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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이씨 임진왜란 의인 16명
청안 임난 의사12인 제막식 문천회맹 장소
1,이계수 (李繼秀 1567-1637)
영풍정 선무원종공신2등
청안인 자는 한서 호는 영풍정 증공조참의 응진의 아들로
경주 외동 입실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응진(李應軫)이고, 모친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이영경(李永景)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침입하자 삼종제(三從弟)인 이눌(李訥)에게 “마땅히 힘을 합쳐 왕실을 보존하고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고는 동해 우산령(牛山嶺)에서 창의하였다.
1598년(선조 31)에 용양위부사직(龍驤尉副司直)에 제수되고,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1634년(인조 12)에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승자(陞資)되었다.
임란때 숙부 응벽과 함께 창의하여 호를 능마장 이라하니 경주판관 박의장이 의병장으로 삼았다 동년6월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이어서 동해안 양남면의 우산 공암과 울산의 개운포 서생포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동년8월에는 경주성 수복전에 참전하여 공을세웠다 계사년(1593) 10월에는 울산의 구강회맹에 참가하고
그후 울산의 태화강 연포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세웠다
1596년 1월 외동 모아전투에서 격전중에 부상을 입엇으나 동년9월 다시 일어나 대구 팔공산회맹에 참가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울산으로 출전하여 도산성전투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 이러한 공적으로 용양위부사직에 재수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눌의아들)삼종질(三從姪) 이주천(李柱天)과 함께 다시 창의 하였다 여러 의사들과 서사보국하기로 결의하고 금천(과천)에서 진을펼쳤다 이듬해 1월 한강에 이르러 강화소식을 듣고는 분함을 참지못하여 낙마하여 순절하였다
저서로 『영풍당실기(詠風亭實記)』가 있는데 모두 3권 1책으로 편집되었다.
그 중에서 잡저인 「용사일록(龍蛇日錄)」과 「병자일록(丙子日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시대적 정황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詠風亭實記 동경지 울산의충의정신 慶州邑誌
2, 이눌(李訥,1569-1599)
낙의재 선무원종공신1등
청안인 자는약우 호는 낙의재 경주시 외동읍 개곡리에서 태어났다
임란때 종숙 응춘과 제종인 승금 삼한 ,오심 오열 견천지 박의장 류정 김응생 김용하 아들 홍엽 홍찬 홍위등 과 더불어 창의 하였다
이눌(1569-1599)은 외동 개곡에서 창검을 만들어 전란에 대비하다
4월 18일 김응하(1533-1598)와 함께 거병하였다. 그리고 김득복(1561-1626)은
17일 양북 어일에서 동생 득상과 의병을 조직해 올라오다
경주성함락 소식을 듣고는 불국사에서 이눌과 합류했다. 이는 흔히 최초의 의병으로 알려진 곽재우가 의령에서 22일 거병한 것에 비해 수일 빠른 것이다.
이눌은 천사장이라 자임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경주의남천 등지에서 진을치고 방어 하였다
동년 4월28일 김응하 김득복등과 개곡 전투에 참여 하였고
5월27일 최진립 손엽 권사악 진남장군 김응택 김득복 황희안 박춘석 등
의사들과 합류하여 계연에서 적을 무찔렀다
동해안 양남면 나아 석읍 우산 등지의 요해처에서 침입하는 적을 섬멸 하였다
임진년6월 9일에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동년 7월에는
영천성 탈환에 참전하여 분전 하였다
계사년2월 태화강전투에 참여하고 동년10월에는 울산의 구강회맹에도 참여 하였다
1596년 9월28일 2차 팔공산회맹에 오경우 김응하 김종원등과 함께
의병 800명을 이끌고 적을 물리쳤다
《낙의재공일고(洛義齋公逸稿)》는 이눌(李訥 ; 1569~1599)의 일고이다.
이눌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으로 자는 약우(若愚), 호는 낙의재(樂義齋)이다.
경주 출생으로 아버지 신정(新貞)밑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유교 경전의 뜻을 탐구하였다.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東萊) 함락의 소식을 들은 지 4일 만에 거주지 경주에서
‘천사장(天使將)’을 칭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동령(東嶺)·효령(孝嶺)·
나아령(羅兒嶺) 등을 지켰으며, 석읍동(石邑洞)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계속하여 화담(花潭)·나아곡(羅兒谷)·영지(影池) 등에서 적군을 격파하였으며,
권응수(權應銖), 최덕량(崔德良)이 지휘하는 부대와 합동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1596년 9월에 휘하 500명을 이끌고 대구로 가서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연합하였다.
1597년 화왕(火旺)에서 곽재우(郭再祐)와 만났고, 통제사 원균(元均)이 패전한 후
월성(月城)으로 부대를 옮긴 후 대구에서 전투를 벌이다 부상하였다.
이눌 진주성 참전
(宣祖朝故事本末)
1592년 10월 10일 사경에 적이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바리가 나가서 거짓 돌아가는 모양을 보여 아군의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그런 뒤에 불을 끄고 가만히 돌아와서 동문 새성[新城]을 육박하여 허수아비에 근접하여 사다리로 올라와 아군을 속이고 말 탄 왜적이 뒤따라 돌진해서 총알이 비오듯하였다. 시민은 동문 북장대에 있고 판관은 동문 옹성에 있다가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죽기로 싸웠다. 포를 쏘고 돌을 던지고 불을 던지고 끓는 물을 퍼부으니 적이 마름쇠를 밟고 화살ㆍ돌멩이에 맞은 자가 수 없었고 쓰러진 시체가 삼[麻]가리 같았다.
바야흐로 성 동문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적이 어둠을 타고 가만히 와서 돌연히 옛 북문에 이르러 형세가 급박해져 왔다. 성첩을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전 만호(萬戶) 최덕량(崔德良)과 군관 이눌(李訥)ㆍ윤사복(尹思復)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전하는데 노약자와 여자들도 역시 돌을 굴리고 불을 던지고 하여 성중에 기와ㆍ돌멩이ㆍ지붕 덮은 짚들이 거의 다 없어졌다. 동녘이 밝아지자 적세가 약간 약해졌다. 이때 시민은 왼쪽 이마에 탄환을 맞아 일을 살피지 못하고 곤양 군수 이광악이 대리로 지켜 용맹을 떨치고 힘껏 싸워 왜장을 쏘아 죽였다. 진시와 사시의 중간쯤에 적이 물러갔다. 죽은 자는 셀 수 없었는데 적들이 끌어다가 불태워 버렸으므로 머리를 벤 것은 겨우 30여 개이며 적이 물러간 뒤에 불사른 뼈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왜장의 시체는 상자에 담아갔으며 우마와 포로로 잡았던 우리 남녀들은 버리고 도망갔다. 시민은 탄환을 맞고 장사들은 힘이 다하여 추격하지 못한 것을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진주성의 수성군 병력 배치.
직함 주장 수성군(守城軍)
진주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 중위장(中衛將)
진주판관(晋州判官) 성수경(成守慶) 동문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100명
전 만호(前萬戶) 최덕량(崔德良) 구 북문(舊北門/守城代將)
영관(領將/軍官) 이 눌(李訥) 구 북문(舊北門)
율포권관(栗浦權管) 이찬종(李纘宗) 남문(南門)
군관(軍官) 윤사복(尹思復)
함창현감(咸昌縣監) 강덕용(姜德龍)
...........................................................
合計 : 3,800명(진주성민 수만 명은 별도)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치계하였다.
“진주(晉州)의 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힘써 장사(將士)들이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적을 물리치고 성을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제서야 비로소 성지(城池)에서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공이 지극히 큽니다. 적은 창원(昌原)에 주둔하고 있는데 바야흐로 다시 침범할 계획으로 호남(湖南)으로 향하고 있으니 흉계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공이 있는 장사들에게는 따로 포상하는 은혜를 더 하시어 뭇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여 뒷날의 성과를 바라소서.
중위장(中衛將)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은 본래 군사와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성을 수호하고 적을 물리친 것이 모두 그의 공로입니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고을의 날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김시민과 함께 군주의 성을 지켰는데, 8일에 김시민이 ‘아마도 성을 온전하게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몰래 수문(水門)을 열어서 노약자(老弱者)를 내보내야겠다.’고 하자, 이광악이 ‘이와 같이 하면 군사들의 마음이 크게 변하여 성을 수호할 수 없다.’고 하면서 큰소리로 말렸으며, 김시민이 탄환에 맞은 뒤에는 혼자 한 모퉁이를 담당하여 왜적을 쏘아 죽이고 마침내 적을 물리쳐 성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판관(判官) 성수경(成受慶)은 적이 성에 오를 도구를 많이 준비하여 처음부터 동문(東門)을 오로지 공격하였지만, 밤낮 5일 동안 굳게 지키면서 용맹을 떨치며 혈전(血戰)하여 무수히 적을 살해하여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성을 완전하게 하였습니다. 수성 대장(守城代將) 최덕량(崔德良)은 적이 불의에 옛 북문에 충돌하니, 군사들이 도망하여 흩어지매 적이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성에 기어올라 성의 함락이 순간에 달려 있었는데, 최덕량이 이눌(李訥) 등과 함께 도망하는 군졸 몇 사람을 베어 죽이자, 군사들이 그제야 다시 모여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떨치며 힘껏 싸워 마침내 한 성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영장(領將) 이눌(李訥)의 공(功)은 최덕량과 다름이 없습니다. 율포 권관(栗浦權管) 이찬종(李纘宗)은, 적이 본 고을을 포위하려 할 때 사람들이 모두 ‘성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전 우후(虞候) 이협(李浹)은 성문(城門)에 이르렀다가 도망하였지만, 그는 혼자 성으로 들어가 협력하여 남문(南門)을 지켰으니, 난리에 임하여 명령을 받든 것이 매우 가상하며, 거기에다 재주와 국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위급할 때 쓸만합니다
낙의재유집(樂義齋遺集) 이눌(李訥)의 기록,
10월 초6일. 황혼녘에 적이 나아곡(羅兒谷)으로 침입하자‚ 미리 준비한 돌과 나무섶을 골짜기의 왼쪽에 감추어두고‚ 병사들을 산 정상에 보내 소리지르게 하고 정예병을 골짜기의 왼쪽에 매복을 시켰다. 마침 동남풍이 불어 화공이 성공하여 적 50여인이 사상을 당했다(3차전투).
10월 초7일. 황희안(黃希安)이 전날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자‚ 이눌이 “적병이 전국에 깔려 있고 경성이 함락되어 선조가 몽진을 떠났는데 조그만 고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이를 보고하겠느냐”며 질책을 하고 정 하고 싶으면 “그대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니 제군이 감읍하였다.
12월 16일. 적선이 공암(孔巖)에 정박하자 하서포(下西浦)로 진을 옮기고 수전(水戰)을 연습했다.
* 낙의재 유집에 10월 초 6일부터 12월 15일까지 이눌(李訥)의 난중일기가 없다.
전쟁이 끝난 뒤인 1599년에 의병을 해산하였으며, 서실(書室)을 중건하여
학문활동을 하던 중 부상한 곳이 악화되어 죽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 일고는 16세기 경상도 사림파가 향촌에서 수행한 학문활동과
의병항쟁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난후 원종공신1등으로 녹훈되고 영장으로 재수 되었다
철종9년 후손들에 의해 낙유재유집 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경주읍지 낙의재유집 충의록
3,이덕매(李德梅1564- ? )
자는 여애(汝愛)요 본관은 청안(淸安)이며
고려(高麗) 충원공(忠元公) 청안군(淸安君) 양길(陽吉)의 후손이다.
장기현감(長鬐縣監) 기(基)의 현손이며 진사(進士) 수천(壽天)의 아들로
명종(明宗) 19년(1564)에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에서 태어났다.
선조(宣祖) 25년(1592) 4월 14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삼종제(三從弟) 계수(繼秀). 삼한(三韓)과 더불어 국난을 극복코자 창의거병하여
초기 방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던 중에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갔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적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년 11월 1일에 많은 의병장과 함께 분향하고 하늘에 맹세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하된 자는 마땅히 몸을 던져 대의를 밝혀야 한다”
하고 충성을 다짐하였다.
동 26년(1593) 10월 29일 울산(蔚山) 태화강(太和江) 지역의 적을
여러 의병장과 함께 격퇴시킨 다음 이응춘(李應春)의 정자인 반구정(伴鷗亭)에
모여 서사보국(誓死報國)을 다짐하는 구강동고록(鷗江同苦錄)에 서명하였다.
동 29년(1596) 9월 28일 대구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에 참가하는 등
팔공산 지역 전투에 수백 명의 정병을 이끌고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국난을 당하자 일신을 던져 나라와 백성을 위해 창의하였음은
가문의 영예이며 고을의 자랑이 되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이 제수되었으나 공은 끝까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고사하였다고 전한다.
<參考文獻 : 壬辰抗爭史. 鷗江同苦錄. 울산의 충의정신>ㅣ
4,이봉춘
호성원종공신2등
청안인 자는계영 현감 광보의 셋째 아들로 외동입실에서 태어났다
임란때 형 응춘과 우춘을따라 조카 승금과 더불어 창의 하였다
동년4월23일 동대산의 기박산성에서 울산의 여러 의사들과함께 창의하여
우의장으로 좌병영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동해안으로 침투해 오는 적을
방어 하기위해 백형 응춘과 함께 공암에 진을치고
여러 차례적을 물리쳤다 동년6월9일 문천회맹에 참가하였다
계사년(1593) 10월 구강회맹에 참여하고
1596년 3월과 9월의 팔공산 회맹에도 참여 하였다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맹호군으로 재수 되었다
임난초기 관군이 일거에 무너진 울산에서는 선조 25년 4월 23일에 처음으로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의병에 결집하였다. 이들은 박봉수(朴鳳壽)를 대장으로 삼고,
좌익장에 박응정(朴應禎), 우익장에 장희춘(蔣希春), 좌위장에 고처겸(高處謙),
우위장에 이봉춘(李逢春), 찬획에 심환(沈渙), 종사관에 이한남(李翰南),
운량호군에 이경연(李景淵) 등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 후 5월 5일에는 경주에서 유정(柳汀), 유백춘(柳伯春)등이 5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여 군세가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5월 7일 밤에 왜적이 점령하고 있는
병영성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고 군기 군량을 노획하거나 불지르고
산성으로 개선하였다.
이로써 울산 의병의 군세가 크게 떨쳐졌다. 이외에도 인근 각지에서 울산 의병에 의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그 중에서도 울산의 공암(孔巖), 달현(達峴), 사자평(獅子坪),
관문성(關門城), 이견대(利見臺)와 경주의 문천(汶川), 소등(所等)과
대천제(大川堤) 전투 등은 후세에 이르도록 각종 문집과 실기 등에 남아
전해져오고 있다. 이 전투들은 대체로 익숙한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치러졌고,
울산 의병의 용맹을 떨친 것이었다.
<기박산성 의병활동조직 및 주요활동실적>
의병의 조직은 의병장 대장 박봉수, 좌익장 박응정, 우익장 장희춘, 좌위장 고처겸, 우위장 이봉춘, 찬획 심환, 종사관 이한남, 운량호군 이경연, 좌재군 박진남, 우재군 김응방 이었고 5월에는 경주의 견천지와 신흥사 승군 지운스님이 합류하여 의병들의 수가 무려 1,000명이 되었으며 이후 9월에는 울산군 가군수 김태허를 중심으로 의병이 통합 편승하니 의병수가 무려 3,000명이 되었다.
참고문헌
경주읍지 퇴사제일기
5, 이응춘(李應春,1540-1594)
퇴사재 원종공신3등
청안인 자는태영 호는퇴사재 홍원현감 광보의 맏아들로 경주시외동에서 태어났다
명종21년(1566)무과에 금제하여 오위부장에 이르렀으나 곧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란때 두아우 우춘,봉춘과 아들 승금 종질 삼한 눌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니
뒤를따르는 사람이 300명이나 되었다
의병장 이응춘부대는 근친일족과 그들의 노비만으로 편성한 특수전투단이였다
막강한 전투력으로 100여회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동월 23일 개운포로 상륙하는 적을 이언춘 윤홍명 장희춘 등과 합세하여 크게 격파하고 이어 동해안 공암으로가 적을 무찔렀다
5월14일에는 영천 창암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무찌르고 5월29일 다시 의병을 이끌고
동해안 공암으로 진을옮겨 침투하는 적을 방어 하였다
임진년 6월 들어 영남의 의병들과 경주 관군들이 이곳 문천가에 모여 경주를 수복하고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논의를 벌이는데, 경주읍지에 따르면 6월 9일 부윤 윤인함과
판관 박의장 그리고 경주지역 의병장 43명, 울산 25명, 영천 14명 등
12개 고을의 132명이 모여 짐승의 피를 마시고 서약을 꼭 지키자는 의지를 표명하고
이를 회맹록에 기록하였다.
이를 문천회맹이라 한다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9월8일에는 경주성을 수복한뒤 적의재침을막기위해 개운포를 지키다가
다시 9월21일 경주 선도산전투에 참전하여 적을격파 하였다
이듬해(1593)년 2월 울산 태화강으로 침투하는적을 이여량 최봉천 윤홍명 박인국등
의병장과 합세하여 대첩을 거두는데 공을세우고 곧 불국사로 진을옮겨
울산에서 경주로 올라오는적을 막는데 힘섰다 동년10월 구강회맹에 참가하고
다음해 1594년 10월9일 개운포에서 적의 대병력을맞아 용전분투하다
증과부적으로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러한 전공등으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순조32년 1832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창표당안에 생절(28원)로 모셔졌다 퇴사재실기(1995)가 전한다
이응춘의 유서는
임진왜란때 울산 개운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면서 급히 써내려간 글이다.
유서는 사용된 종이나, 서체, 그리고 내용에 이르기 까지 급박한 전황과
죽음을 앞둔 가장의 고뇌를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이응춘은 의용대 지휘관이다. 그는 유서를 쓰는 그날 울산 개운포에서 세 번이나
적과 교전했다. 마침내 대군을 실은 적의 선단이 온산만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들에게 급히 유서를 썼다.
유서는 한지에 쓰였으며 손바닥 두쪽 크기다. 급히 작성하느라 묵필을 제대로
챙길수 없는 형국을 느끼게 한다. 서체는 초서체다. 빠르게 적어내렸다.
편지내용은 이렇다.
개운포에서 3합을 싸워 적의 예봉을 꺾었다. 대군이 함선을 타고 들어오니 힘이 부친다. 집안 대대로 나라에 은혜를 입었다. 오늘 죽기로 싸운다. 다 갖추어 전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조상 제사를 거두도록 하라.”
그는 유서를 남긴 그날 개운포에서 전사했다.
그가 유서에서 나라에 은혜를 입었다고 한 뜻은 청안 이씨 가문이 고려때부터
문무 양과에 인재를 내면서 나라에 귀히 등용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임진왜란때 청안 이씨는 거족적으로 의병활동을 했다. 임란때 울산전사를 보면
이언춘(李彦春), 이우춘(李遇春), 이봉춘(李逢春)이란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3형제였다. 승금은 아들이었다이밖에 서생포전투에 참전한 이팽수, 이삼한, 이대립 이눌 등 10촌
내외 16인이 사족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지금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귀한 신분에 따른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 2월 27일 갑진 3번째기사 1832년 청 도광(道光) 12년
이시무·황성·이응춘·이승회 등에게 시상하다
울산(蔚山) 고 부장(部將) 이응춘(李應春)과 그 아들 고 훈련 정(訓鍊正)
이승회(李承會)에게는 증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시무는 증 영상(領相)
이정립(李廷立)의 아버지로서 임진 왜란 때 순절(殉節)했던 자이고,
황섬은 문학과 명절(名節)로 선묘조(先廟朝) 때에 공적이 드러났는데
광해군 때 삭직(削職)당했던 자였으며, 이응춘은 왜변(倭變)에 전사하였고,
이승회는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병(義兵)을 모집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 4월 13일 기축 2번째기사 1832년 청 도광(道光) 12년
예조에서 각 식년에 충·효·열에 대해 장계로 정부에 보고한 것을 분등하여 초계하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
울산(蔚山)의 고 통정(通政) 이응춘(李應春)과 그의 아들인 고 훈련정(訓鍊正)
이승금(李承金)은 왜변(倭變) 때에 부자(父子)가 창의(倡義)하여
이응춘은 개운포(開雲浦)에서 전사(戰死)하였고 이승금은 힘쓴 공적이 많은 자이다.
삼가(三嘉)의 고 부정(副正) 김난손(金蘭孫)은 왜변 때에 창의하여
봉성산(鳳城山) 밑에서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울산의충의정신 창표당안 은양읍지 충의록
6 이팽수(李彭壽1559-1596)
두촌공 선무원종공신 3등
청안인 자는미수 호는두촌 거의 아들로 경주시 안강읍 산대리에서 출생했다
임란소식을 듣고 문중의 장정 25명과 노비를 모아 창의하여 안강홍천에서
왜를무찔렀고 울산 반구정으로 달려가 여러곳에서 적을 무찔렀다
동년6월9일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이어 경주성 수복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동왕27년(1594) 무과에 급제하였다 경상좌병사 박진이 공을 복병장으로 임명하였다
박진을 도와 어려 전역에서 역전하였다
1594년 음10월5일 의병장 이응춘은 울산 개운포 전투에서 근친인 다섯집 장정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전투에서 2명만이 살아서 향리로 돌아왔다
응춘(병조판서 추증)우춘 봉춘 3형제 응춘의 아들승금(승정원좌승지 추증)
조카인 팽수(병조참판 추증) 눌 부자 형재 숙질 10촌이내 근친 16명이 분연히 일어나
13명이 의거하였다
1596 연해의 적이 다시 준동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생포로 달려가 용전분투 하다
1월4일 순절하니 공의나이 38세였다
끝내 공의 시신을 찿지 못하여 초혼장으로 장례를 치루 었다
그의 아들은 강보에 쌓여 있었다
훗날 아들은 병자호란(1636)때 경기도 용인부근 금천전투에서 전사하였으니
2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근세에 보기드문 훌륭한 명문 집안이라 할수있다
경주 유림의 상소에 의하여 비로서 세상에 그 미거가 밝혀지고,
늦게나마 임금은 눈물 흘리고 제문을 내려 충신들의 넋을 달랬다.
정조7년(1783) 나라에서 충신지문이라는 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번암 채제홍(樊巖 蔡濟恭)이 짓고
홍문관 금파 이정겸(弘文館 琴坡 李鼎秉) 이 쓴 신도비(神道碑)가 묘소 아래에 있다.
정조8년(1784) 3월20일 영의정 정존겸이 이팽수가 왜란을 당하여 붓을 던졌는데,
과거에 합격한 지 1년도 채 못되어서 마침내 순국(殉國)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애당초 직명(職名)이 없었고 단지 한 사람의 출신(出身)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시에 사절(死節)한 사람인 김호(金虎)가 10년 전에 대신(大臣)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이미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셨으니,
지금 역시 일체(一體)로 증직하는 것이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여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표충각의 정려비문은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짓고,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가 글씨를 쓰고 예조참판 김상집이 비문을 지었다
표충각’ 이란 扁額 글씨는 예조 판서 김노진이 썻다.
두촌공 이팽수를 모시는 덕산서사는 3,1운동이 일어난지 4년뒤
일제강점기인 1923년 3월 옥산서원에서 경상도 유림들이 공론하여
德山書社를 창건하여 항일운동의 표상으로 삼아
나라 뺏긴 울분을 삼키며 항일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았다
두촌실기(1933) 간행되었다
1784년 乾隆(淸/高宗) 49년 <承政院日記>
上曰, 依爲之。出擧條存謙曰, 壬辰殉節人李彭壽, 曾因嶺伯狀聞, 朝家旣已旌閭, 而蓋李彭壽亂投筆, 中甲午科第一, 登科未一年, 竟至殉國, 當時伏兵將之稱, 此不過一時假名, 初無職名, 只是一出身。
참고문헌
창의록 동경지 경주읍지 두촌실기
덕산서사 영모재
7, 이삼한(李三韓,1568- ? )
청안인 도안(道安)-선조분들은 청안, 도안 이라고도 사용하였다
자는경이(景而) 호는 눌재 인백의 아들로 경주시 외동 입실리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영민하여 학문과 지용이 뛰어나 일찍 무과에 급제 했다
선조27년(1594) 갑오별시 병과3등 62위
임란때 종숙 응춘 우춘 봉춘과 제종 승금 눌과 더불어 창의하여
울산 좌병영 탈환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스스로 분의장 이라 하였다
동년 6유월9일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9월8일 경주성 북성전에서 적을 물리치고
읍성을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후 적의 재침을 막기위해 울산 개운포에 진을치고
여러 차례방어전에서 분전 하였다 1593년 2월 동해안의 이견대 전투와
울산의 태화강 전투에서 적을 크게 무찌러고 그해 10월 구강회맹 에도 참가 하였다
1594년 5월에는 이경연(李景淵), 유백춘(柳伯春)과 함께 도산(島山)의 적군을 크게 무찔렀다
선조29년(1596) 9월 제2차 팔공산 회맹에 참가 하는등 전란이 끝날때까지
여러 전역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난후 판관으로 선무 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 되었다
후손이 없었다
참고문헌
울산의 충의정신 한국역사인물
8,이승금(李承金1556-1601)
청안인 자는 사형(士亨). 증 병조참판 응춘의 아들로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에서 태어났다
13세때는 손가락을끊어 병세가 위독한 아버지를 구할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엿다
선조12년(1579)에 무과에 급제 하였다
임란때 아버지와 숙부 우춘 봉춘등을 따라 동네 장정을 모아 창의하였다
동해안으로 침투 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공암에 주둔 하면서 아버지를도와
5월6월 두차례에 걸친 공암전투에서 적을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고
동년6월9일 문천회맹에도 참가하였다 7월18일 형산강전투에 참전하여
이의잠 권사악 류영춘등 의병장과 함께 적을 물리쳤다
선조27년(1594) 10월9일 개운포전투에서 아버지 응춘이 순절하였다
정유재란(1597) 9월 제3차 팔공산회맹에 참가하고 서생포로 내려와 동년 12월22일
울산의병장 박봉수 등과 힘을 합쳐 적을크게 격파 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에 명나라 군사가 증성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닦으며
군문에 가서 항상 명군의 선위 부대가 되어 적을 섬멸하였다.
이해 2월에 왜장 가등청정이 화친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큰 소리로, “만약 형세가 막히고 힘이 다하면 군민이 다같이 적의 칼날아래 죽을지언정 어찌하여 화해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승금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선무원종 3등 공신에 녹훈하고 훈련정으로 재수 하였으나
선조34년(1601) 46세로 일생을 마쳤다
순조 32권,32년(1832 ) 4월 13일(기축)
예조에서 각 식년에 충·효·열에 대해 장계로 정부에 보고한 것을 분등하여 초계하다
忠臣贈職秩。【蔚山故通政李應春,其子故訓鍊正承金,倭變時父子倡義,應春戰死於開雲浦,承金多効功績者也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울산(蔚山)의 고 통정(通政) 이응춘(李應春)과 그의 아들인 고 훈련정(訓鍊正) 이승금(李承金)은 왜변(倭變) 때에 부자(父子)가 창의(倡義)하여 이응춘은 개운포(開雲浦)에서 전사(戰死)하였고 이승금은 힘쓴 공적이 많은 자이다.
순조32년(1832) 9월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창표당안에 생절(28원)로 모셔졌다
유품으로 교지 4장을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참고문헌
울산의 충의정신 창표당안 영남 인물사
9,이응벽(李應壁1563- ? )
청안인 자는 여원 호는 칠송당 충순유ㅣ 참봉 의감의 큰아들로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에서 출생했다 임란때 조카 계수와 더불어 창의하여 동해안에 진을쳤다
먼저와 있던 김응하 김응생 황희안 등의 의사들과 합세하니 의기가 충천 하였다
동년 5월 6월 두차례의 이견대와 우산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듬해 (1593)10월 구강회맹에 참여 하였다
10월18일 이응벽(李應壁) 김응하(金應河), 이용갑(李龍甲), 손시(孫時), 이승급(李承級), 김광복(金光福), 김란(金蘭), 최문병(崔文炳), 김홍위(金弘췿)의 군대와 합쳤다. 이때 적병 수천명이 월성(月城)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진격하거늘 정세아(鄭世雅), 조준기(曺俊驥), 정사진(鄭四震), 조이절(曺以節)이 영경(永境)의 입구에서 막으니 적병이 드디어 고개를 넘어 달아나거늘 김응하, 김홍위가 산의 남쪽에 잠복(潛伏)하고 이용갑, 최문병은 단석(斷石)이 북쪽을 막고 김응택과 더불어 강궁(强弓)을 거느리고 덤풀속에 잠복하여 돌을 던지고 쇠뇌를 발사(發射)하였다. 이때 풍설(風雪)이 크게 일어나 산길이 어둡고 밝지 않으니 적병이 길을 잃었다. 그 뒤를 쳐서 적의 머리를 참획한 수가 수십급(數十級)이요 적병이 궤멸(潰滅)되어 흐트러지니 우리들이 창의한 이래로 오늘날 싸움이 진실로 대승이었다.
선조27년(1594) 5월 적의 대병이 태화강으로 침입한다는 소문응듣고 조카 계수와 의논하여
기만전술로 적을 우인 대첩을 거두 었다 동년7월 무과에 급제하여 장사랑 참봉에 재수 되었다
12월11일 권응수(權應銖), 김응택, 김응하(金應河)와 더불어 당진(唐津)에서
크고 작은 수십여전(數十餘戰)에 적병이 흩어져 달아났다
견천(堅川)에 이르러 이응벽(李應壁), 이귀갑(李龜甲), 이대진(李大震)도 또한
부상(負傷)당하였다
동왕29년 (1596)팔공산 회맹에 참여하고 이듬해 정우재란때는
울산의 도산성전투에 참전하여 적을 물리 치는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형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칠송당실기,가 (1967)간행되었다
참고문헌
울산의충의정신 칠송당일기 충의록
10,이대립(李大立)
자는 여수(汝秀) 호는 야포(野圃)
본관은 청안(淸安)으로 조선조 명종 정사년(1557)에 태어났다.
경인년에 흥해훈도(興海訓導)로 벼슬에 나아갔으나
선조(宣祖) 25년(1592) 4월14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자 동지인 이열(李說) 정삼외(鄭三畏),아들 정사물(鄭四勿),정삼계, 김득경 진봉호(陳奉扈), 동생이대인(李大仁) 최준민(崔俊民) 등과 더불어 마을의 장정들을 흥해에서 창의(倡義)하였다
4월25일 불항(佛項)에서 진영을 갖춘 뒤
영천의사(永川義士)들과 회동하여 토적(討賊)을 다짐하고.
5월 29일 문천(蚊川)으로 진을 옮겨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하여 언양(彦陽)에서 적을 무찔렀다
동년 6월9일 문천회맹에 참가하고 이어 7월24일 영천성 탈환전과
8월21일 경주성 복성전에도 참가 하였다
선조27년 5월 안강전투에서 오백명의 의병으로 적의머리 백여급을 베었다
이듬해 (1598) 4월 형산강전투에서 적을 무찔렀다
선조 29년 (1596)3월과 9월 팔공산회맹에도 참가하였으며
선조30년(1597) 화왕산연맹에도 참가하였다
서생포전투에 참전한 이팽수, 이삼한, 이대립 등 10촌 내외 16인이 사족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지금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귀한 신분에 따른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안강홍천전투 형산강전투에서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경주성과 영천읍성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남겼다.
의병으로 출전하여 방어사 권응수 휘하에 들어가
경주 문천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영천성을 수복하는데 많은 전공을 쌓아
전쟁이 끝난 후 벼슬을 제수 하였으나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은거하였다
흥해에서 참석한 문천회맹 명단
박몽서(朴夢瑞), 정인헌(鄭仁獻), 호신수(扈臣秀), 최흥국(崔興國), 이대립(李大立),
정삼외(鄭三畏), 정삼계(鄭三戒), 이화(李華), 이대인(李大仁), 진봉호(陳奉扈), 정삼고(鄭三顧);
참고문헌
임진일기 포항의인물 충의록 경주읍지 울산 읍지
상모정 구암폭포(상모정정자계곡폭포)
11,이승회
이시무·황성·이응춘·이승회 등에게 시상하다
命故判決事贈吏判李時茂加贈, 豐基故參判贈吏判黃暹賜謚, 蔚山故部將李應春及其子故訓鍊正承會贈職, 時茂, 贈領相廷立之父, 而壬辰殉節者也, 暹以文學名節, 著績於宣廟朝, 光海時被削者也, 應春戰亡於倭變, 而承會以復讎募義者也。
고(故) 판결사(判決事) 증 이조 판서 이시무(李時茂)에게 증직을 더하고, 풍기(豊基)의 고 참판 증 이조 판서 황섬(黃暹)에게는 사시(賜諡)하며, 울산(蔚山) 고 부장(部將) 이응춘(李應春)과 그 아들 고 훈련 정(訓鍊正) 이승회(李承會)에게는 증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시무는 증 영상(領相) 이정립(李廷立)의 아버지로서 임진 왜란 때 순절(殉節)했던 자이고, 황섬은 문학과 명절(名節)로 선묘조(先廟朝) 때에 공적이 드러났는데 광해군 때 삭직(削職)당했던 자였으며, 이응춘(李應春)은 왜변(倭變)에 전사하였고, 이승회(李承會)는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병(義兵)을 모집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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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이평형(李平亨)
선무원종공신 3등(宣武原從功臣3等)
감찰(監察) 이평형(李平亨) / 청안인(淸安人) 봉사(奉事) 이춘영(李春英)의 후손이며, 이환(李煥)의 아들이다.
* 선무원종공신 3등 녹훈자(48~102장/앞장과 뒷장으로 구분) 중 98장째 뒷장에 기록되어 있음.
13, 이문용(李文龍)
선무원종공신 3등(宣武原從功臣3等)
학생(學生) 이문용(李文龍) / 청안인(淸安人) 이존학(李存學)의 5세손.
이기남(李箕南)의 3남(三男)
* 선무원종공신 3등 녹훈자(48~102장/앞장과 뒷장으로 구분) 중 102장째 앞장에 기록되어 있음
계속 업~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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