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지 않는 손 / 서정홍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머니 손.
무슨 물건이든
쓰면 쓸수록
닳고 작아지는 법인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
쇠로 만든
괭이와 호미도 닳는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보다 쇠보다 강한
아버지, 어머니 손.
《닳지 않는 손》 (우리교육)
우유 도깨비 / 김은영
"저 감기 걸렸어요."
"안 돼, 어서 마셔."
"저 찬 것 마시면 배 아파요."
"안 돼, 모두 마셔야 돼."
선생님은 꿈쩍하지 않았어
"만날 왜 흰 우유만 먹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억지로 먹으면 체한대."
마시지 않은 우유를
책상 속에 집어넣고
창틀 난간 위에 올려놓고
쓰레기통 속에 버렸지.
어느 날
남자 화장실 소변기에
우유갑이 처박혀 있었어.
찰찰찰찰 철철철철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우유갑에 오줌을 누며
폭포 놀이를 했지.
"화장실에 우유 빠뜨린 녀석 누구야?"
"몰라요."
"어디 내 손에 잡히기만 해 봐라."
"우리 학교에 도깨비가 사나 봐요."
아이들은 끼득끼득 웃었지.
며칠 뒤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어.
서너생님 자동차 지붕 위에
팍삭!
우유를 하얗게 칠해 놓았지.
현관 옆 보도블록 위에도
퍼억!
우유를 흥건히 터뜨려 놓았지.
교장선생님은 호소를 했어.
"여러분,
우유는 폭탄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달달 볶았어.
"우유 폭탄 던진 사람 신고하세요."
하지만 아무도 없었지.
선생님들은 대책회의를 열었어.
"앞으로 우유 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우유 당번이 우유갑에 이름을 써서
한 사람씩 나누어 주었지.
그러나
도깨비들은 영리했지.
우유갑에 쓴 자기 이름을
유성 매직으로 까맣게 칠해 버렸지.
도깨비들은 신출귀몰
학교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고
교문 밖 버스정류장에도 나타났지.
선생님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어.
아이들은 아는데
선생님은 모르는
우유도깨비
ㅇㅇ 초등학교에
지금도 살고 있대.
나 혼자 자라겠어요 / 임길택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
소나 돼지나 염소나 닭
모두 시시해요.
그러나, 다람쥐는
볼수록 신기해요.
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
하늘의 새
바라볼수록 신기해요.
길러지는 것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볼품없어요.
나는
아무도 나를
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
《나 혼자 자라겠어요》(창비)
멸치가 먼저다 / 최종득
삶은 멸치 말리는데
빗방울이 후드득.
마루에서 젖 먹이던 엄마
아기 떼어 내려놓고
허리 아파 보건소 가던 할머니
되돌아 줄달음치고
멸치 다 걷고 나서야
엄마는 젖 다시 물리고
할머니는 보건소 길 다시 간다.
바닷가에서는
사람보다
멸치가 먼저다.
《쫀드기 쌤 찐드기 쌤》 (문학동네)
모서리 / 이혜영
“아야!
아유, 아파.”
책상 모서릴 흘겨보았다.
“내 잘못 아냐.”
모서리도 눈을 흘긴다.
쏘아보는 그 눈빛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어쩜 내게도
저런 모서리가 있을지 몰라.
누군가 부딪혀 아파했겠지.
원망스런 눈초리에
“네가 조심해야지.”
시치미뗐을 거야.
모서리처럼
나도 그렇게 지나쳤겠지.
부딪힌 무릎보다
마음 한쪽이
더 아파 온다.
《섬진강 작은 학교 김용택 선생님이 챙겨 주신 고학년 책가방동시》(파랑새)
달 따러 가자 / 윤석중
얘들아 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동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얘들아 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가 달아 드리자.
〈윤석중 동요집, 1932년〉
《날아라 새들아》(창비)
새해가 시작되기 5분 전에 / 신형건
나는 찬물로 세수를 했어.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지.
누군가 참 반가운 손님이 내게
찾아올 것만 같아 두근두근……
짹각짹깍 시계는 덩달아
바삐 종종걸음을 치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드르륵
창문을 열어 젖혔지. 그 순간,
작은바늘과 큰바늘이 겹쳐지고
시계 속의 뻐꾸기는 냉큼
달려나와 크게 소리쳤어.
-새해다! 뻐꾹뻐꾹뻐꾹……
하지만 아무도 없었어.
고개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손님은 오지 않았고 여전히
창 밖은 캄캄했어. 흥! 시계
저 혼자만 새해로구나.
나는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쿨쿨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
그러다가 문득 눈을 떠 보니
눈부신 햇살이 창에 가득했어.
-야아, 새해로구나!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밖에서
오래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새해가 내 가슴에 뛰어들었어.
(앗! 뜨거워!)
《배꼽》(푸른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