있으면 참으로 풍부함이 느껴진다.1123년 작품.142*142cm.스페인 카탈루냐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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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의 소금길
고대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식료중에 하나가 '소금' 소금은 고대 대상들의 중요한 교역물품중의 하나였는데, 지금도 프랑스에는 이러한 소금길이 해안을 따라 있어 그 당시의 소금의 교역정도를 엿보게 한다. | |
한자속의 성경
鬼마귀+林두그루의 나무+
위장,덮개 ⇒마귀가 뱀으로 위장하여 두그루의 나무에서 하와를 유혹 함. 창세기 3장1절이하. 유혹,악마마 | | |
관련사이트 ▶http//www.kcm.co.kr/bible/exo/exo010.html
▶http//www.fordham.edu/halsall/ancient/asbook04.html#General
▶http://members.aol.com/crakkrjack/font/index.html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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