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시대에 어떤 사람이 기름진 밭을 사서
땅을 일구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좋은 열매를 맺을 거라 예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먹을 수 없는 들포도만 맺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도밭의 주인은 하소연을 합니다.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해 정성스레 포도밭을 가꾸었지만,
좋은 포도를 맺지 못했기에
포도밭을 아예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사실 이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정의와 공정이 가득한 나라로 만드시려
이 땅을 온갖 좋은 것을 채워주셨고,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모두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좋은 열매를 맺을 마음이 없었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약하면,
사람들의 죄는 하느님을 찾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까닭에
그 벌로써 그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것을 잃고
바빌론 귀양살이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오늘 1독서의 주된 메시지입니다.
이 교훈적인 예언은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적용됩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 자만자족하며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냉담자들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공동체의 기도모임을 하는 이들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구역모임에 참석하려는 이들도 적어졌습니다.
공소예식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한 표징들로 볼 때,
현대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그저 의무적인 종교활동 정도로 생각하거나
하나의 악세사리로 취급되어져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고,
기도하지 않지 않으며,
복음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 공동체의 운명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예견하였습니다.
즉, 가진 것 조차도 모두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러한 엄중한 벌에 대한 하느님의 의도는
장난감을 더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에게서
지금 가지고 있는 장난감 마저 다 빼앗아 버리는
부모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 입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긴 후에,
아이가 무언가를 깨닫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겠지요.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다시 하느님께 초대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을 갈등하게 만드는 것은
돈으로 행복까지 살 수 있다고 믿으며
개인의 안위(安危)를 오직 물신주의 위에
올려놓고 있는 까닭이겠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현실은 사뭇 다릅니다.
몇 해 전 청소년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더니
절반 이상이 ‘부자백수’라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그저 철부지들의 대답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더 이상 노력으로만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든
우리 기성세대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또, 요즘 스마트폰 게임 중에
‘거지 키우기’라는 게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구걸을 하면서 돈을 조금씩 모으고
돈이 모이면 구걸력을 업그레이드 한다고 합니다.
또 돈이 어느정도 모이면
다른 거지를 고용하여 수수료를 얻습니다.
자본수익을 얻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본논리는 교묘하게 게임에도 침투하여
사람과 노동력을 도구화 합니다.
자연히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이웃들도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등급을 매기게 되겠지요.
이러한 사회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했던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지각없이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부자의 기준은
재산의 총액이 아닌
집착의 총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 이면에
집착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것을 잊은채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물질 아래에
묻어두려는 유혹이 더 강해집니다.
우리는 어떠 합니까?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경제양극화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계급사회를 만들어,
사장놀이, 마담놀이를 하며
계급사회의 최상위 꿈꾸며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음식에 재를 뿌려 먹고
헤어진 옷을 입고 다녔지만,
현대인들은 음식과 커피에 금가루를 뿌리고,
화려한 옷과 장식품을 두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인간군상(人間群像)의 실체입니다.
15세기 중세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는
‘허영의 소각식’이라는 것을 고안했습니다.
그는 욕망과 물질주의에 빠진 대중에게
회개의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도박용품과 사치품들을
성당 앞 광장에 모으게 하였고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그것들을 모두 소각시켰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소유한 모든 사치품들을 태워버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무척이나 아까운 생각이 들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그 장면을 목격한 한 사람은
‘자신이 본 최고의 불꽃’이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이 불꽃이 꺼지면 결국
우리의 집착과 욕망은 재로 남겨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포도밭 상속자를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가득한 소작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최후는 비극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판결문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 시대의 최후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곧 쓴 물을 마실 때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쓴 물을 마신 후에야
우리가 먹고 있던 물이 달았던 것을 깨달을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