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관의 곡옥(曲玉) 장식에서 조선시대 대갓집 아낙의 옥비녀까지 수천년 동안 '귀한 장식품'으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옥(玉).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玉匠) 장주원(張周元·71·사진)씨는 그 옥을 새로운 감각으로 다듬고 재창조하는 일에 40여년간 매달려 온 사람이다. 그의 귀한 작품들이 광주에 온다. 광주시립미술관이 오는 9일부터 내년 2월22일까지 '장주원의 옥공예 작품전'을 열기로 한 것. 전시에는 향로와 다기, 주전자, 장신구 등 장 선생의 작품 70여점이 내걸린다. 무려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녹옥사귀해태장로'는 이번 전시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으로 추정가만 35억여원에 이른다. 은은한 비취빛이 감도는 이 향로는 용머리와 전통 문양이 실물을 보듯 섬세하게 새겨져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또 '해태자연석 이중연결고리'는 자연석 덩어리를 자르고 잇거나 붙이지 않고 고리와 고리를 조각만으로 연결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1937년 목포에서 태어난 장 선생은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둥 마는 둥 한 뒤 무작정 상경해 미군 밤무대에서 트럼펫을 불다가 어느 날 180도 방향을 전환, 장롱 장식품을 조각해 청계천 7가 농방거리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금은방의 세공기술자로 전직하는 등 그의 청년시절은 늘 새로운 도전으로 좌충우돌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직업이었지만 생계 때문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아버지는 금은방을 운영하는 부잣집의 장남이었다. 이를테면 "내 멋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분방한 기질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것을 추구하게 했던 것이다. 옥을 다루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전통 옥공예가 단절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독학으로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했고 방황도 했지만 어렵다는 점이 오히려 그에게는 자극제였다.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옥공예를 시작해 20여년 만에 옥으로 일가를 이뤘다고 자부할 때쯤, 평소 작품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찾던 대만 고궁박물관에 갔다가 옥공예품 전시관 안내원이 수많은 고리를 연결한 옥목걸이 줄을 가리키며 "이것은 중국 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듣고는 오기가 발동해 2년 만에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 다시 8년 후, 목걸이 줄의 처음과 끝 고리만큼은 동일 원석의 옥으로 연결시킬 기술이 없어 금붙이를 사용해 온 중국 것을 뛰어 넘어 끊김이 전무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후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 옥장은 중국과 미국, 프랑스 등 세계 유명전시관에서 개인전을 갖는 등 세기의 옥공예가로 인정받았다. 특히 그의 작품성을 인정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이 최근 장주원 특별전을 추진하고 있어 한국 예술의 자부심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광주시립미술관은 작품보호를 위해 1천만원대에 이르는 전시작품 관리 보험에 가입하는 등 전시준비를 마쳤다. 박지택 광주시립미술관 관장은 "한국의 옥공예는 가공의 어려움 등으로 오랜 끈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으로 환영받기 어려웠지만 장주원 옥장은 전통 옥공예의 맥을 잇고 예술로 승화시킨 장인"이라며 "50여년간 이어진 그의 장인정신은 한국인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