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통해 고린도교회를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어쩜 이 시대의 교회의 상황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책망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훈련으로 이름이 난 교회의 목사였던 분이 30년 목회를 한 즈음의
설교에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 깨달았고
신학교에서 죽어서나 영화로운 구원을 받는 것이 잘 못 되었다는 걸
알았노라고 실토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영화롭게 되는 방법은
말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닮아 사랑하는데 까지 가야 된다고 강조를 하더군요.
만약 제자훈련을 그런 식으로 했다면 지식만 남았을 뿐 실패했을 겁니다.
지금의 담임목사처럼 뜨겁게 찬양하는 것이 다이내믹한 감동이라도 있겠지요.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찬송가의 가사 중에는 온전한 구원의 기승전결이 있으나
그의 설교에는 죄인이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는 서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을 갈망하는 영혼들의 갈급함을 찬양으로 메꾸고 있다고 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지적하는 걸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먼저 십자가의 도가
그들에게는 없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신령한
것은 성령이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음에도 헬라철학으로 섞어 놓은 지식으로
가르침을 받으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지 못하여 신령한 자가 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해 있습니다(고전2장) 지금의 교회의 설교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들에게 시기와 분쟁이 있으므로 육신에 속하여 젖병만 들고 있는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런 연유로 사역자들의 성향에 따라 편이 갈라져 있습니다.
몸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임을 아직 모르고 사람의 호불호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 아래에 깔려 해 아래의 것들만 생각하는 현대교회와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몰라 충성이 뭔지 모르고 말만 있을 뿐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하시고 다시 사시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먹게 하셨는데 이를 모르는 건
그때나 지금의 여러 교회들이나 일반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문제가 터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았으므로 자신의 몸이 성전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의의 무기로 드려져야 함에도 그들은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부문제와 이혼 등 육신적인 문제에만 묶여 있어 영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의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의 수준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 또한 먹느냐 마느냐에 아옹다옹만 할 뿐 양심의 자유가 없습니다.
사도라는 사회적인 공인만 생각할 뿐 그리스도 안에 죄와 사망의 자유를
얻은 자로 복음으로만 살고 주와 하나가 되어 달음질하는 비밀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 하듯 고린도교회도 그렇습니다.
한 떡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를 먹고 그리스도로 충만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성찬예식이 중요한가를 그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기독교의 표지가 말씀과 성례전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은혜를 받은 자는 그 붙잡힌 것을 믿음으로 붙잡는 회개를 하므로 죄 사함을
받아 아무 거리낌 없이 주의 몸과 피를 마시므로 주의 성찬에 참예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고린도교회는
성만찬이 주의 성찬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음식에 스스로 배부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나타나심의 은사는 나타나지만 더 큰 은사를 사모하므로
사랑을 추구하는 진리의 지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도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의 사건과 죽은 후의 부활신앙밖에는 없어 현재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
나는 부활이 없다고 바울은 탄식을 합니다(고전15:12) 하나님께서 형상을 따라
모양을 만드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형체인 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데 모양이 바뀌지
않는 건 당연하지요. 아무리 예수 믿고 말씀을 순종하여 복을 받으라고
당근을 던지지만 결국 무늬만 덧칠을 해 갈뿐 이면이 바뀌지 않는 겁니다.
이와 같이 교회라는 이름만 있을 뿐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를 따라 행하는
젖먹이들에게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강력하게 책망하며 권면을 했습니다.
고후7장의 내용을 보면 고린도교회가 참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
동기가 되어 디도가 바울에게 보고한 내용으로 인해 바울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고후 7장의 요절이라 할 수 있는 10절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보낸 고린도전서의 강력한 메시지에 의해 고린도교회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구원에 이르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회개는 선악간입니다. 옳으냐 그러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회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심을 받은 그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므로 죄 사함을 받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까지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세상의 근심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지 않으므로 사망을 이룹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교회들이 성령의 조명이 없는 회개의식에 사로 잡혀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주와 함께 죽었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난
그 십자가의 도를 따라 주를 좇아가는 회개를 하지 못해 사망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1절)고 하는 바울의 바람대로 고린도교회는 두려움과 떪으로
디도를 영접하고 그를 순종하여 디도의 신뢰도 얻고 바울의 기쁨도 되었습니다(15-16)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교회는 진리의 복음이 전파되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그를 좇아가는
회개가 이루어져 주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수 있어야 교회답습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7장1절)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