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크로드 隊商 > |
사진설명: 장안성 서문을 통과해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 상인들의 행렬을 조각한 것. 당나라 시절 장안은 세계 최고의 국제도시로 ‘차이니즈 드림’을 찾아 각 국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수많은 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는 수도(首都)일 수밖에 없다. “정치권력의 핵심인 천자(혹은 왕)가 있는 곳이고, 자연스레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역량이 총집결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지역간 도시 간 교통과 교류가 매우 활달한 오늘날에도 수도의 의미는 여전히 중요한데, 하물며 옛날에는 어떠했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수도가 함락되면 나라가 망하는 것과 직결된 것만 봐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역사에서 수도하면 떠오르는 곳이 ‘낙양(洛陽)’보다는 그래도 ‘장안(長安)’, 즉 서안(西安)이다.
서안이 왜 수도의 대명사가 됐을까. 서안의 역사를 살피기 전에 중국은 서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중국은 서안, 낙양, 개봉, 항주, 남경, 북경 등 6곳을 ‘전국적인 고도’로 지정했다. 1988년 8월엔 은허(殷墟)가 7대 고도의 하나로 인정됐고, 1993년 8월엔 정주(鄭州)를 8대 고도에 포함시키자는 의견이 개진됐다. 고도로 지정하자는 곳은 늘어났지만, 서안은 항상 ‘부동(不動)의 1위’를 고수했다.
‘부동의 1위’ 고도 서안은 언제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까. 연원은 서주(西周. 기원전 1027년~기원전 771)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관중평야를 거점으로 세력을 키운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안 서남쪽 풍경과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면서, 서안 부근은 수도를 각광받기 시작했다. 풍경은 주나라 선조(先祖)들의 종묘(宗廟)가 있던 곳이며, 호경은 정치 중심의 실제 수도였다. 그러다 주 평왕 당시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수도를 낙양으로 - 이 때부터를 동주(東周. 기원전 770~기원전250)라 부른다 - 옮기면서 서안은 일시 폐허상태에 놓이게 된다.
폐허된 서안은 진(秦)에 의해 다시 일어난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맥적산 석굴이 있는 천수(天水)에서 흥기한 진(秦)이 기원전 677년 관중평야 서북 옹에 수도를 정하고, 기원전 383년 역양으로 이전했다, 기원전 350년 서안 부근인 함양(咸陽)으로 수도를 옮겼던 것이다. 현 함양시 동쪽 10km 지점에 위치했던 진의 수도 함양은 위수 양안(兩岸)에 걸쳐 조성된 도성.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기원전 221년)한 후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고 아방궁을 건축하면서 더욱 거대한 대(大)도성으로 발전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서안은 엄격히 말해 수도가 아니었다.
한나라 때부터 본격 수도…장안으로 명명
서안이 본격적인 수도가 된 것은 한나라 때였다. 이름도 장안으로 명명됐다. 서안시 서북 교외, 남으로 동수원(童水原)을 끼고 북으로 위빈(渭濱)에 의지한, 36㎢란 광활한 땅에 자리한 도성이 장안이었다. 그곳은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넓은 땅인데다, 급수와 교통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게다가 홍수피해도 받지 않는 천혜의 대도성으로 적절한 곳이었다. 천혜의 땅에서 “자손들이 영원히 번창하기 바란다(欲其子孫長安)”는 염원을 담아 장안(長安)으로 정했다. 보다 엄밀히 말해 ‘관중평야의 풍부한 물산’과 ‘천혜의 방어막’이 있었기에 장안이 수도로 정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관중(關中)지방이 있었기에 장안이 수도로 선정됐던 것이다.
관중은 관우(關右) 혹은 관서(關西)로도 불리지만, 일명 ‘사새(四塞)’라고도 한다. 관중은 동쪽의 함곡관(函谷關), 남쪽의 무관(武關), 서쪽의 산관(散關), 북쪽의 소관(蕭關)으로 둘러싸인 요새로, 공격과 수비 모두에 유리했다. 경제력까지 구비한 분지가 바로 관중이었다. 한나라 당시 관중에 전국 인구의 거의 10분 3, 재부(財富)의 10분의 6이 결집돼 있었다. 지방이 모두 반란에 휩싸여도 관중 한 곳만 지키면, 언젠가는 이곳의 힘을 이용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만큼 풍요로운 땅이었다. 물산이 풍부한 한중(漢中)과 파촉(巴蜀)도 남쪽에서 장안을 바쳐주고 있었으니, 13개 나라의 수도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안이 있었다.
사진설명: 서안의 중심에 서있는 종루. |
시간이 흘러 낙양을 수도로 삼았던 후한이 멸망됐다(220). 위, 촉, 오의 삼국을 통일한 진(晉) 무제 사마염도 낙양을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서진(西晉)은 겨우 20년이 지난 뒤, 서진의 종실인 조왕 사마윤이 혜제(惠帝)의 황후 가씨를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팔왕(八王)의 난’(300~306)이라는 내란 속으로 빠져든다. 끝없는 전란의 와중에 팔왕의 한 명인 성도왕 사마영 휘하에 있던 흉노족 출신 유연(劉然)은, 고향으로 돌아가 흉노 귀족의 추대를 받아 대선우를 칭하며 자립의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곧 ‘한왕’(漢王. 304)과 ‘황제’(308)를 자칭하고, 수도를 평양(平陽. 산서성)에 두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다.
비슷한 무렵, 사천에서는 이특(李特)이 유민세력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고 성도를 함락시켰다. 패사한 이특의 뒤를 이어 아들 이웅(李雄)이 유연에 이어 황제라 칭하고(306), 국호를 성(成)이라 했다. 4세기 초 한족세계의 한 복판에 흉노와 파인(巴人)의 국가가 출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가 개막된 것. 이 사건은 다른 이민족에게도 자립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한족세계에서 한 발 떨어져 있던 선비족도 이 무렵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동에서 몽고 고원에 걸친 지역에선 모용(慕容), 단(段), 우문(宇文), 탁발(拓跋) 등 유력한 4개의 부가, 보다 서쪽에는 독발(禿髮)과 걸복(乞伏)이, 청해고원에는 토욕혼(吐浴渾)이 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북방의 대 세력을 이루고 있던 선비족마저 움직이자 대륙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모용부를 거느린 ‘모용외’는 대선우를 자칭하며 주변의 선비 여러 부족 및 고구려를 향한 정복사업에 먼저 착수했다. 같은 시가 탁발부 출신의 ‘탁발의로’ 역시 부족을 통일하고 대선우라 칭하며 산서지방에서 웅비했다. 이러한 때 유연의 뒤를 이은 아들 유총은 휘하에 있던 석륵을 파견하여 하북, 산동 일대를 경략하는 한편, 자신은 남하하여 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의 3대 황제인 회제를 사로잡았다(311). 4대 민제가 장안에서 옹립됐으나, 유요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면서 서진왕조도 멸망되고 말았다(316). 강남의 건강에서 소식을 들은 낭야왕 사마예는 317년 다시 진(동진)을 일으켜 즉위했다.
천혜의 땅 관중평야가 물적 뒷받침
사진설명: 대안탑에서 내려다 본 서안시내. |
유총이 죽은 뒤 한은 외척인 근준의 난을 계기로, ‘장안’에 할거한 유요와 ‘양국’을 근거지로 하북을 영유한 석륵의 두 세력으로 분열됐다. 비슷한 시기 요서지방에 진출한 모용외는 전연(前燕)을 세웠고, 산서 북부에는 탁발부의 대국(代國), 사천에는 성(成), 보다 서쪽의 하서지역에는 한족 장궤가 세운 전량(前凉)이 출현했다. 강남의 동진을 포함해 중국 전체가 사분오열된 것이다. 이 중 일시 우세를 확보한 것은 석륵이었다. 유요를 격파해 전조(前趙)를 멸망시키고, 거의 중원을 통일했다.
석륵 사후 조카인 석호가 뒤를 이어 과업을 계승했지만 그러나 통일은 오히려 멀기만 했다. 전연의 모용준, 전진의 부견, 혁련발발의 대하(大夏) 등이 연이어 일어나 패권을 다퉜다. 결국 439년 북위의 탁발도(태무제)에 의해 화북지방의 혼란은 수습된다. 이보다 조금 앞서 강남에서는 유유가 동진을 대신해 송을 건국(420)했기에, 이후를 남북조시대로 명명한다. 오호십육국 시대 장안을 수도로 정한 나라는 ‘유요의 전조’, ‘부견의 전진’, ‘요장의 후진’ 등이었지만, 불교와 관련해 언급될 만한 가치가 있는 왕조는 석호의 후조(328~352), 부견의 전진(351~394), 요장의 후진(384~417), 저거몽손의 북량(397~439) 등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장안을 수도로 정한 왕조가 불교진흥과 후원에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혼란한 시대일수록 장안은 수도로 빛을 발했고, 그곳에 터를 잡은 자들은 불교를 지원”했던 것이다.
장안은 오호십육국, 남북조시대에도 주목받았지만, “중국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로 평가되는 당(唐)나라(618~907) 때 가장 빛을 발했다. 서양에 로마가 있었다면 동양엔 장안이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 7~10세기 모든 길은 장안을 향해 나 있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차이니즈 드림(chinese dream)’을 찾아 “장안으로! 장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유학승, 유학생들도, 돌궐, 위구르의 부족장도, 사마르칸드, 부하라의 오아시스 상인들도, 인도, 아랍, 페르시아 사람들도 저마다의 꿈을 안고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가리지 않고 모두 수용하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거대한 저수지가 바로 당나라의 장안이었다.
당나라가 “역사상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 제도의 발전, 사상과 종교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모든 예술 부문에서 창조성을 이룩한 시대”였고, 그 당나라를 이끈 중심 수도가 바로 장안이었다. 장안이 있었기에 당나라는 존재할 수 있었고, 장안으로 인해 당나라의 영광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셈. 당시 장안은 세계 최고의 국제 도시였을 뿐 아니라, 빛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가장 최신의 불교교리, 최신의 시(詩) 형식, 모범적인 각종 제도들, 가장 새로운 복식과 헤어스타일도 장안에서 나와 다른 나라로 전파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