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자아의 소멸로 일어나는 나의 희열이 된 사람에게,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는 이 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의 상태를 어떤 것인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32.
베다들에서는 분명히 ‘그대는 그것이다(탓트밤아시)’ 라고 선언합니다.
나를 찾아서 그 안에 있지 않고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강함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로서 늘 있기 때문입니다.
33.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라거나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른 것에 의해 알려지는 나,
즉 두 개의 나가 있어서 하나의 나가 다른 나를 안다는 말입니까?
오직 하나로 있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달은 모든 이들의 체험입니다.
34.
자연스럽고 참된 실재는 모두의 가슴 안에 늘 있습니다.
거기서 그것을 깨달아 그것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은 있다’, ‘그것은 없다’, ‘그것은 형상이 있다’, ‘그것은 형상이 없다’,
‘그것은 하나다’, ‘그것은 둘이다’, ‘그것은 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다투는 것,
이것은 마야의 유희입니다.
35.
항상 있는 실재를 찾아내어
그 안에 있는 것이 진정한 성취(싯디)입니다.
다른 모든 성취들은 꿈속에서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잠에 있던 것들이 있습니까?
비실재를 벗어버리고 진리의 상태에 머무는 이들이
그런 것들에 속겠습니까?
36.
만약 우리가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아함 브람아스미)’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 있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것으로 있는데,
왜 우리는 ‘나는 그것이다.’라고 늘 생각해야 합니까?
‘나는 사람이다.’라고 늘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37.
‘탐구를 하는 중에는 이원, 이루고 나면 일원’ 이라는 이 신념doctrine도 잘못된 것입니다.
열심히 자신을 찾을 때나,
나중에 자신을 발견했을 때나,
이야기 속의 열 번째 사람은 열 번째 사람이었을 뿐
다른 누고도 아니었습니다.
38.
만약 자신을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행위의 열매들을 거두어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인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 나를 깨달으면,
행위자라는 느낌은 사라집니다. 세 가지 카르마들 은 없어집니다.
이러한 해방은 영원합니다.
39.
속박과 자유에 대한 생각은
‘나는 속박되어 있다.’라고 느끼는 동안에만 지속됩니다.
‘속박되어 있는 자인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영원하며 늘 자유로운 나가 남습니다.
속박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면,
그것과 더불어 자유에 대한 생각도 사라집니다.
40.
만약 ‘형상이 있고, 형상이 없는 것, 형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이 세 가지 해방 중 어느 것이 최종적인 해방인가?’라고 묻는다면 “해방은 ‘형상이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라고 묻는 자아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