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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두혈(善竹橋頭血) 인비아불비(人悲我不悲) 충신당국위(忠臣當國危) 불사갱하위(不死更何爲)
“선죽교, 그 머리의 피, 남들은 슬퍼하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노라 나라가 위태로운데, 충신이 죽지 않고서 그 무엇을 하리오”
퇴계선생이 지은 시인데, 백범선생이 1948년 8월 15일 쓰셨다.
무릇 ‘충신’이라고 하면, 주군과 신하의 관계를 우선 연상하여 그 봉건성부터 지적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우린 충신을 받들지 않을 수 없으니, 충신은 우선 강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일관됨’을 죽는 순간까지 가져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굳은 의지’를 높이 사지 않고, 우리가 그 어디서 인간됨의 숭고함을 찾을 것인가!
고려말 포은 정몽주 선생은 이 충신의 상징같은 인물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은 이방원 일파의 회유에 이 시조로 응수하고, 귀가하다가 선죽교 위에서 자객의 철퇴를 맞고 숨을 거둔다. 정객의 슬픈 최후였다. 한 지성(知性)의 장렬한 죽음이었다.
아마도 냉정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포은을 ‘정치적 경쟁 속의 패배자’로만 볼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승패와 상관없이, 포은은 이방원류의 무뢰배(선비를 무자비하게 격살하고 정권을 찬탈하는 무리)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 건 선비 포은의 죽기 전까지의 삶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또는 일부 권력집단이 무력으로 정권을 뒤엎는 것을 ‘쿠데타’라고 한다. 그 반란이 성공하면 혁명 또는 역성혁명으로 미화되지만, 실패하면 그 주모자들은 말그대로 반란죄, 내란죄, 역모죄로 처형된다. 그래서 “성공하면 충신(정의), 실패하면 역신(반역)”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것이다. 충(忠)과 역(逆), 정(正)과 반(反)의 갈림길이 오직 그 거사의 ‘성공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이 속담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어느 시점까지는, 즉 그 주모자들이나 주모자의 후손 또는 후계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기간까지는 그 쿠데타의 정당성을 애써 꾸밀 것이고, 쿠데타 후의 치적을 내세워 그 쿠데타를 합리화할 것이기에 맞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 되겠다.
박정희의 예가 그렇다. 박정희 18년과 그 후의 그 정신적 후계자들이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합리화할 것이지만, 언제까지 쿠데타 자체의 반역성을 미화할 수 있을 것인가. 박정희의 아들딸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말이다.
고려말 이성계, 이방원 일파에 의한 최영, 정몽주 암살, 그리고 조선왕조의 개창은 정적 살해에서 정권 찬탈로 이어지는 봉건시대 쿠데타의 전형이지만, 용비어천가로 미화되는 등 오백년 이상 정당화되었다.
사육신의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사육신’이란 이름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 것(세조 살해)이 성공했더라면 물론 그 당시 단종 임금에 의해 또는 후대에 충신으로 기려졌겠지만, 이른바 만고충신(萬古忠臣)의 영예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즉 실패했기 때문에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죽었다. 그래서 “성공하면 충신,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말은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사육신이 보여준 기개는 군신간의 대의를 중시했던 조선시대 분위기와 어울려, ‘현실적 성공 여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들을 대접하게 하는 요인이다.
어쨌든 쿠데타는 일단 그 수단이 폭력적이라 대개 유혈사태를 야기하고, 특히 민주사회에선, 야심가 집단에 의해 민주질서가 파괴되고 헌법이 유린된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결과(치적)가 좋다고 하여 그 수단(집권과정)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것은 ‘변형된 쿠데타 옹호론’으로서 배격되어 마땅하다. 박정희의 치적을 두고 그 집권과정을 합리화하는 부류가 있기에 하는 말이다.
전두환 쿠데타의 경우, 법에 의한 심판을 받았다. 왕조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이들의 비극인가? 전두환 노태우 일파는 정권이 교체된 후 사법의 심판대에 섰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를 깬 것은 ‘헌법 정신’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통치권 생성 자체가 법의 원천이 되는 지경이므로 통치권자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를 깨버린 것이다.
나라의 주인은 전두환 일파가 아니라 국민이었다. 이성계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이성계가 주인이 된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일부 분자들에 의해 정권이 뒤바뀌어지더라도 민의에 바탕한 헌법정신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52년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승만 정권하의 반역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백범선생 암살은,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의 물꼬를 트려한 백범, 또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는 백범을 국가 안보, 정권 안보의 위험요소로 간주한데서 연유한다. 이러한 간주행위는 이승만정권의 정당성을 긍정할 때 성립되는 논리이다. 설령 그 정당성을 긍정한다 해도 요인 암살을 통해 정치세력을 제거한다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백범을 기어코 살해한 것은 당시 우리 정치의 후진성과 비열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백범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분투한 노애국자가 아니던가.
필자가 생각컨대, 백범선생은 반쪽자리 이북정권은 물론 반쪽자리 이남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남정권은 친일파 청산을 포기한 정권이었다.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려한 원칙론자인 백범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민족의 운명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을 예비하는 5.10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이 그것이었다. 이 단선단정의 결말로써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8월 15일 그 날, 백범은 이 휘호를 썼다.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붓끝 먹물에서 포은 정몽주의 피를 보았을까? 자신의 눈물을 보았을까?
냉전체제에 함몰당하는 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민족의 역량, 극복하려는 노력은 커녕 우선 시세에 편승하기에 바쁜 일부 지도자들에 대한 상념 때문에 슬퍼했을 것이다.
다시 포은 정몽주!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치적 압박과 이에 대항할 물리적 역량의 열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종결되리란 것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범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백범은 치하포에서 왜놈을 죽일 때부터, 죽고 사는 문제에선 이미 걸림이 없었겠으나,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애족심 때문에, 그 힘이 부치는 것 때문에 통분해 했을 것이다.
백범선생의 비참한 최후, 그리고 개성 선죽교에서 머리를 철퇴를 맞고 쓰러지는 충신의 이미지가 자꾸 겹쳐진다. 백범선생은 이 휘호를 쓰면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하다.
이 휘호를 쓰고 난 뒤, 열달여가 지난 그 날, 경교장의 피는 선죽교의 피처럼 선연했으리라 !
(2001년 봄, 맹강현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