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입에서 얻은 돈
마 17:24-27
개구리 한 마리가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욕탕에는
‘입 작은 놈이 입이 큰 놈의 등을
무조건 밀어줘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개구리가 멋도 모르고
그 목욕탕에 갔다가 하마를 만났습니다.
녹초가 될 때까지 등을 밀어야 했습니다.
다음날 ‘하마가 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목욕탕을 갔는데 이번에는 악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악어의 등을 밀어주느라고
기진맥진이 된 후에 너무도 억울한 마음으로
성형외과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 입을 귀밑까지
완전히 찢어주세요”라고 주문했더니
“어렵진 않지만 그러면 하루밖에
못 삽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개구리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기에
결국 수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입이 더욱 커진 개구리는 들뜬 마음으로
그 목욕탕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도착하자마자
거품을 물고 쓰러졌습니다.
목욕탕 문 앞에 ‘금일휴업’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구별하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남이 한다고 나도 따라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전세>
오늘 본문은 참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변화산 이후 예수님의 일행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일상으로).
그런데 거기서 성전세를 받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4절)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반 세겔은 성전세를 의미합니다.
우선 성전세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0장 11-16절에 보면,
온 유대의 남자는 이십 세가 지나면
다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그 액수는 반 세겔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틀 동안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이틀 일한 정도의 수입을
일 년의 성전세로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자발적인 헌금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내야하는 세금과 같은 것입니다.
출 30:11-16절에 보면
이 세금의 의미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함께 찾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4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성전세를 “생명의 속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 성전세를 드림으로
‘생명의 보존’을 받고,
‘질병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속죄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전의 액수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 반 세겔로 똑같이 정해져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속전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한 속전은
자신이 지불해야 했던 것입니다(시 49:7-8).
또한 속전을 거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회막 봉사’ 곧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비용으로 사용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예수님 시대까지 전해져 온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
그들의 질문에 베드로는 생각할 것도 없이
“내신다”(25) 대답하였습니다.
아마도 당연히(상식에 따라서)
내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드로는 집으로 돌아와 예수님께
성전세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25절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전세(생명의 속전)를
내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여러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가 찾았을 때에도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이라고 하셨고,
환전상과 상인들을 내어 쫓으시면서도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세를 내는 것이
아들인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주님 자신이 생명을 속하러 오셨지
자신을 위해 속전을 내셔서
구별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전서 2:6을 보면
바울은 이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속전)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속전)로 주시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성취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생명의 속전’을
드릴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도
성전세(속전)를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의 대속물(속전)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2:12).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생명의 속전’이 필요 없습니다.
앞서 성전세는 다른 사람이
대신 낼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세를 대신 내어주십니다.
이 속에도 대속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속전까지 내어주신 것은
그를 위한 대속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요,
나아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 내용을 읽고 믿는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물이 되심도 이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님은 속전을 내실 분이 아니라
속전 자체가 되시며,
또한 주님은 아들이시기 때문에
성전세를 내실 필요도 없으신 분이셨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하셨습니까?
27절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이미 베드로가 급하게 “내신다”고
말을 한 상태이고,
반 세겔 받는 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주님은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신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의 규례를 무시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또 이미 베드로가 “내신다”하고
뱉은 말 때문에 주님은
양보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주님은 거의 타협을 않으시고
강하게 대립하시는 모습이 두드러지는데
여기서는 한걸음 물러서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저 대립만으로 일관하시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보하시거나 그냥 덮어두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자들에 대해서도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나,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않으시고
넘어가셨는가 하면,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들으시고도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심으로 관용과 여유를 보이신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막 9:38-40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짓이나 위선에 대해서는 강하게 대립하고
배격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는 반면,
이해의 부족이나 악의 없는 행동 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시는 모습입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이 바울에 와서는
더욱 확대됩니다.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훨씬 포용범위가 넓어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타협을 하지 않았지만
여러 면에 있어서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는 오해할 만한 그런 이중적인
태도도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한 때도
더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이해와 관용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에 타협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또 어떤 일은 양보해야 할 것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엄격하고 타협이 없어야 하겠지만은,
그 외의 문제에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가장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러한 성숙한 양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물고기 입에서>
그러면 주님께서
한 세겔을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27절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참으로 유머러스한 장면입니다.
어떤 이는 ‘기적 같지 않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구에게 빌리든지 부탁을 하셨을 수 있을텐데
이상하게 낚시를 해서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얻도록 하셨을까요?
여러분도 다 아시지만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베드로를 시켜서 낚시를 하게 하신 것은
그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낚시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은
지금 일어나는 현상이 기이한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 한 세겔 동전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제법 크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동전을 입에 물고 있는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동전을 입에 물고는
낚시 밥을 물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처음으로 걸려
올라온다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마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장비를 준비하여 낚시를 하러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물고기가 어떻게 한 세겔 짜리 동전을
입에 물고 살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어떻게 낚시에 걸려올 수 있을까?
혹시 그물이면 또 몰라도...”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자
아마 베드로는 큰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미물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깨달으면서 더욱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주님께서 내실 필요가 없는
세이지만 필요 없는 오해와
갈등을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취하신 것이
“아버지의 것으로”
혹은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것으로”
세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마련하여 드린
세금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것으로
드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생명의 속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로
‘생명의 속전’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고기 입의 동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취해 예비하신 은총입니다.
선물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나의 ‘생명의 속전’,
곧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물’이 되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누리시는 삶을 사시기를 바립니다.
그러나 때로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양보하고 감싸 앉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