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이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줄여서 <기신론(起信論)>이라고도 하는데,
큰 믿음을 일으키는 글이라는 뜻이다.
‘기신(起信)’이란 이 논의 글에 의해 중생의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 여기서 ‘신(信)’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여기는 믿음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은 불교의 논장에 들어 있는 책이지만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철학 내지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이 어떤 것인가, 그 정체를 <기신론>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책은 없다.
‘마음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경전 속에 나오는 구절처럼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을 모르는 것이 중생이다.
그런데 마음에 대해 이처럼 논리 정연하게 분석한
<기신론>의 내용을 보면 실로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행의 요지를 간명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설해서
수행의 지침까지 명쾌하게 밝혀놓았다.
이러한 논서를 이미 고대에 편찬했다는 것은 놀라울 뿐이다.
<대승기신론> 저자가 마명(馬鳴, 아슈바고샤, 100∼160?)
보살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인도 브라만 출신의 대학자였으나, 불교에 귀의해
당시 인도의 학문중심지, 쿠샨제국(Kushan Empire) 마가다 지방을
비롯해 중앙아시아까지 그의 포교활동이 전개됐다고 한다.
그가 <대승기신론>을 저술한 것은 불교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며,
이로 인해 대승사상이 크게 떨쳐 그가 대승불교를 중흥시켰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기신론>이 <능가경(楞伽經)>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그 저자를 마명(馬鳴)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마명이 AD 1~2세기 무렵의 인물이라고 할 때,
<능가경(入楞伽經)>이나 여래장사상의 성립은 AD 4세기 경
무착(無着, 310~390)과 세친(世親, 320~400?) 형제의 활동이
있었을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은 AD 4세기 이전에 성립됐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대승기신론>는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티베트 역은 없고
한역본만 있는 탓에 인도에서 찬술된 것인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僞經)인지조차 확실치 않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도 찬술설과 중국에서 조성된 위경이라는 설이
대립돼 있다.
그러나 한편, <대승기신론>은 진제(眞諦) 스님과 관련이 없으며
진제는 단순히 번역자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능가경>이 <기신론>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미루어서
<능가경>을 번역한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527) 등,
이 계통의 인도 논사에 의해 찬술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오늘날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인도에서 형성된 논을, 중국에 들어온 인도나
중앙아시아 역경사들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역경에 참여한 중국인 역경사들이 확대 정리한
논서로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대승기신론>은 중국 양(梁)나라 때 진제(眞諦, 499∼569)와
당나라 때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의 한역본이 각기 전하며,
한국에는 실차난타 한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대승기신론> 주해서인 <대상기신론소>를 저술한
신라 원효(元曉, 617~686) 대사는 <대승기신론>이란 제목에서
“‘대(大)’란 진리의 당체(當體), 이 논의 근본 본체(宗體)를 말함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탐ㆍ진ㆍ치 등 번뇌에 가려져서 나타나지 못하니 이것을 미(迷)라 하고,
그 미(迷)에서 오(悟)로 나아가는 힘을 승(乘)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에 대승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다.
이 자성청정심을 반조(反照)해 찾는 것을 기신(起信)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기신’이란 이 논의 뛰어난 기능(勝能)이니
본체(體)와 작용(用)을 합해 제목으로 삼아 <대승기신론>으로 한 것이다.
‘대승’이란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고,
그 위에서 믿음을 발하는 행위는 대승의 작용이다.
이와 같이 대승과 기신은 체와 용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대승기신론’이란 제목의 의미는,
“이 논문에 의지해서 중생들의 믿음을 일으킨다
(依此論文 起衆生信)”는 뜻이라고 정리했다.
그리고 당나라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대승은 일으킬 수 있는 것(能起)이고,
믿는 마음은 일으켜진 것(所起)이니, 대승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뜻이라고 했다.
즉, ‘대승기신’이란 말을 풀면 '대승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뜻이고,
중생이 일으키는 믿음이란 대승에서 비롯된 것이며,
‘대승’이라는 본체론적인 진리가 있기 때문에 믿음(起信)이라는
작용을 일으켜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일컫는 ‘대승(大乘)’은 소승(小乘)과 대립되는
대승이 아니라, 인간생명의 위대함[大]과 그 위대한 생명이
피안의 세계를 향해 몰입해가는 무한한 능력이 있음[乘]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 경전들은 대부분 분량이 많고 번거로운 문체,
지루한 설명이 많아서 핵심 대의를 파악하기에 어려운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은 치밀한 내용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 등 모든 면에서 대승불교 후기에 나타난
불교사상서 중 가장 뛰어난 논서이자,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시 인도에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사상,
즉 중관파(中觀派)와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의 사상을
지양ㆍ화합시켜 진(眞)과 속(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미오(迷汚) 한
현실 생활(俗)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진속일여(眞俗一如)ㆍ염정불이(染淨不二)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있어서 여러 교리사상을 받아들여
이 한권의 책 속에 대승경전에 설해져 있는
모든 사상의 진수를 요약해 종합적으로 회통(會通)했으며,
논리를 체계적으로 세워 대승불교 본질을 밝혀놓고,
인간생명의 위대함을 설한 논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치의 심오함이 마음 깊이 새겨지게 한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그 위대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깨우치면
그것이 바로 불타라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논서이다.
그리고 “모든 번뇌의 근원은 무한한 과거로부터의 습(習)에서
오는 것으로, 모든 법은 오직 자기 마음의 비춤에 있다.”고 해서,
이것이 선법수행(禪法修行)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논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심오하면서도 포괄적이다.
불교의 중요사상인 공(空)사상, 진여(眞如)사상, 유식(唯識)과 유심(唯心)사상,
실천사상으로서의 육바라밀, 지관(止觀), 아미타불 신앙 등 총망라돼 있으며,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사상의 입장에서 체계화시키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붓다의 삼신(三身)에 대한 가르침이 아주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붓다의 삼신이란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신체로 현현한
붓다의 화신(化身 nirmāṇakāya), 그간에 쌓은 공덕의 보답으로
얻은 신체로서 극락정토에 살고 있는 보신(報身 sambhogakāya),
절대 불변하는 붓다의 본질인 법신(法身 dharmakāya)을 말한다.
이 논은 불교에서 다루는 생명문제를 통합해 체계화한
대승불교 개론서라 하겠다.
그리고 이 논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일심(一心)을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또한 일심이 가진 특성을 체(體), 상(相), 용(用) 삼대의 이론으로
전개해 궁극적으로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게 하며,
나아가 실천적 행을 닦도록 한 것이다.
특히 일심(一心)의 설명은 <기신론> 특유의 독창적인 논리를 전개해
명쾌한 분석을 함으로써 이후 일심사상(一心思想)은
동아시아 불교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신라의 원효(元曉) 대사 사상 전반의 그 밑바탕엔
일심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유명한 화쟁사상(和諍思想) 역시 일심에 기초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일심의 핵심 포인트는 중생의 마음이 바로 대승이라 천명한 것이며,
이 대승의 근원이 진여라는 것이다.
중생의 본래 마음이 진여며, 또한 일체 만법이 진여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대승기신론>의 주요내용이다.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귀경술의(歸敬述意)의 게송이 서두에 설해져 있고,
본론에 해당되는 정립논체(正立論體)의 대목이 있으며,
마지막에 총결회향(總結廻向)의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그리고 본론인 정립논체의 대목이 다시 논을 지은 이유를 밝힌 인연분(因緣分),
논의 주제를 제시하는 입의분(立義分),
제시된 주제를 자세히 풀이하는 해석분(解釋分),
어떻게 믿는 마음을 내어 수행할 것인가를 밝힌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수행을 권하고 그 이익을 말하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으로 나누어진다.
‘논(論)’이란 대개의 경우, 특정 경전에 대한 논술이라는 일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기신론>의 경우는 어느 특정한 경전에 국한시켜
논해 놓은 내용이 아니고 대승의 요지를 두루 포괄적으로 논했다 할 수 있다.
물론 <능가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해 <능가경>의 별신서(別伸書)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승의 대의를 독특한 논리를
전개해 종합적으로 논했다.
일심(一心)을 의지해 진여문과 생멸문, 이렇게 두 문을 열어
대승의 법(法)과 의(義)를 설명한 것이 <기신론>의 대의이다.
예로부터 이것을 ‘의일심 개이문(依一心 開二門)’이라 했다.
<대승기신론>은 화엄종, 천태종, 정토종, 선종(조계종) 등
모든 종파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 강원에서 필수과목인 4교과에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과 함께 <기신론>이 포함될 정도로 존중되고 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이 비록 여래장 계열의 논서이나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를 설하고 있는 점이
여타 여래장에 관한 설과 다른 점이다.
즉, 번뇌에 덮여있는 여래장에서 자성청정의 여래장으로 현현시키는
본래 부처의 회복과정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생멸심(生滅心)과 불생멸심(不生滅心)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일반 여래장설(如來藏說)은 여래장[佛性]의 자성이 본디 청정함에도
어떻게 번뇌에 얽혀 있게 됐는지에 대해서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승기신론>에서는 여래장을 연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중생이 중생이 되는 연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대승기신론>에서는 불생멸심의 여래장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무명(無明)의 영향을 받아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인
아뢰야식으로 바뀌어 연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진리의 세계가 하나인 줄 모르는 근본 무명(無明)이 작용해
한 생각이 움직이면[業相], 대상을 보는 주관이 생기고[轉識],
이렇게 보는 주관으로 해서 객관이 나타난다[現識].
그래서 주관을 자아로 삼고 객관을 아소(我所, 내 것)로 삼아,
사랑과 미움을 일으키는 자아의식인 말나식(末那識)이 생긴다.
그 마음을 의지하므로 고락(苦樂)이 생기고, 이에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계속 이어지면서[相續識] 대상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執取相],
집착에 의해 대상을 헤아리면서 그에 대해 갖가지 업을 일으킨다[起業相].
그리고 그 업에 매어 고통 받으니 자유롭지 못한 중생이다.
이것이 무명으로 인해 본디 청정했던 여래장이 연기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혹은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라고 한다.
이는 이전의 여래장설에서는 설명해 주지 못했던, 중생이 중생이 되는 연유이다.
<대승기신론>은 이처럼 여래장이 무명 번뇌의 영향을 받는 과정을
연기적으로 전개해 보여주고 있다.』 - 지운 스님
그런데 문제는, <대승기신론>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이라서
불교의 주류 흐름인 「초기불교-아비담마-반야ㆍ중관-유식」의 관점과는
다른, 불교의 주류에 들지 못하는 여래장 계열의 이론서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대승기시론>에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이론이지
초기불교의 이론은 아니라고 한다. 초기경전들에 공(空)이라는 술어가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공이니 법공이니 구공이니 하는
용어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법을 중심으로 한 체계가 아니라
믿음(信)을 중심으로 삼는 체계인데, 이러한 여래장 계열의
대표 논서가 바로 <대승기신론>이라는 것이며,
이는 믿음의 문제를 핵심에 두고 있는 논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이나 일심(一心) 등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힌두교의 자아(自我-atman) 이론과 같아서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아(無我)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起信)이 중요하다.
제 아무리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논리정연하게 전개된다고 해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이론 역시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관과 관계를 맺지 않는 순수객관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그것은 단순한 관념 내지는 표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바로 대승 자체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야말로 궁극적인 진리를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해주는
최고의 실천행인 것이다. <기신론>은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구나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이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이론이지 초기불교의 이론은 아니라고 폄하지만,
불교를 초기불교에 국한시켜 한정짓는다는 것은
시대변천을 무시한 닫힌 생각이다.
대승은 열린 사상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무한히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해야 함이 정견(正見)이다.
<대승기신론>은 워낙 명저라서 고래로 이 논에 대한 주석서가 많이 나와
중세까지 나온 것만 해도 무려 190여 종에 달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발간된 것을 보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의 삼국에서 역대로 수많은
주소가(註疏家)들이 나왔으나 예로부터 가장 많이 읽혀온 주석서로
‘기신론 삼대소(起信論三大疏)’가 있다.
• 신라 원효(元曉)가 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 중국(수) 정영 혜원(淨影 慧遠, 523∼592)이 쓴 <기신론의소(起信論義疏)>,
• 중국(당) 현수 법장(賢首 法藏, 643∼712)이 쓴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이 3대 소 중에서도 원효(元曉) 대사가 쓴 <기신론소>가 최고로 평가되는 명저이다.
기신론 3대소 중 원효의 <기신론소>는 그 내용에 있어서
단연 혜원의 <대승의장>를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물론 중국ㆍ일본에서도 기신론연구에 기본문헌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일명 <해동소(海東疏)>라 하고,
혜원의 <대승기신론의소>를 <정영소(淨影疏)>,
현수가 지은 <대승기신론의기>를 <현수소(賢首疏)>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최근(2015년) 독일에서 발견된 <대승기신론소>는 돈황본이 아니라
중국 투르판 본으로 <대승기신론소>의 여러 이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은 현존 최고본인 돈황본보다 200여년 앞서는 8~10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번 투르판본 <대승기신론소>의 발견으로 원효 대사의 명성과 사상적 영향이
중앙아시아 돈황과 투르판까지 광범위하게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대승기신론의 주요 내용을 검토해보자. <기신론>은 대승의 믿음으로 향하는 이론체계를,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 육자염불(六字念佛)회향」으로 요약했다.
먼저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을 살펴보자,
불교교학에서 ‘문(門, skt. dvara)’은 출입문이 아니라
학설, 분야, 가르침 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법문(法門)’이라 할 때의 ‘문(門)’도 가르침을 말한다.
여기에서 ‘문’도 마찬가지 개념이다.
일심이문(一心二門)이란 한 마음에 두 개의 문(분야, 가르침)이 있다는 말인데,
때 묻지 않은 중생의 본래 마음이 바로 대승이고, 대승의 근원이 진여이며, 일심이다.
또한 일체만법이 진여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일심은 진리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기신론>은 그 마음의 문에는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로 가는
진여문(眞如門)과 중생세계로 가는 생멸문(生滅門)이 있다고 했다.
진여문을 심진여문(心眞如門), 생멸문을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도 한다.
다음은 삼대(三大)를 살펴보자.
일심(一心)에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는데, 그 일심의 특징은 삼대(三大)로 표시된다.
삼대는 어떤 사물의 본체와 밖으로 드러난 형상과
그 활용성과 작용이다. 이를 줄여서 채(體)ㆍ상(相)ㆍ용(用) 삼대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삼대란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를 말하며,
일심을 체, 상, 용의 세 관점에서 본 것이다.
‘대(大)’라고 하는 것은 체ㆍ상ㆍ용이 너무나 큰 모습과 작용을
가지기 때문에 대(大)라고 한 것이다.
• 체(體)의 관점에서 일심을 보면, 악마도 신도, 부처도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모두 이 일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체(體)는 위대하다.
그래서 체대(體大)라 한다.
• 상대(相大)는 여래장을 말하는데 바로 부처의 법신이다.
즉, 부처님과 똑 같은 훌륭한 작용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며,
또한 이 일심에는 무량한 덕상(德相)이 구비돼 있기 때문에 상대(相大)라고 한다.
•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용대(用大)라고 한다.
그런데 한 마음이 진여의 세계로 갈 가능성이 나타날 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불리어지고,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지는 이유를
설명할 때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불리어진다.
이 중생심이 여래장도 되고 아뢰야식도 된다.
진여의 세계로 가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언도도단(言語道斷),
말과 언어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신론>의 주안점은
진여문의 설명이 아니라 생멸문의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면 사신(四信)을 검토해보자.
일심의 상태에서 진여문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한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여(眞如)의 마음자리와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대승기신론’에서 ‘기신(起信)’이란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말이다.
그 믿음의 대상으로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즉, 일심의 상태에서
진여문의 상태로 가고 일심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네 가지 믿음이 바로 진여의 마음자리와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이론만 가지고는 안 된다. 진여의 마음자리와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믿음 없이 불교라 할 수 있겠는가.
다음은 오행(五行)의 수행을 보자.
마음에 아무리 진여의 문과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수행이 없다면 깨달음은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 요청된다.
이러한 수행이 오행인데, 이는 육바라밀을 뜻한다.
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이 육바라밀인데,
이 육바라밀 중에서 선정과 지혜를 지관(止觀)으로 묶어서 다섯으로 줄인 것이다.
즉, 육바라밀에서의 선정과 반야를 합해 지관문(止觀門)으로 정리했다.
이는 선정과 지혜를 겸한 수행이어야만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바탕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오행이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육자염불(六字念佛)은 6자로 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을 말한다.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부처님은 훌륭한 방편을 말해주셨다.
즉, 승방편(勝方便)이라고 하는 바로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다.
그래서 전의염불(專意念佛)의 인연에 의해 원에 따라 타방불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며 영원히 삼악도를 떠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뜻을 바르게 하고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원하는 대로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의염불(專意念佛)이란 마음을 하나로 해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부처님을 관상(觀想)하는 것이 아니라 불명(佛名)을 부르는 것이다.
근기가 수승해 지관(止觀)을 행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좋고,
염불로써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좋다.
선도 염불도 함께 현세의 가르침인 것이다.
선(禪)은 현세에서 즉심성불(卽心成佛)함을 바라고,
염불은 극락왕생을 원함으로써 현세에 안심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불교는 마음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고,
그 마음은 큰 수레와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중생심, 일심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다.
진리로 가는 문[진여문]과 나고 죽는 고통의 윤회로 가는 문[생멸문]이다.
또 이 마음에 본체[체]와 성스러운 성상[상]과 오묘한 작용[용]의 특징이 있는데,
법신ㆍ보신ㆍ화신의 능력과 같다.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돌아가고 체ㆍ상ㆍ용 삼대의 본래 특징을 찾기 위해서는
마음자리의 진여 및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오행과 육자염불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기신론>의 요지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