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인간이 천지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창세 역사 시대인 ‘환단 시대 이래
한민족의 역사 이야기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39 고구려 요서 10성의 명칭과 위치를 밝혀 준다!
朝代記(조대기)에 曰(왈) 「太祖隆武三年(태조융무삼년)에
築遼西十城(축요서십성)하사 以備漢(이비한)하시니
十城(십성)은 一曰安市(일왈안시)니 在開平府東北七十里(재개평부동북칠십리)오
二曰石城(이왈석성)이니 在建安西五十里(재건안서오십리)오
三曰建安(삼왈건안)이니 在安市南七十里(재안시남칠십리)오
四曰建興(사왈건흥)이니 在灤河西(재난하서)오
五曰遼東(오왈요동)이니 在昌黎西南境(재창려서남경)이오
六曰豐城(육왈풍성)이니 在安市西北一百里(재안시서북일백리)오
七曰韓城(칠왈한성)이니 在豐城南二百里(재풍성남이백리)오
八曰玉田堡(팔왈옥전보)니 舊遼東國(구요동국)이니
在韓城西南六十里(재한성서남육십리)오
九曰澤城(구왈택성)이니 在遼澤西南五十里(재요택서남오십리)오
十曰遼澤(십왈요택)이니 在黃河北流左岸(재황하북류좌안)이라
五年春正月(오년춘정월)에 又築白岩城桶道城(우축백암성용도성)하시니라.」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6세 태조 무열제, 단기 2388, 서기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安市城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建安城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建興城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遼東城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豊城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韓城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玉田堡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澤城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째는 요택성遼澤城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융무 5년(단기 2390, 서기 57) 봄 정월에, 또 백암성白岩城과 용도성桶道城을 쌓으셨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위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건안성建安城이 당산 경내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건안성의 북쪽에 있으며, 요동성遼東城은 난하 동쪽 창려의 남쪽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당시 서울의 저명한 사학 교수들은 모두 건안성, 안시성, 요동성은 요하 동쪽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당서舊唐書』 「장검열전張儉列傳」을 보면 당 태종은 장검張儉에게 요동을 공격하게 한다. 원문을 보면 ‘CE 644년에 당 태종은 요동을 정벌하기에 앞서 장검에게 번병蕃兵을 거느리게 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삼국사기』에서는 ‘유幽, 영營 두 도독부의 군사와 거란, 해, 말갈을 거느리고’라고 적혀 있다. 태종은 장검으로 하여금 요동을 공격하여 그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그랬더니 장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에 이르러 강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요수를 건너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은 장검이 겁이 많고 유약한 것을 보고 낙양으로 소환하였다.
그해 11월 소환된 장검이 당 태종에게 지형과 군사 행동에 대하여 말하니 당 태종은 듣고 기뻐하여 장검을 당 태종이 거느린 6군(어영군)의 행군총관에 명하고 거란, 해, 말갈 등 여러 무리를 거느리고 6군의 선봉에 서게 하였다. 6군은 어영을 호위하는 내內, 외外, 전前, 후後, 좌左, 우右 6군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 장검이 6군의 선봉에 섰다는 것은 당제가 거느린 어영군의 선봉에 섰다는 뜻이다.
장검은 당 태종으로부터 행군총관을 명받고 당제와 함께 이동하였는데, 645년 2월 11일 낙양을 출발하여 3월 24일 정주를 지나 유주幽州로 가던 중 당 태종은 보정 동북방 150리에 있는 신성로에서 장검에게 요동으로 가서 막리지 연개소문을 요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稱莫離支將 至遼東 詔儉率兵 自新城路 邀擊之].
장검열전에는 당 태종이 명령을 내린 일자가 나오지 않으나, 3월 24일 정주를 지나 보정 동북방 150리에 있는 신성新城까지 가는 데 며칠 걸렸을 것이므로, 장검이 신성로에서 나와 막리지 요격에 나선 날은 대략 3월 26~27일경으로 보인다. 이 신성의 위치는 탁군 신창현 서쪽 30리 되는 곳이고, 보정부 동북 150리 되는 곳이다.[涿郡 新昌縣..今新城東三十里. 補注] [保定府...新城 府 東北 150里 皇朝續文獻通考].
당 태종의 명령을 받은 장검은 신성로에서 나와 4월 1일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신성로에서 나온 날이 3월 27~28일경이므로, 신성로에서 나와 요수를 건널 때까지 대략 3~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보정부 동북 150리에 있는 신성에서 3~4일 만에 건널 수 있는 요수는 동쪽으로 영정하永定河나 조백하潮白河를 넘어설 수 없다. 또 장검은 4월 1일 요수를 건넌 다음 4월 5일에 건안성을 공격했으니 건안성의 위치는 아무리 동쪽으로 잡아도 요수(조백하나 영정하 추정)에서 동쪽으로 보기병이 4일 동안 진군한 거리를 벗어날 수 없다.
대규모 중국 왕조 정벌군은 하루 40리씩 진군하였는데, 하루 40리씩 5일간 진군하면 200리가 되고, 좀 더 빨리 진군했다고 하더라도 250~300리를 넘어설 수 없다. 북경에서 300리 되는 곳은 우북평군右北平郡이 있던 곳으로 이곳은 당산唐山 경내가 된다.
즉 중국의 정사인 『구당서』, 『신당서』 장검열전에 의하면 1차 여당전쟁麗唐戰爭 전황에 나오는 건안성은 조백하나 영정하에서 동쪽으로 보기병이 4~5일 정도 진군한 거리에 있는 당산 방면에 있었다. 만약에 건안성이 요하 동쪽에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장검과 당제가 신성에 도착한 일자가 3월 27일이나 28일경이니, 만약 4월 1일 장검이 건넌 요수가 요하가 되려면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따져 보자. 보정 동북방 150리에 있는 신성에서 요하까지는 당시 중국 왕조 거리 관념으로는 약 2천 리가 되는데, 이 거리는 대규모 중국 왕조 정벌군 진군 속도로 약 두 달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이 거리를 3~4일 만에 도착하려면 장검과 그 부하들은 치중輜重 부대와 함께 하루 약 5백 리 정도 달릴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무림 고수여야 한다.
장검보다 두 달 먼저 유주를 출발한 이세적과 두 달 늦게 유주를 출발한 장검이 같은 날 4월 1일에 요하를 건넜다고 주장하는 강단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논리학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위작한 것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황에 나오는 건안성 위치가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건안성 위치와 맞지 않고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적혀 있는 건안성 위치가 왜 일치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고, 한국 고대사와 관련이 있는 중국 정사를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이유립이 저명한 사학 교수들도 알아내지 못한 건안성 위치를 찾아내어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지으려면, 이유립은 우주적인 대천재라야 한다. 『환단고기』 기록의 정확성에 스스로 감복하고 위서론의 감옥을 하루속히 탈출하라!
40 백제가 중국 대륙에 개척한 요서·진평군의 폐지 시기를 밝혀 준다!
十二年(십이년)에 移新羅民於泉州(이신라민어천주)하야 以實之(이실지)라
是歲(시세)에 以百濟不貢(이백제불공)으로
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견병공취요서진평등군)하니
百濟郡(백제군)이 廢(폐)하니라.
명치 12년(단기 2835, 서기 502)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郡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百濟郡이 없어지고 말았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고구려 명치 열제 12년(502년)에 대륙에 있었던 백제의 군, 요서와 진평이 고구려에 귀속되었다는 내용이다. 백제군이라고 하는 것은 백제의 정복지요 식민지를 말한다. 바로 ‘대륙백제’에 대한 기록이다. ‘대륙백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25사 가운데 하나인 『송서宋書』의 이만전夷蠻傳과 『양서梁書』의 제이전諸夷傳에 나온다. 그 시기를 언급한 기록이 『양서梁書』의 제이전諸夷傳 백제조百濟條이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자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 땅을 점령하였다.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양서』는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사서인데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점령한 것은 진晉나라 때라고 밝혔다. 진나라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魏나라를 이은 나라이다. 위의 실력자인 사마염司馬炎이 위의 마지막 황제 원제를 폐위하고 진晉을 세웠던 것이다(265년). 이것이 바로 서진西晉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서진은 사마염(시호는 무제武帝)의 사후 무능한 그의 아들인 혜제惠帝가 제위를 이었으나 곧 권력을 놓고 무제의 왕후 양씨와 혜제의 왕후 가씨, 그리고 왕족들 간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를 역사에서는 여덟 명의 왕자가 난의 주역이었다고 해서 ‘팔왕八王의 난’(290~306)이라고 한다.
이때 왕족들은 흉노, 선비 등 북방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 용병으로 온 이민족들은 서진 내부의 무력함을 목도하여 자신들의 독립을 꿈꾸게 되었다. 흉노의 왕이었던 유연劉淵은 한왕漢王을 칭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는 몇 년 후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유총이 군대를 동원하여 서진을 멸망시켰다. 나라가 망하자 건업建業(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있던 왕족 사마예司馬睿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 진나라의 명맥을 유지해 갔다. 이것이 동진東晉(317~419)이다.
『양서』의 기록에 진나라 때라는 것은 아마 서진에서 동진으로 교체되는 시기, 즉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초입으로 보인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틈을 타 백제가 각각 요서와 진평을 점령한 것이다.
요서군은 진시황秦始皇 때에 설치한 군으로 북경에서 가까운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 진평군의 위치는 『양서』의 기록에 의하면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라고 한다. 그것은 요서군의 서쪽에 인접한 지역이다.
이러한 백제의 해외 경략은 언제 끝났을까? 고구려의 힘이 절정기를 구가하던 문자명왕文咨明王(이칭異稱, 명치호왕明治好王) 12년, 502년에 백제는 고구려에 이곳을 빼앗기게 된다. 4세기 초에 백제가 요서·진평 지역으로 진출했다면 근 200년 가까이 이어 가며 대륙을 경략한 것이다.
이렇게 백제가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의 핵심 지역에 해외 영토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오호십육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라는 중국의 내부적 사정도 작용하였지만, 백제의 뛰어난 해상 활동 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하였다.
대륙백제 200년 역사는 ‘대백제 제국’의 역사 비밀을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백제는 전성기에 22담로檐魯 제도를 통해 중국 북부의 요서·진평 지역에서 중국 남부의 해안 지역을 잇고,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과 일본 열도를 포괄하는 해양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