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설교(84)
무익한 종의 비유
본문 :누가복음 17:7-10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밖에서 열심히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피곤해서 좀 쉬려고 하는데
집에서 편히 놀기만 하던 사람이
밥상을 차려달라고 합니다.
꾹 참고 밥상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에게 수고했다고 하며
같이 밥을 먹자고 아래는커녕.....
자기 옆에서 물과 수건을 들고
밥 먹는 시중을 들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나머지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만일 성도님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부당하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요즘이라면 씨도
안 먹힐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노예)의 수직적 관계가
존재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 비유를 두고
큰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노예제도를 옹호하거나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결코 사회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교훈으로 주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며....
- 제자들에게 필요한 참된 믿음의 자세를
가르쳐 주시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이 비유라는 점입니다.
비유는 그 비유의 내용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소재를 채택하지만.....
그 소재 자체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님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어떤 비유가 효과적인 비유일까 ?....
누구나 다 아는 사건이며 매일같이
경험하는 사건이라야 효과적인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사건이나 ....
-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경험하는 이야기들은
비유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타난 이 비유 역시
그들의 생활 풍습과 경험 속에서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노예 제도를 이용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의 마음의 자세>.....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무익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
예,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의식은 ....
바로 ‘종의 의식’,.....
그것도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깊이
체험하면 할수록
이 ‘종의 의식’은 깊어집니다.(정비례).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종의 의식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철저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언제나 편지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종 된 바울”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지만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스스로 종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노예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존재가 얼마나 비참한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종의 의식의 있었기에....
그는 엄청난 핍박과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또는 엄청난 선교효과에도 교만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선교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종의 모습>......
그러면 예수님 당시 종은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 종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그 당시 종에는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사유재산을 모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생명마저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다 주인의 것입니다.
물론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일 뿐
내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맡기신)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좀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한 것일 뿐입니다.
- 내가 말씀을 전했다 해도
주님께서 내 입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요,
- 내가 기적을 나타내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셨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벧전4:11a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바울에게도 유혹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게 파벌이 생겼는데
그중에 ‘바울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고전3:4-7 읽어라>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은 농사를 자기 혼 자 다 짓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씨앗이라는 생명체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땅도, 땅의 영양분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햇볕도, 비도, 적당한 온도도
다 하나님의 노력입니다.
인간은 적당한 때에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농약을 뿌린 조그만 수고를
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 종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둘째, 종은 주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합니다.
왜 이런 일을 시키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입니다.
폭우가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종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비유 7-8절을 보시겠습니다.
7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절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하루 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도 고프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 수종을
들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다 먹은 후에 먹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더럽고 치사할 때가
어디 있습니까? ...
먹는 것 가지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러나 종은 이치를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일은 하는 사람은
철저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이런 저런 사람의 말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쿵저러쿵 저렇게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는
절대 순종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 종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둘째, 종은 주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합니다.
셋째, 종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9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일을 시킨 일군에게는
그 대가로 삯을 줍니다.
그러나 종에게는 보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마디 고맙다는
인사도 없습니다.
보상은 없더라도 알아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종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때로 낙심하는 것은
(화가 나는 것은) ...
최선을 다하여 어떤 일을 했는데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보상을 바라는
(인정받고자 하는,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받으려는 욕구까지
극복해야 종의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한 선교사가
홍수에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어떤 중국사람 하나가
이 선교사를 건져내어 주었습니다.
이에 이 선교사가 너무 고마워서
일생동안 이 은혜를 기억하며 살겠으니
이름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름이 있소?
있다면 내 이름을 말해주겠소”하더랍니다.
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우리가 남을 도울 때에도 그렇습니다
봉사와 헌신이 자기 이름을 파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성도님들이 한 일에 대하여
칭찬하려고 할 때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10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를 ‘나’로 바꾸어서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이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의 자세가
종의 의식입니다.
현대에 와서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자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익한 종의 자세’일 것입니다.
사실 초기 한국교회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고
헌신한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나라 전체가 다 가난했지만
당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생계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옛날에는 성미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쌀을 모아서 교회에 가져와서
성미함에 넣었습니다.
이 성미함은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한
식량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신도들이
여성들이었습니다.
경제권이 없는 여성들이 도울 수 있는 길은
자기 집의 쌀 한 바가지를 몰래
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눈물겹게 충성했던 것이
당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누가 목회자가
되려 했겠습니까?
신학교는 요즘과는 달리
항상 미달이었습니다.
목회는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런 괄목한 성장을
하게 된 것은 주의 종들의
이런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라 전체가 잘 살게 되고,
교회가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이었습니다.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연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의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큰 교회를 이루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달라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적인 보상을 요구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를 요구합니다.
교권에 집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아가서 내가 이렇게 성공한
목회를 하였는데
이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회세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당연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고생했으니까
자기 몫 찾아간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명령을 따라서
순종해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모든 영광과 권리는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장로나 권사 등 임직 자들도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큼 헌금했으니,
이 만큼 봉사했으니
그 권리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목회자와 장로 간에,
성도와 성도 간에 갈등이 심각합니다.
급기야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인간의 소리가 너무 많이 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우리는 단지 무익한 종일뿐”이라는
고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정년퇴직을 하시면서
마지막 은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이 교회에 23년 동안
목회하며 교회를 성장시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도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고별사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무익한 종과 관련된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눅17:9-10절을 인용해
“명한 대로 행했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씀한 뒤,...
교인들에게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하고는
단상을 내려왔습니다.
이 분은 바로 청량리 중앙교회의
임택진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야말로 무익한 종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셨다 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교회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교인 중 후임목사의 일에 대해
의견을 물어도 “그게 내 교회냐”며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이런 분들이 많으면 우리 목회자들이
존경받고 한국교회가
정말 이 민족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에게도
이 무익한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으니까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까
내가 이만큼 헌금했으니까” ...
알아주고 보상해 달라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보상받지 못한 것에
섭섭해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라,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우리는 이 명령을 수행한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헌신할 때
우리의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 종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둘째, 종은 주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합니다.
셋째, 종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넷째, 종은 주인에게 자신의 삶을
완전히 위탁합니다.
그러나 종의 삶에 장점이 하나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완전히 주인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을 책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면 책임은 하나님께서
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는 자만의 복입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종의 의식을 갖지 못한 자는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의 지혜와 인간적인 방법(권모술수)을
더 신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다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종의 마음, 종의 의식’을 가진 자는...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삶을 주장하여 주십시오”하고
내어 맡길 수 있습니다(전적 위탁).
예를 들어 목욕탕에 가면
이런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지갑이나 귀중한 물품은
카운터에 맡겨 주십시오.
맡기지 않은 물건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주인백.”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자기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은 자의 삶까지
책임져 주시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위탁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의 의식’을 온전히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삶 전부를
위탁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씀 - 충성된 자의 자기의식>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기의식은 곧 ‘종의 의식’,
그것도 ‘무익한 종의 의식’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을 한 것뿐이니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지고 ...
나의 어떤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고,...
절대순종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위탁하는
성숙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