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2/ 1984, 날씨 모름
-Son plátanos los abogados…….(변호사…… 모두 바나나 같은 놈들이지.)
안헬은 몇 번의 대화로 내 나이를 짐작했는지 슬슬 말을 놓기 시작한다.
¿Plátanos?(바나나요?)
-Sí, plátanos……. Es decir, son chuecos.
(그래, 바나나……. 바나나처럼 굽었다는 얘기야.)
Mi amigo Sergio no es así. (세르히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De todas maneras creer es bueno.(그래, 믿음이란 좋은 거야.)
Hasta aquí, hoy……buenas noches.(오늘은 여기까지……. 잘 자게.)
Sí señor, buenas noches.(네, 잘 주무세요.)
안헬의 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석방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쉬 눈꺼풀을 닫지 못한다.
여기서 나가면 중세 식민지 풍 도시, 타스코를 가볼 생각이다. 지지난 해 크리스마스를 그곳에 사는 친구 후안의 집에서 보냈다. 우린 하나밖에 없는 마을학교 운동장에서 쿰비아를 추며 밤을 보냈다. 유쾌한 성격의 오빠 후안을 닮은 말래나는 내가 춤을 못 춘다고 하니까 손을 당기며 오른쪽, 왼쪽, 밤새 춤을 추자했다. 빠른 템포의 메랭개가 흘러나와 마을 춤꾼 빠꼬에게 그녀를 건네기까지 흠뻑 젖도록 난 춤을 추었고, 다들 그런 나를 위해 박수까지 쳐주었다. 파티는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돌아오던 길, 캄캄한 마을길로 접어들자 힐끗힐끗 내 몸을 궁금해 하던 말레나가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무작정 내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키스에 서툰 난, 이빨들을 부딪게 만들었지만 그녀의 입술은 좀처럼 내 혀를 풀어주지 않았다. 마지막 단추를 못 잠그게 만드는 그녀의 젖가슴은 나를 숲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한 손으론 옷을 벗고 다른 손으론 내 옷을 벗겼다. 뭔가 뒤바뀌고 있는 느낌이지만, 중남미에선 낯선 풍경이 아니다. 콜롬비아에선 한 때 남자들을 납치해가던 아마조나(Amazona)들이 있었고, 파라구아이에선 30년 전쟁으로 남자 씨가 말라 일부다처제를 공인한 적이 있었다.
드르륵…… 귀에 익은, 그토록 고대하던 식판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깬다.
감격스럽다. 크리스마스 날엔 밥을 주는구나. 놈들도 신은 믿는구나. 닭고기 수프에 토르띠야 석 장, 오렌지주스 한 잔이 전부지만, 일용할 양식이 이토록 고마울 줄이야. 난생 처음 형식적으로만 읽던 주기도문 한 줄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허기가 가시니 외로움이 밀려온다.
안헬 말대로 세르히오는 돈을 가로챘을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쯤 독방신세만은 면하고 있어야할 텐데.
팔을 애무한다. 세발낙지처럼 오그라든다. 목에 뿌리를 둔 혀건만 목은 핥아주지 못한다. 오늘밤 난 나의 애인이 되고자 입에다 발가락을 집어넣고 공벌레처럼 몸을 말지만, 해 뜨면 팽팽한 밧줄을 불룩한 아담의 사과에다 걸, 면회 금지된 죄수인양 캑캑거린다. 외로움은 긁어내도 한없이 삐져나오는 물. 누가 나대신 목 좀 빨아주지……. 머리를 돌려주고 몸통을 돌려주는 목, 아직도 붙어있는 이 고마운 목을 위해 뉘 끈끈한 타액을 발라주지…….
12/ 01/ 1985, 맑음
신음의 주인공이 실려 나가던 날, 나 역시 다른 죄수 몇몇과 함께 호송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인수르헨테 노르테, 멕시코시티 북쪽경계지역이다.
한 시간 쯤 온 듯하다. 차는 고색창연한 중세 식민지 풍 건물 앞에 멈춘다. 중앙 대리석 석판에 고딕체로 CORTE(법원)이라 새겨져 있다.
석방은 물거품이 돼버리고 난 첫 번째 공판을 받기위해 법원에 실려 온 것이다.
내부는 성당분위기다. 천장이 높고 문들은 육중하다. 방청석의 긴 나무벤치들은 빤질빤질, 연륜이 있어 보인다.
법정이 꽉 찼다. 그러나 방청객은 별로 없고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들이 대부분이다. 법복을 입은 판사, 말끔히 검정 라운지슈트를 차려입은 검사, 하지만 변호인 자리는 비워있다.
난 반사적으로 일어나 내 변호인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말한다. 못 들었는지, 아님 무시하는 건지, 판사는 일자모양의 입을 둥글게 말곤 재판의 시작을 알린다. 정리들은 몸을 일으키려는 날, 강제로 주저앉혀버린다.
내 사건은 두 번째. 첫 번째 사건의 피고는 여성인데, 재판 내내 울기만 한다. 아니 뭐라고 말을 늘어놓건만 한 마디도 귀에 안 들어온다.
덩그렇게 비워 있는 변호인석 밤색 가죽의자는 나를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다. 낯선 시장바닥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켱훈캉’ 듣고 들어도 익지 않는 내 이름, 몇 번이나 불리도록 시큰한 두 눈을 출입구로부터 떼질 않는다. 판사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느냐는 간단한 물음에도 멍하니 답을 못 한다.
첫 공판이건만 인정심문만 하는 게 아니다. 검사의 논고까지 있다. 콧수염을 기른 빼빼 마른 검사는 결코 낯설지 않은 종이조각을 흔들며 소리친다. 하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걸로 봐, 내 사인에 관해 떠드는 모양이다.
난, 위조된 것이라고 말하려들지만 옆에 있는 정리 놈이 또 다시 주저앉혀버린다.
법정에서의 스페인어는 딴 판이다. 주어, 동사 정도만 겨우 들리니, 마치 자막처리 안 된 외국영화 보는 것 같다.
콧수염의 검사가 ocho años (8년)이라 내뱉자, 뱅글, 도수 높은 안경을 낀 판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8년! 순간, 심장이 다리 쪽에 가 붙는 듯하다. 선고형도 엇비슷할 텐데.
14/ 02/ 1985, 맑음
최후진술을 스페인어로 준비하느라 꼬박 밤을 샜다. 첫째, 죄가 없다. 둘째, 자백하지 않았다. 셋째, 내 변호인, 세르히오는 어디에 있느냐……. 각 항목에 대한 이유와 설명을 꼼꼼히 정리한 뒤 모두 암기를 했다. 하지만 안헬과는 상담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냉소적일 것이며 그 부정적 뉘앙스는 결국 내 사기를 저하시켜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할 것이란 생각에서다. 안헬은 대쪽이다. 그가 이곳 멕시코 출신이라는 것, 정말 믿기 힘들다.
초췌한 모습으로 다시 법정에 섰다. 태어나 이토록 긴장되던 날은 일찍이 없었다. 준비해온 최후진술을 몇 번이고 되뇐다. 하지만 판사는 숫제 날 쳐다보지도 않고 준비해온 판결문만을 읽어나간다.
-De todas maneras es evidente la prueba
y no hay ninguna duda de que
el acusado ha cometido los siguientes crimenes. :
robo, fraude, falsificación de documentos y violación
a las reglas de inmigración etc.
Al fin, esta corte sentencia al ausado,
Kyung Joon Kang, 27 años, de nacionalidad surcoreana,
a una pena de cinco años de cárcel.
(피고인이 아래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은
그 증거로 봐 명백하다.
아래: 형법상 절도, 사기, 공문서위조 및 동행사죄,
기타 이민법위반.
결국, 이 법원은 피고 강경준,-27세, 국적 한국-을
5년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바이다.)
죽도록 달려왔건만 막차가 떠나버린 느낌. 아니, 이건 아예 있지도 않은 차를 타기 위해 목숨을 다해 달려온 뒤에 느끼는 허망함.
난, 텅 비워져가는 판사석을 향해 밤새 외운 문장들을 목이 터져라 외친다. '죄가 없다. 자백하지 않았다. 내 변호인, 세르히오는 어디에 있느냐……'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하는 재판이니, 모든 것이 허울일 뿐이다. 남궁 과장이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독한 황금만능주의자들……. 세르히오란 놈은 나에게서 더 이상 돈이 나오지 않을 거란 걸 눈치 챘겠지만, 판사나 검사 놈들은 아직도 나에게 돈줄의 희망을 걸고 있는 듯하다. 세르히오의 배신은 내 옥살이가 오랜 기간, 최소한 놈이 이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될 거란 사실에 근거한 것. 놈은 거리의 십자로 빨간 신호등 앞에서 성호를 그어대겠지. ‘하나님, 이 불쌍한 양이 오늘 저지른 죄를 어제처럼 용서해주십시오……. 일곱 번, 아니 일흔 번도 더 용서해주십시오.’
항소를 할 수 있지만 결과는 빤할 것 같다. 변호인 없이 절차를 밟는 일도 불가능할 것 같고.
오후 늦게 주영사의 면회가 있었다. 그의 입에선 잘 지네길 바란다는 극히 형식적인 말들만 쏟아져 나왔다. 업무일지에는 멕시코 어느 유학생의 구금사건 진상파악을 위한 면회 등으로 거창하게 적힐 것이고.
첫댓글 그새 해가 바뀌었네요. 1985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