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1:1-12
찬송가 320장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오늘부터는 욥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욥기는 잠언, 전도서, 시편과 함께 지혜문학으로 분류됩니다. 다른 지혜서들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모세오경 및 역사서, 선지서와 신학적 관심사를 공유합니다. 특히 욥기는 고통, 창조, 하나님의 주권 등의 주제로 다른 성경들과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욥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를 읽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욥기는 저작 연대, 지리적 요건 등 많은 배경들이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이 이방의 종교나 문화와 밀접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 전체의 주제와 관심을 잘 드러냅니다. 욥기는 다양한 주제를 다룹니다. 무고한 자의 고통, 세상의 질서, 하나님의 주권, 회의주의, 창조신학,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 등이 그것입니다. 다루는 주제들이 많고 하나하나 깊기에 욥기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주제 모두 시대를 초월한 온 인류의 공통적인 고민이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주목할 만합니다.
오늘부터 욥기를 살피며 우리 인생의 어려움이나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하나님 안에서 수용되고,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만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성숙되어 가는 복을 누리길 소망합니다.
온전한 사람 욥의 등장
(1-3)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소개됩니다. 욥는 종교적,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절에서 ‘완전’이 아닌 ‘온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처럼, 그가 완벽하거나 완전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주목하는 점은 그가 죄인이 아닌 의인이라는 선언을 받기에 합당했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 의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흠을 찾으려 노력하게 됩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고 이론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욥이 의로운 사람일수록 욥기에서 말하려는 무고한 고난, 선과 악에 대한 세상의 질서 등의 주제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기에, 1장에서는 본문이 제시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1절에서 욥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온전함에 대해 소개되었다면, 2-3절에서는 그의 번영의 완전함에 대해 소개됩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습니다. 이는 고대 중동 지방에서 자녀로 표현되는 이상의 극치였다고 합니다. 3절에서 소개되는 그의 소유들 즉, 양 칠천마리, 낙타 삼천 마리 등도 그 소유의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종교적, 도덕적 온전함이 소개된 이후 자녀와 재산이 언급된는 것은, 그의 경건과 번영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의도적으로 본문은 그의 경건이 온전했고, 그래서 번영한 것처럼 소개합니다.
이러한 소개가 없었다면 쉽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불의한 부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자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거나 혹은 “부자가 된 이후에는 불의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가 욥의 불의를 증명해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오히려 부가 그의 경건을 증명해주는 결과이며, 부요해진 이후에도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3절은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말하며 마무리 됩니다.
(4-5)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의 경건이 온전하고, 부와 인품이 완전하다면, 그의 가족이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5절을 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의 아들들에게는 자기 생일에 잔치를 즐길만한 부요함이 있었습니다. 누이들의 잔치 참여는 그들의 행복과 화목을 한층 강조해줍니다. 우리나라 재벌 드라마에 심심찮게 나오는 질투와 암투가 욥기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혹시라도 인생을 즐기는 와중에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실수나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걱정하며, 욥은 늘 자녀들을 성결하게 하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인생의 행복을 즐기면서도 방탕함으로 끝나지 않고, 겸비함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욥의 방식이었습니다. 그의 경건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가족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너무 우리와 동떨어진 사람 같지만, 사실 5절까지 이어진 욥에 대한 소개만으로도 우리는 어떠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경건을 가지고, 또한 그에 합당한 복을 받은 욥이, 이야기의 끝이 아닌 시작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했던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다가왔다면, 우리에게 닥쳐온 일들은 더욱 당연한 일일 것이며, 완전했던 그가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 받고 앞으로 나아갔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앞으로 나아갈 여지가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온전했고, 그로 인해 번영한 것으로 끝이 났다면,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에도 권신징악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어찌 보면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는 가장 오래되 종교보다 더욱 오래된 교리입니다. 스스로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받은 인류의 조상은 응보에 대한 믿음을 깊이 새기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하나님을 처음 부르기 전까지도 존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인과응보의 원리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 원리 안에서는 모두 정죄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욥의 온전한 경건과 그로 인한 번영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욥의 처음 온전함과 번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삶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어떤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며, 무언가를 가르치시고,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온전하지 못한 우리들도 나아갈 길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며 욥기를 지속해서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사탄의 문제 제기
(6-8)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6절에서는 장면이 갑자기 전환되어 천상 회의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땅을 두루 돌아 자신 앞에 선 사탄에게 욥에 대한 자랑을 합니다. 욥을 ‘내 종’이라고 표현하며 심지어 ‘그와 같은 이가 세상에 없다’고 평가합니다. 1-5절에 이어, 하나님의 평가까지 들은 우리는 욥의 경건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9-11)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탄도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탄이 제기하는 의심은 욥이 경건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경건이 ‘사심 없는 경건’이냐는 점입니다. 1-5절에서는 욥의 경건과 번영이 얽혀서 소개됩니다. 사탄은 그 인과 관계가 거꾸로 뒤집힌 것이 아닌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경건해서 번영한 것이 아니라, 번영했기에 경건케 된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이 조건 없는 경건인지, 번영으로 인한 혹은 번영을 위한 경건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합니다. 사탄은 본문에서 참소하는 자로서 일합니다. 검사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의심과 욥의 소유를 치라는 호소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탄에게 속아서 이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탄보다 더 뛰어난 분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사탄이 욥을 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욥은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후로 욥은 사탄을 향해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하나님을 향해서만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욥기의 서두인 열두절의 내용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뛰어 넘어 일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은 번영하고 악은 고난 받는다’는 원리로 스스로와 타인과 하나님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미련을 뛰어넘어 지혜롭게 일하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전했던 욥의 삶에 하나님께서 고난으로 개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과응보에 의하면 그것은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시실 선함이 복을 받고 악함이 고통 받는다는 원리는 세상에 필요합니다. 그 원리 무너진다면 세상에는 무질서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선한 일은 바보짓이 될 것이며 악한 일이 더욱 권장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탄원과 기도를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 인과응보의 원리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세상과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죄 안에서 탄생한 인류 앞에 이 원리가 온전하게 실행된다면, 세상은 저주와 심판으로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최종적인 복과 심판은 하나님께만 달렸습니다. 그 최종적인 복과 심판이 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조건적인 상황을 뚫고 들어오는 어떤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를 행했기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얽매여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조건을 뛰어 넘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서 대가를 찾지 않으시고, 스스로가 그 조건의 대가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기이하고 신묘한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경건과 완전한 번영이라는 조건 성취 속에만 있었던 욥은 하나님을 원리로만 알 수 있을 따름이지, 실존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조건을 해치게 될까 두려움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뿐이지, 사랑의 관계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에게도 필요한 것은 조건이 깨어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욥에 삶에는 이제껏 이해와 명확함으로 가득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지혜와 원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고를 오늘 본문 열두절에 제한해 둔다면, 욥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결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로서 믿음을 가지고 이 열 두절을 본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선한 것이며, 그것이 욥을 더욱 복된 신앙의 자리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아직 결론을 맞이하지 않았지만,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 없이 찾아옵니다. 부조리한 상황이 너무 많아, 세상에 대해 탄원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탄식 소리가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완전한 번영에서 마무리 된 것이 아니라, 다시금 시작한 욥을 기억하십시다. 그 상황들이 욥의 이해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어 그 인생을 더욱 복된 자리로 이끌 것임을 믿듯이. 이해되지 않음이 오히려 우리를 겸손케 하고 성숙케 할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권이 나의 지혜나 나의 정의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인생을 내어드리는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여전히 내가 온전하게 알고 온전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의 제한된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세상에 대해 불평하곤 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어려움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 아침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어 일하시며, 세상보다 높은 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기대하길 소망합니다. 내 지혜 속에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역사하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오늘 하루도 만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존재로 거듭 살아내길 원하오니 남은 인생을 포기치 않고 하나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지면 세상은 어떻게 될지, 그 반대로 인과응보의 원리가 완전하게 이뤄지면 세상은 어떻게 될지 묵상해 봅시다.
2.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발견했던 경험이 있나요?
3.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하나님으로 인해 내 생각이 무너졌던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4. 경건을 통해 완전한 번영에 이르렀던 욥은, 욥기에서 목표처럼 제시되기보다 시작점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번영을 목적으로 경건을 행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작성: 송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