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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지 역 |
갹 출 내 역 |
비 고 |
백 낙 렬 |
수촌리 |
논 3,000평 밭 2,0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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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낙 소 |
수촌리 |
논 1,500평 밭 1,000평 |
백낙렬의 동생 |
기 봉 규 |
사금말 |
논 3,000평 밭 7,000평, 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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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흥 렬 |
고주리 |
논 3,000평 밭 3,0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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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진 협 |
한각리 |
논 1,500평 밭 1,0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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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진 승 |
한각리 |
논 1,000평 밭 6,5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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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 정 |
이화리 |
산 3,000평 소 1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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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용 석 |
노진리 |
논 1,000평 밭 2,0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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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운 선 |
노진리 |
논 1,000평 밭 2,0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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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준 팔 |
거묵골 |
논 450평 밭 1,0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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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의 현 |
거묵골 |
논 1,5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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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경 화 |
거묵골 |
논 2,0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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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경 팔 |
거묵골 |
논 1,50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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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정면․장안면 지역의 기독교는 1900년경 인천으로부터 전파되었다. 남양출신으로 인천에 살던 洪承河가 고향에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은 동생 홍승문이 적극 포교하였다. 이리하여 1900년 말에 남양읍내 외에 향갈동과 포막동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40) 1902년에는 양철리․용머리․경다리․덕방리․영흥도․대부도․선감도 등 도서지역을 포함 9개의 교회로 남양계삭회가 조직되었다.41) 1902년 홍승하가 하와이 이민들을 위해 선교사로 떠난 후 하춘택․박세창․김우권․이창회․김광식․한창섭 등이 남양지역을 담당하였으며, 1914년부터는 金敎哲, 1918년부터는 董錫璣이 구역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초기 인천지방회에 속해있던 남양구역은 1907년부터 수원지방회로 편입되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수원을 포함한 남양구역은 지방감리사에 노블, 수원읍교회는 任應淳, 오산구역은 金光植, 남양구역은 동석기가 각각 시무하였고, 김교철은 본처목회자로 수촌리에 머물면서 활동하였다.42)
그리고 한말 군인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때 충남에서 의병활동을 참가했던 경력이 있는 洪元植은 1914년 청북면 판교리에서 제암리로 이거한 후 제암교회 권사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제암리에서 書齋를 설립하고 계몽교육을 실시하면서 제암리교회 안종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金聖烈 등과 救國同志會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지족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43)
이상에서 살펴본 삼괴지역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일찍이 전파되었으며, 천도교 지도자는 동학혁명과 비밀결사를 통해, 기독교 지도자들은 국국동지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리하여 이들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삼괴지역 만세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 전개과정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은 수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수원의 3.1운동은 서울보다 보름정도 늦은 3월 중순부터 격렬하게 전개되어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수원 3.1운동의 특성은 초기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으나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도교가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44) 즉 초기에는 감리교 신자인 김세환이 경기 남부와 충청 일부를 책임지면서 운동을 독려하였다. 이와 동시에 천도교에서는 서울에서 李炳憲이 북수동 수원교구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논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병헌은 경기도 평택출신으로 1913년 수원교구장을 역임한 李敏道의 장남으로 수원교구에서 傳敎師․講道員․典制員․金融員 등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손병희의 부름을 받고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45) 이병헌은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申肅․印鍾益과 함께 李鍾一의 집으로 운반하였으며, 3월 1일 당일에는 손병희를 따라 민족대표 33인 모여있던 태화관에서 李奎甲과 같이 탑골공원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고 남대문 만세시위를 주도한 바 있었다.46) 이로 인하여 이병헌은 종로경찰서로부터 검거령이 내렸으며 일단 이를 피해 수원교구로 내려왔다.47)
수원교구에 내려온 이병헌는 서울에서의 상황을 설명하고 수원에서도 교인을 모두 동원,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3월 16일 시일날인 이날 聖化會를 마치고 시내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늦은 밤 11시에는 수원교구에서 이병헌과 교구장 金仁泰, 理文員 安政玉, 典制員 金正淡, 講道員 羅天綱, 巡廻敎師 李星九․安鍾麟, 傳敎師 洪鍾珏․安鍾煥 등 주요교역자들이 모여 만세시위와 독립운동비 모금을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였다.48) 그리고 이에 앞서 수원교구의 교인들은 천도교의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독립운동의 주모자로 일경에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구출하려는 비밀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49)
천도교 교구실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한 일제측은 소방대와 일본인이 합세하여 소방용 갈고리와 괭이 등으로 교구 대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회의중인 교인을 마구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金正淡․金正模․安鍾煥․安鍾麟․洪鍾珏․金相根․李炳憲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50) 이중 안종환과 안종린은 후에 제암리에서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보복만행인 제암리학살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수원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장안면과 우정면의 3.1운동은 천도교의 백낙렬․김흥렬, 기독교의 안종후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당시 순회교사인 백낙렬은 장안면 거묵골(篤亭里) 전교실의 李鍾根․禹英圭․禹鍾烈. 기림골(漁隱里) 전교실의 金顯祚․金益培, 장안리 전교실의 趙敎淳․金仁泰, 덕다리 전교실의 金昌植, 사기말 전교실의 金永甫, 고온리 전교실의 白樂溫, 덕목리 전교실의 韓世敎․朴龍錫․朴雲錫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어 우정면 주곡리의 車喜植과 팔탄면 고주리의 金興烈과도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51) 또한 백낙렬은 중앙총부의 이병헌과 연락을 취하면서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처럼 만세운동이 무르익어 갈 무렵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이병헌이 일경을 피하여 3월 15일경 수원교구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하자 안종환, 안종린은 수원교구로 가서 구체적인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일본수비대의 피습으로 안종환, 안종린 등은 중경상을 입고 돌아와 김흥렬에게 '각 교구의 만세운동은 자체부담으로 계속 전개하라'는 중앙의 지시사항을 전달하였다. 이어 김흥렬은 다시 백낙렬에게 이를 다시 전달하였다. 하지만 초기 준비하였던 만세운동은 안종환과 안종린의 부상으로 자연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수원교구로부터 메세지를 전달받은 백낙렬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만세시위를 추진시키기로 결심하고 김흥렬을 팔탄면과 향남면을, 백낙렬 자신은 우정면과 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했다. 백낙렬과 김흥렬은 그 다음날부터 동분서주하면서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정면과 장안면의 구장들도 3월 27일 구장회의를 개최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날 참석자는 수촌리의 백낙렬, 어은리의 李時雨, 독정리의 崔建煥, 장안리의 金俊植, 덕다리의 金大植, 사랑리의 禹始鉉, 사곡리의 金贊圭, 금의리의 李浩悳, 석포리의 車炳漢, 노진리의 金濟允의 아들 등 10명이었다.52) 이들은 차병한이 ‘지난 발안장 만세시위에서 일본인 아이가 게다로 구타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만세를 부르자’고 발의하자53) 모두 찬성하고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수촌리의 車漢傑과 李順模는 화수리주재소 순사보 吳麟永을 매수 등 치밀하게 준비하였다.54) 이들은 3월 30일 오후 4시 쌍봉산 중턱에서 우정면 석천리 金在植, 매향리 栢南杓, 화산리 奇鳳奎, 조암리 金文明 장안면 장안리 崔成鶴, 독정리 禹暎圭, 수촌리 백남렬과 洪順根 등 10여 명은 일본인 순사 살해반으로 차한걸․이순모․김재식․우영규, 주재소 및 면사무소 방화반으로 오인영․김문명․백남렬․최성학․홍순근․백남표․기봉규 등으로 각각 결정하고 그 실행방법을 논의했다.55) 그리고 실행방법으로 첫째 독립만세로 시위군중을 선동하고, 둘째 이들로 하여금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포위한 후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문을 부수고, 셋째 방화반은 방화하고, 넷째 살해반은 일본인 순사를 타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56)
이와 같은 계획은 수원교구에서 부상당한 안종환과 안종린이 점차 회복되고 만세시위의 준비를 마친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은 4월 1일 저녁 9시경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일제히 시작되었다. 개죽산의 봉화는 조암리의 쌍봉산, 팔탄면 고주리의 천덕산, 향남면 가재리의 당재봉, 장안면 석포리의 무봉산, 어은리의 남산, 우정면 덕둑리의 보금산, 장작터 봉화산, 운평리 성신재, 고온리 원원대에서 받아 높은 산마다 치솟아 올랐고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이어서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는 만세소리도 뒤덮였다.57) 이처럼 봉화시위가 전개되자 발안주재소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수비대는 총을 쏘면서 우선 고주리 천덕산으로 추격하였다. 고주리 주민들은 어둠을 이용하여 산을 내려왔으며58) 봉화시위는 다음날 2일까지 지속되었다.59)
장안면의 만세시위는 4월 3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수촌리의 백낙렬은 이날 새벽 5시 李鳳九․鄭淳榮․洪秀光 등과 같이 만세시위가 성공리에 전개될 것을 기원하였으며, 사환 李元俊과 함께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60) 아침 9시가 되자 석포리 방면에서 많은 주민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하였다. 수촌리 방면에서는 머리에 흰띠를 두루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나왔다. 잠시 후 수촌리 전교실이 열리면서 이봉구는 쓴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고 쓴 커다란 깃발을, 홍수광과 차인범은 각각 태극기를 한아름 들고 나왔다. 이 태극기는 이봉구, 홍수광 등이 수촌리전교실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것이다. 태극기를 든 주민과 교인들은 백낙렬의 지시에 따라 수촌리를 한바퀴 돈 다음 독정리로 향하였다. 이때 독정리에서는 전교사 李鍾根과 禹鍾烈, 禹敬奎가 주민들과 함께 전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합류하였다. 또한 김창식은 덕다리 교인과 주민들을, 최건환 구장은 전주민을 동원하여 신촌으로 집결하였다. 이처럼 사방에서 모인 주민들은 신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주민들은 어은리 기림골로 항하였다. 기림골에서는 金顯祚 남양교구장과 金益培 전교사가 주민들을 동원하여 전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합류하자 순식간에 5백여 명이 넘었다. 이때 백낙렬이 앞으로 나가 장안면사무소로 가자고 외치자 군중들은 만세를 삼창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에 이른 군중은 면사무소를 진입, 집기를 모두 부수고 서류를 밖으로 내던지고 파손하였다. 기세가 오른 군중은 도망하려다 붙잡힌 金顯黙 면장을 강압하여 만세를 부르게 한 후 앞장 세우고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앞서 이봉구와 이순모에 의해 면사무소에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쌍봉산은 해발 117미터로 심괴지역에 가장 높은 산으로 우정면과 장안면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산 정상에는 우정면 한각리와 이화리, 장안면 수촌리에서 가져온 대형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이에 정상에서 내려온 군중들은 조암리 주민들과 합류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향하였다. 우정면사무소에서는 장안면사무소의 습격 소식을 듣고 미리 피신하여 텅 비어 있었다. 군중들은 장안면사무소와 마찬가지로 집기를 부수고 서류를 밖으로 끌어내어 불을 질렀다. 이날 모인 군중은 1천5백여 명이 넘었다. 이어 군중들은 백낙렬과 정순영의 지시에 따라 김현묵 면장에게 태극기를 들게 하고 앞장세워 우정면장 최중환을 살해코자 하였으나 이미 피신하여 한각리로 향하였다.
일단 한각리에 모인 군중들은 소산에서 만세를 부른 후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주재소를 포위한 군중들은 세 방면으로 나누어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때 주재소 안에 있던 가와바다(三端豊太郞) 순사부장과 순사들이 군중을 향하여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포위망을 점점 좁혔다. 이에 당황한 순사들은 총을 버리고 달아나다 이내 군중들에 붙잡혔다. 군중들은 순사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가와바다 순사부장은 여전히 문 뒤에서 총격을 가하였다. 이를 본 이봉구는 깃대를 들고 주재소를 향해 뛰어가다가 넘어졌다. 이를 본 김정식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쫓아갔으나 가와바다의 총격으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이경백과 김현모가 주재소 안으로 뛰어들었으나 마찬가지로 희생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주재소 뒤쪽에 있던 장소진과 장제덕은 산에 쌓아 놓은 나무를 지고 주재소로 달려가 벽에 세워놓고 불을 붙였다. 주재소로 불이 옮겨 붙자 가와바다는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면서도 따라오는 군중을 향해 계속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면서 추격하였으며 앞서 추격하던 김익경이 가와바다를 잡아 내동이치자 군중들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가와바다를 폭행하여 마침내 참살하였다. 일단 만세시위가 끝나자 군중들은 각기 부락으로 돌아갔는데 이날 시위로 2명이 죽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61)
당시 주민들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한 것은 면사무소의 경우 세금을 많이 징수하고 조선민족을 괴롭혔기 때문이며, 주재소의 경우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을 가혹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이었다.62) 이외에도 이날 참살당한 가와바다 순사가 부임 이후 도박에 대한 단속이 심하였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적지 않은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63)
한편 우정면과 장안면과 인접한 향남면과 팔탄면의 만세시위는 3월 31일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하였다. 이날 수천명의 장꾼과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일경은 이를 제지하고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시위를 하자 일경은 시위행렬을 향하여 발포하여 2, 3명이 부상을 당하고 해산하였다.64)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일에는 발안장 주변 산에서 봉화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4월 5일 역시 발안장을 이용하여 전개되었다. 앞서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바 있는 장안면 수촌리의 백낙렬은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 4월 5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는 한편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李正根에게도 계획을 알리고 함께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5일 장날이 되자 이미 계획한대로 이정근은 제자들을 곳곳에 배치하였으며, 고주리 주민들은 김흥렬과 김성렬의 주도 아래 만세 행렬을 이루면서 발안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수촌리의 이봉구도 합류하였다. 12시가 되자 이정근, 백낙렬, 안정옥, 김흥렬의 선창으로 군중들은 만세를 부른 후 발안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사이다(佐板)가 배치한 순사들이 위협사격을 하였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주재소로 다가가며 만세를 불렀다. 사이다는 군중이 가까이 오자 칼을 휘두르며 저항을 하였다. 이날 시위로 이정근, 김경태가 희생되었으며 이봉구․안진순․안봉순․홍원식․안중후․김정헌․강태성․김성렬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주재소에서 고문을 당하였다.65) 이날 고문으로 이봉구는 수원형무소에서 희생되었다.
4.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보복
이처럼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점차 지속화 폭력화되자 일제는 보다 강력한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동원했다. 이미 3월 31일 발안장 시위가 있은 직후 경기도 장관과 수원군수에게 군대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일제는 가와바다 순사가 참살되는 격한 시위는 천도교가 주동하였다고 판단하고 천도교 전교실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수색하는 한편 방화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제암리에서 37명이, 고주리에서 6명이 각각 희생되었다.
한편 일제의 보복에 앞서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은 ‘곧 수비대가 오면 많은 주민들이 사살할 것으로 보고 저녁 식사 후 남산에 웅거하자’고 주장하였으며66) 이에 대해 군중들은 수비대가 와서 총을 쏘는 일이 있다면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67) 이에 따라 만세시위를 마친 군중들은 일단 해산한 후 저녁 식사 후 만세시위에 사용하였던 몽둥이와 돌을 지니고 사랑리 남산으로 모여서 수비대와 결전에 대하여 논의하였다.68) 그리고 화수리와 굴원리 주민들도 일제의 보복을 예견하고 원안리와 호곡리 방면으로 피신하였다.69)
4월 4일 새벽이 되자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을 보고 받은 일본군은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有田)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를 파견하였다. 아리다는 발안에서 달려와 화수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마구 총질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한 것을 안 아리다는 집집마다 방화하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자 아리다는 원안리와 굴원리로 몰려가 송낙인 등 4명을 포박 주재소로 끌고가 주민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몽둥이로 고문하였다. 이어 아리다는 수비대를 이끌고 호곡리와 원안리로 몰려가 만세시위의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들은 잠시 후 주민 30여 명을 포박하여 주재소로 끌고와 갖은 고문과 폭행을 자행하였다. 주민들은 고문에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며 고문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탈진하면 냇가에 내다버렸다.70) 이어 아리다는 사이다와 함께 다시 수비대를 이끌고 불에 타다 남은 화수리주재소 주변을 조사하였다. 주재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나무 숲에서 돌무덤을 발견하고 가와바다의 시체를 찾아낸 다음 사이다는 한각리로, 아리다는 화수리임시주재소로 돌아왔다.
이처럼 화수리부터 시작된 아리다의 일본군 보복만행은 수촌리․한각리․조암리․석포리․장안리․어은리․멱우리․사곡리․고온리․덕정리․독정리․사랑리․화산리․운평리․원안리․젱마리․고주리․이화리 등 우정면, 장안면, 팔탄면, 향남면 등 전체 마을에 걸쳐 자행되었으며, 이 만행으로 1백여 채의 가옥방화와 20여 명의 사상, 40여 명의 투옥, 5백여 명의 주민을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71) 본고에서는 이중 가장 처참한 보복을 당한 수촌리와 제암리, 고주리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군이 네 차례에 걸쳐 가장 혹독하게 보복을 가한 곳이 장안면 수촌리이다. 이것은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 쓴 깃발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李鳳九가 만들어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할 때 주재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버리고 나왔다. 이봉구는 천도교인으로 1909년 2월 중앙에서 師範講習所를 개설하자 孔炳台와 같이 입학 수료하였으며 1910년과 1916년에는 수원교구 교구장을 맡았다.72)
4월 4일 오전 사이다는 수비대와 함께 화수리주재소 현장을 조사하다가 이 깃발을 보고 수촌리 주민들이 선동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리하여 수촌리는 네 차례의 보복을 당하였다. 1차 보복은 4월 5일 시도되었다. 이날 오전 3시 반경 아리다는 수비대 30여 명을 이끌고 수촌리 큰말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을 마구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교회당과 집을 닥치는 대로 방화하였으며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보복으로 가옥 24채와 5명의 주민이 부상을 당했다.73) 2차 보복은 이날 오후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에 다시 들려 불타고 남은 8채의 가옥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이때 이봉구가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를 참살할 때 피가 묻은 옷을 미처 처분하지 못하고 다락에 감추어 두었는데 이때 발견되었다. 그리고 오전 산으로 피신하였던 주민이 집으로 내려왔다가 검거되어 발안리주재소로 끌려갔다. 이들은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74) 3차 보복은 이틀 후인 4월 7일 다시 자행되었다. 이날 일본 수비대는 수촌리 가장말을 비롯하여 꽃말, 용담굴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은 협박하여 모은 다음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들은 밧줄에 묶여 뭉둥이질을 당했으며 피투성이다 된 채 버려졌다. 이날 끌려온 주민들은 130여 명에 달하였다.75) 그리고 4차 보복은 그 다음날인 4월 8일 전개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날렬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주민들의 호응이 없자 수비대는 1차 보복 때 방화하고 남은 8채의 가옥 중 4채를 다시 방화하였다.76) 이와 같이 네 차례의 보복으로 수촌리는 42채의 가옥 중 38채가 방화되었으며 천도교전교실과 강습소, 이봉구․백낙렬의 가옥 등 모두 소각되었다.
한편 삼괴지역의 우정면, 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에 이어 발안에서도 만세운동이 계속해서 전개되자 사이다는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모든 마을을 보복한 후 제암리에 보복의 손길이 뻗쳤다. 4월 15일 오후 2시 반경 사이다는 아리다를 앞세우고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한 후 한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 ‘사이다가 할 말이 있으므로 교회로 전원 다 모이라’고 시달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이때 金學敎의 집에 숨어있던 이병헌에게 통역을 부탁하였으나 이병헌은 자신도 검거될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거절하고 뒷산에 숨어서 동태를 파악하였다.77) 이에 주민들은 교회당으로 모였으며 수비대는 교회당 정문에서 총을 세워놓고 사람 키를 비교한 다음 하나 둘씩 들여보낸 후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석유를 뿌린 후 방화를 하였다.78) 이중 洪淳鎭은 밖으로 나오다가 총에 희생되었고, 盧慶泰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79). 이날 교회당에서 참살당한 주민들은 대부분 천도교와 기독교인으로 일반적으로 23명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하고자 한다. 당시의 학살상황을 정한경은 「한국의 사정」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요일인 4월 15일 낮 몇 명의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와 강연이 있을 터이니 모든 남자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 교인들을 모두 교회로 집합하라고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종이 창문틈으로 군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포위하고 불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을 때에도 일본군인들은 이미 불길에 싸인 교회 건물에 계속 불을 붙였다.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을 기도했지만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교회 밖에는 이같이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은 6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남편이 교회에 불려 갔는데 총소리가 나자 놀란 두 명의 부녀자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달려와 군인들의 틈을 비집고 교회로 접근하여하자 그들을 무참하게 죽여버렸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칼에 찔려 숨지고 40세를 넘는 다른 한 여자는 총살당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군인들은 그런 다음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80)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참살한 아리다는 곧바로 향남면 고주리로 향하였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마을이었다. 당시 고주리 주민들은 제암리의 참변을 보고 대부분이 산속으로 피신한 후였다. 그러나 발안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흥렬 일가는 ‘그놈들도 사람인데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생각으로 온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에 있었다. 수비대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김흥렬의 집으로 들이닥쳐 김흥렬을 비롯 집안에 있던 金聖烈․金世烈․金周業․金周南․金興福 등 일가족 6명을 포박하고 백낙렬의 행방을 추궁하였다.81) 김흥렬이 대답을 하지 않자 아리다는 김흥렬 가족을 짚단과 나무로 덮어놓고 석유를 뿌린 후 생화장을 했다.82) 당시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隣洞 (고죽골) 天道敎인 金興烈氏 집으로 가서 金聖烈, 金世烈, 金周男, 金周業, 金興福 等 六人을 逮捕하여 結縛하여 놓고 짚단과 나무로 덮어놓고서 石油를 뿌리고 또 生火葬을 하였다.83)
5.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
그동안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희생자는 23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23명의 숫자는 언제부터 고정화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 숫자는 일제측의 기록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3.1운동뿐만 아니라 일제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계나 학자들은 축소하거나 왜곡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일하게 제암리사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측은 당시의 제암리사건을 다음과 같이 왜곡 축소하고 있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84)
이러한 일제의 왜곡 축소된 제암리사건에 대한 진상은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각종 사료를 조사한 결과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따라서 제암리사건에 대한 접근할 수 있는 자료는 사건 담당자인 일본군 측의 보고자료와 언더우드85)․테일러86)․스코필드87)․노블88)․로이즈89) 등 기독교 선교사들과 외국인이 현장 조사한 증언 및 보도내용, 그리고 희생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일본측의 자료는 사건을 축소하거나 왜곡할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외국인의 자료는 현지 주민을 통한 현장조사라고 하지만 통역과 기록과정에서 오류가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전동례, 김순이 할머니의 경우 60여 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을 기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사료적 한계가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숫자는 해방 후 1959년 정부에서 건립한 순국기념비에 의하면 23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희생자의 숫자는 기록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12명 정도의 기독교인과 25명 정도의 한국종교인(천도교인 25명)을 불러모았다.90)
② 살해당한 기독교인수는 12명인데 그들의 이름은 입수되었고, 그들에 더하여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살해당한 남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왔었다. 한 여인은 40세가 넘었고 다른 한 여인은 10세였다. 이들 시체들은 교회 밖에서 불 수 있었다.91)
③ 언더우드 :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한국인 : 약 30명92)
④ 그가 설명한 사건 전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 그도 역시 몇 명이 피살되었는지 몰랐으나 약 30명 정도로 보았다.93)
⑤ 이 사건은 헌병과 군인이 이 마을에 들어가 명령을 내릴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마을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여 저지를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50여 명 정도가 되었다.94)
⑥ 명령대로 교회에 모인 인원은 30여 명이었다고 하는데 병정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한 후 교회에 들어가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군도와 총검으로 모두 해치웠다는 것이다.95)
⑦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집 안에 있던 여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결과, 살해된 기독교인은 12명이라 하며, (중략) 교회 안에서 살해된 나머지 남자들은 천도교인이며 25명이었다고 한다.96)
⑧ 약 30명이 교회 안으로 들어섰을 때 병사들이 소총으로 그들에게 사격을 개시했다.97)
⑨ 모든 기독교 신도와 천도교 교인들은 모두 교회에 집합하라고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98)
⑩ 30餘名의 敎人이 敎堂에 會集하여 何事가 有한가 疑惑하는 中 (중략) 堂內에서 死한 者 二十二人이요 庭內에서 死한 者 六人이라.99)
⑪ 예수교도 및 천도교도 있음에 알고 4월 15일 부하 11명을 인솔 순사, 순사보와 함께 동지에 이르자 예수교 회당에 집합한 교도들의 반항을 받자 사격으로 대항 사자 20명, 부상자 1명을 내고100)
⑫ 군대 협력으로 진압하고 폭민의 사망 32명, 부상자 약간명101)
⑬ 사상자 20명 확실, 부상자 1명은 도주 행위불명102)
⑭ 야소교회당에 교도 30여 명 집합, 불온한 상태로 해산명령에 불응하며 폭거로 나오려고 하자 발포, 死者 約 20명, 負傷者 1, 2명103)
⑮ 천도교도와 야소교도 25여 명이 야소교회당에 집합, 전부 사살104)
앞서 살펴보았듯이 제암리사건의 희생자는 기록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외국인이 현장을 취재하고 보도한 것으로 ①부터 ⑨까지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측의 기록으로 ⑪에서 ⑮까지이다. 이 두 종류의 기록에서 외국인의 기록에는 희생자의 수가 대체로 30명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제측의 기록은 20여 또는 25명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희생자 숫자의 차이는 일제측이 고의로 희생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하는 의도 분명하게 엿보이고 있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은 외국인의 취재기록 중 증언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국인의 취재는 현장중심이지만 증언한 사람 역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제암리 주민이고, 다른 하나는 제암리 인근 마을 주민이다. 이것은 취재자료의 정확성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본 자료 중 ①, ②, ⑦은 제암리 주민이 현장 또는 주변에서 본 상황을 증언한 것이며 ③, ④, ⑤, ⑥은 제암리 인근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이는 제암리사건을 주변으로부터 듣고 전언한 것이다. 이 전언한 것은 현장 또는 주변에서 본 상황보다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수는 37명이 가장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 37명의 희생자는 기독교인이 12명, 천도교인이 25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주서울 미총영사 앨런 홀쯔버그가 4월 23일과 5월 12일 미국무장관에게 두 차례 보고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달 16일에 일본군 78연대 사병들이 제암리에 들어가 남자 기독교들을 모두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마을 교회는 감리교의 교회였습니다. 커티스 영사는 보고에서 ‘남자 기독교인들이 모두 교회에 모이자 일본군은 그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사격을 가한 후에 총검과 군도로 생존자를 죽였습니다. 질문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희생자가 약 30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 바, 이 숫자는 마을주민 숫자를 감안할 때 설득력 있는 숫자라고 믿어집니다. 학살이 끝난 후 교회에 방화하였으며, 불길은 마을의 낮은 곳으로 번져 나갔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후에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모두 37명이 교회 안에서 학살된 바 그 가운데 2명은 남자를 쫓다 들어간 부인들이었다고 합니다.105)
저의 1919년 4월 23일자 보고서 제35호에서 보고드린 바와 같이 저는 여기 총영사관의 커티스 영사를 제암리에 출장시켜 일본군이 촌락을 불태웠고 30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들어온 소식에 따라 일본군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하여 교회 내에서 35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3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10명이며 천도교인은 25명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교회 안에 갇힌 남편을 구하려던 부인 2명이 노상에서 사살되었습니다. ....(중략).... 총독부는 공식사과의 표시로 매우 소규모의 구제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노블 박사에게 35명의 마을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살해된 감리교회 재건에 쓰라고 1,500엔(750달러)을 주었습니다.
커티스 영사가 직접 제암리를 찾아가 진상을 밝히기 전까지는 일본측이 내세운 37명의 학살과 마을을 파괴하게 된 구실을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106)
이 두 보고서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잇다. 처음 4월 23일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초기에는 희생자가 30명으로 알았으나 그후 입수된 소식에 의하면 희생자가 37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재차 보고한 5월 12일자에서도 역시 희생자는 37명으로 기독교 12명, 천도교 25명으로 확신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측인 총독부도 희생자가 37명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제암리에서 희생된 사람은 23명이 아니라 37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희생자의 명단에 관하여 살펴보자. 앞서 살펴보았듯이 희생자는 37명이나 현재 확인되고 있는 명단은 이 보다 훨씬 적은 23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좀더 밝혀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의 명단을 최초로 확인된 것은 제암리사건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이병헌의 기록이다. 이병헌은 제암리사건이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1926년 11월에 발행된『天道敎會月報』에 실린 「水原郡宗理院沿革」에서 천도교측 희생자 17명의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
仝年(1919년:필자) 四月 十五日에 本區 管內 鄕南面 堤岩里 傳敎師 安鍾煥 外 金興烈, 金基勳, 金基榮, 安慶淳, 金聖烈, 洪淳鎭, 安鍾麟, 金基世, 安應淳, 安相容, 安政玉, 安鍾亨, 安鍾嬅, 金世烈, 安子淳, 安好淳 諸氏는 그곳 卽 耶蘇敎堂에서 無故히 敎의 嫌疑로 燒殺을 當하고 곳곳마다 甚한 苦楚에 잇섯다.107)
이들 가운데 김흥렬․김성렬․김세열 등 김씨 3인은 고주리에서 희생된 천도교인으로 이들을 제외하면 14명의 천도교인 제암리에서 희생된 사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1명의 희생자 명단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경우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선교사들에 의해 희생자 12명의 명단을 확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108)
이와 같은 초기의 제암리사건 희생자 명단은 해방 후 1946년 이병헌의 「수원사건」과 <조선일보>의 「記憶 새로운 己未鬪爭」에 의해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天道敎人-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應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鎭 金德用 金敎學 金世基 ▲基督敎人-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109)
▲天道敎人-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興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益 金德用 金學敎 金世基 ▲基督敎人-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泰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氏(姜泰成氏婦人) 金氏(洪元植氏婦人)110)
그리고 1959년 정부에서 순국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 희생자의 확인된 명단은 23명으로 다음과 같다.
安鍾煥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政玉 安鍾燁 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德用 趙敬七 安命淳 安官淳 姜泰成婦人 洪元植婦人 安武淳 安弼淳
이상의 세 기록에서 중요한 변수는 우선 희생자의 수와 명단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병헌의 「수원사건」에는 25명, 〈조선일보〉에는 22명, 순국기념비에는 23명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경우 강태성 부인과 홍원식 부인을 포함하면 24명이 되는데 이 세 기록도 희생자의 수와 명단이 일치하기 않고 있다. 그러면 앞서 살펴본 「수원군종리원연혁」의 명단을 포함하여 네 기록에 거명된 희생자 명단을 살펴보면 <표2>와 같다.
<표2>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
이름 |
전 거 |
비고 | |||||
수원군종리원연혁 |
조선일보 |
수원사건 |
3.1운동과 제암리사건 |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
순국기념탑/강신범 | ||
1926. 11 |
1946. 2. 26 |
1946. 3 |
1997 |
1983 |
1959. 4 | ||
安鍾煥 |
○ |
○ |
○ |
○ |
○ |
□/△ |
|
金興烈 |
○ |
|
|
고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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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주리 |
金基勳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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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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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基榮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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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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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慶淳 |
○ |
○ |
○ |
○ |
○ |
□/△ |
|
金聖烈 |
○ |
|
|
고주리 |
|
|
고주리 |
洪淳鎭 |
○ |
○ |
○ |
○ |
○ |
□/△ |
洪淳益 |
安鍾麟 |
○ |
|
○ |
○ |
○ |
□/△ |
|
金基世 |
○ |
○ |
○ |
고주리 |
|
|
金世基 |
安應淳 |
○ |
△ |
|
|
|
|
|
安政玉 |
○ |
○ |
○ |
○ |
○ |
□/△ |
|
安鍾亨 |
○ |
|
|
|
|
|
|
安鍾燁 |
○ |
○ |
○ |
□ |
○ |
□/△ |
|
金世烈 |
○ |
|
|
고주리 |
|
|
고주리 |
安子淳 |
○ |
|
|
|
|
|
|
安好淳 |
○ |
|
|
|
|
|
|
安鍾樂 |
|
△ |
△ |
□ |
△ |
□/△ |
|
安鍾厚 |
|
△ |
△ |
△ |
△ |
□/△ |
|
安珍淳 |
|
△ |
△ |
△ |
|
□/△ |
|
安鳳淳 |
|
△ |
△ |
△ |
○ |
□/△ |
|
安相容 |
|
△ |
△ |
○ |
○ |
□/△ |
|
安有淳 |
|
△ |
△ |
□ |
○ |
□/△ |
|
姜泰成 |
|
△ |
△ |
△ |
△ |
□/△ |
|
金正憲 |
|
△ |
△ |
△ |
○ |
□/△ |
|
洪元植 |
|
△ |
△ |
△ |
△ |
□/△ |
|
安興淳 |
|
○ |
○ |
|
|
|
|
金德用 |
|
○ |
○ |
△ |
○ |
□/△ |
|
金敎學 |
|
○ |
○ |
|
|
|
金學敎 |
趙敬七 |
|
○ |
○ |
△ |
△ |
□/△ |
|
安鍾鎭 |
|
○ |
|
|
|
|
|
安命淳 |
|
○ |
○ |
□ |
○ |
□/△ |
|
安官淳 |
|
○ |
○ |
○ |
○ |
□/△ |
|
강태성부인 |
|
|
△ |
△ |
△ |
□/△ |
김씨 |
홍원식부인 |
|
|
△ |
△ |
△ |
□/△ |
김씨 |
安武淳 |
|
|
|
□ |
○ |
□/△ |
|
아기 |
|
|
|
|
○ |
|
|
安弼淳 |
|
|
|
□ |
△ |
□/△ |
|
盧慶泰 |
|
|
|
|
△ |
|
생존자 |
安泰淳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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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이병헌 |
|
이병헌 |
이덕주 |
김선진 |
강신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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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에서 보듯이 희생자의 명단은 기록자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병헌의 경우도 1926년의 기록과 1946년의 기록도 다르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오차는 당시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다만 관계된 사람의 증언이나 전언을 통해 기록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26년의 「수원군종리원연혁」과 1949년의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의 기록을 먼저 살펴보면 첫째 세 번 모두 기록된 희생자는 6명으로 안종환․안경순․홍순진․김기세․안정옥․안종환이며, 두번 기록된 희생자는 17명으로 안종린․안경순․안종락․안진순․안종후․안봉순․안상용․안유순․강태성․김정헌․홍원식․안흥순․김덕용․조경칠․김교학․안명순․안관순 등이다. 그리고 한번만 기록된 희생자는 9명으로 김기훈․김기영․안종형․안자순․안종진․안호순․강태성부인․홍원식부인․안태순 등으로, 이들은 희생자는 모두 32명에 이른다.
한편 1959년 4월 순국기념탑이 건립되면서 명단에 오른 희생자는 23명인데 이들은 앞서 보았듯이 안종환․안경순․홍순진․안종린․안정옥․안종엽․안종락․안종후․안진순․안봉순․안상용․안유순․강태성․김정헌․홍원식․김덕용․조경칠․안명순․안관순․강태성부인․홍원식부인․안무순․안필순 등으로 현재 공식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중 1946년 이전에 확인된 희생자의 명단에서 누락된 희생자는 김기훈․김기영․김기세․안응순․안종형․안호순․안자순․김교학․안종진․안필순․안태진 등으로 11명에 해당한다. 여기서 순국기념탑에 오른 23명과 오르지 않은 11명을 모두 합치면 34명에 이른다. 따라서 제암리사건에서 희생된 사람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37명이라면 일단 희생자 명단에 오른 34명을 모두 포함한다하더라도 3명의 희생자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더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희생자에 대한 종교적 분석이다. 이 역시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필자의 의견으로는 기독교인 12명과 천도교인 25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고 있는 것은 34명의 희생자만 가능하다.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1959년 건립된 순국기념탑에 기록된 23명을 기준으로 논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표2>에서 본 바와 같이 이를 기준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천도교인의 희생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원군종리원연혁-安鍾煥, 金基勳, 金基榮,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金基世, 安興淳, 安相容, 安政玉, 安鍾亨, 安鍾嬅, 安子淳, 安好淳
▲조선일보-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興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益, 金德用, 金學敎, 金世基
▲수원사건-安政玉, 安鍾麟, 安慶淳, 安興淳, 安鍾煥, 安鍾燁, 安命淳, 安官淳, 趙敬七, 洪淳鎭, 金德用, 金敎學, 金世基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安鍾煥,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政玉, 安鍾燁,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金正憲, 金德用, 安命淳, 安官淳, 安武淳, 아기
▲3.1운동과 제암리사건-安鍾煥,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政玉, 安相容, 安官淳
천도교인의 경우 「수원군종리원연혁」은 14명, 〈조선일보>는 14명, 「수원사건」은 13명, 『일제의 학살』은 15명, 「3.1운동과 제암리사건」은 7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희생자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수원사건-安鍾樂 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泰淳 安相容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氏(姜泰成氏婦人) 金氏(洪元植氏婦人)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安鍾樂, 安鍾厚, 姜泰成, 洪元植, 趙敬七, 강태성부인, 홍원식부인, 安弼淳
▲3.1운동과 제암리사건-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金德用, 趙敬七, 강태성부인, 홍원식부인
기독교인의 경우 <조선일보>는 9명, 「수원사건」은 12명, 『일제의 학살』은 8명, 「3.1운동과 제암리사건」은 1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암리사건에서 희생자의 종교상황 역시 기록마다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언이거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중 문제가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도교인이 기독교인으로 된 경우-안상용, 김덕용, 조경칠 등이 있다. 안상용은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에서는 천도교인으로, 「제암리사건」과 『일제의 학살』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안상용은 안경순의 아들로 안경순은 천도교인으로 마땅히 천도교인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김덕용은 <조선일보>, 「수원사건」, 『일제의 학살』에서는 천도교인으로, 「제암리사건」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김덕용은 해방 직후 기록한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에 다 신빙성을 둔다면 이 역시 천도교인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조경칠은 해방 직후 기록한 <조선일보>와 「수원사건」에서는 천도교인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기록한 「제암리사건」과 『일제의 학살』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역시 해방 직후 증언을 통해 확인한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보고 천도교인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둘째, 희생자 확인만 되고 종교상황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에 해당하는 희생자는 안종엽, 안종락, 안유순, 안명순, 안무순, 안필순 등이다. 먼저 안종엽은 안정옥의 아들로 1914년 수원교구 교당 건축시에 2원을 기부한 사실111)로 보아 안정엽은 천도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안무순은 안종린의 아들, 안명순은 안종엽의 아들로 이들은 모두 부친이 천도교인으로 이들 또한 천도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안종락은 수원교구 강도원과 공선원으로 활동한 안정옥112)의 조카로 종교는 천도교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안유순은 안봉순의 아들로, 안봉순은 기독교인임으로 기독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안필순은 『일제의 학살』에서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도교인이 기독교인으로 분류되거나 종교상황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에서 이를 좀더 세분하면 안상용, 김덕용, 조경칠, 안종엽, 안명순, 안무순, 안종락은 천도교인으로, 안유순과 안필순은 기독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의 논고에서 확인된 34명의 희생자의 명단과 종교분포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도교인-安鍾煥, 金基勳, 金基榮, 安慶淳, 洪淳鎭, 安鍾麟, 安應淳, 金基世, 安興淳, 安相容, 安政玉, 安鍾亨, 安鍾燁, 安子淳, 安好淳, 안종락, 김덕용, 김학교, 조경칠, 안종진, 안명순, 안무순, 안관순(이상 23명)
▲기독교인-安鍾厚 安珍淳 安鳳淳 安泰淳 安有淳 姜泰成 金正憲 洪元植 安弼淳, 金氏(姜泰成氏婦人) 金氏(洪元植氏婦人)(이상 11명)
5. 맺음말
이상으로 본고에서는 수원지역의 3.1운동과 제암리사건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대체로 종교단체의 활동이 다른 지역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3.1운동의 핵심적 세력이 천도교와 기독교의 종교단체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천도교의 경우 1860년 4월 5일 동학이 창도된 이후 1861년에 이미 경기도 남부지역에 포교가 되었으며, 1880년대에는 수원지역에 포교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의 기본 조직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을 재정립한 후에는 근대적 조직인 교구로 전환 교육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동학혁명과 개화운동을 거치면서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다. 수원지역에는 수원교구와 남양교구가 설립되어 상호 보완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이는 3.1독립운동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즉, 수원교구에서 활동하였던 이병헌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있던 태화관과 탑골공원을 왕래하면서 정보를 전달하였으며, 그 이튿날부터는 남대문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일경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수원교구로 피신하였으며, 수원교구에서도 적극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전달하였다. 이어 수원교구에서는 남양교구의 중요 지도자와 함께 수원지역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며 마침내 4월 초부터 남양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은 수원지역의 3.1운동은 수원의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중앙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3월 16일 서장대와 연무대의 만세시위와 북수리 천도교당에서 만세운동을 준비를 시발로 하여 3월 23일 서호의 만세시위, 25일 청년학생과 노동자의 만세시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의 상가철시, 29일 기생조합의 만세시위, 남양지역 성호면의 3월 25일 만세시위와 3월 29일 오산장날 시위, 송산면의 3월 26일․27일 만세세위, 우정면과 장안면의 4월 1일 봉화시위와 4월 3일 우정면사무소․장안면사무소․화수리주재소 습격사건, 향남면과 팔탄면의 4월 5일 발안장터시위와 주재소 습격사건, 동탄면의 3월 21일 만세시위, 양감면의 만세시위 등 3월 중순부터 4월 5일까지 어느 지방보다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중 천도교인이 참여한 것은 3월 16일 북수리 교당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한 것을 비롯하여 천도교 교주 구출운동, 3월 25일과 29일 성호면의 만세운동, 4월 3일의 화수리 만세운동과 주재소 습격, 4월 5일 발안장날 만세운동와 주재소 습격, 동탄면․음덕면․비봉면․마도면 등에서 적극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천도교인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보복만행으로 이어졌다. 이 보복만행과정에서 천도교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한편 제암리사건은 1959년 4월 순국기념탑이 건립되면서 23명이 희생된 것으로 공식화되고 있다. 그러나 제암리사건에서 희생된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은 37명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한 기록은 희생자의 수를 37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해방 이후 23명으로 축소되었다. 특히 23명의 희생자수는 일제의 축소 보고한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의문점이 없지 않지만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당시 제암리 마을의 증언자들은 하나같이 천도교인 25명, 기독교인 12명으로 증언하고 있다. 또한 희생자 중 초기에 기록된 사람이 누락되는가 하면 초기에 없던 사람이 나중에 포함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본고를 계기로 제암리사건에 대한 사건 경위를 비롯하여 희생자 수, 명단, 종교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국가보훈처 제3회 보훈학술논문 입상작)
☞ 출처 : < http://wednes.net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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