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런웨이》
제83화 ― 낯선 도시
1982년 5월.
프랑스 파리.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창밖에는 서울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낮고 오래된 건물들.
낯선 글자가 적힌 표지판.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
강인은 가방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마침내 꿈꾸던 도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설렘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막막함이었다.
공항 안.
강인은 입국 심사대 앞에 섰다.
직원이 빠른 프랑스어로 물었다.
"Bonjour. Motif de votre séjour?"
강인은 눈을 깜빡였다.
"...네?"
직원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강인은 가방에서 입학 허가서를 급히 꺼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했다.
"패션."
"디자인."
"스튜던트."
직원은 서류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Étudiant?"
강인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일단 크게 대답했다.
"네!"
직원이 여권에 도장을 찍었다.
강인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직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미소를 지었다.
짐을 찾는 곳.
강인은 가방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검은 가방.
갈색 가방.
커다란 여행 가방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런데 자신의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강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가방 안에는 옷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준 재단가위.
미송과 함께 보던 스케치북.
친구들의 편지.
강인은 초조하게 컨베이어벨트를 바라봤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자신의 가방과 똑같이 생긴 가방을 들고 가고 있었다.
강인은 다급하게 달려갔다.
"잠깐만요!"
외국인 남자가 놀라 돌아봤다.
강인은 가방 손잡이에 묶인 분홍색 실을 가리켰다.
미송이 출국 전날 달아 준 표시였다.
'멀리서도 네 가방인 줄 알아보게.'
강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외국인 남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가방을 돌려주었다.
"Sorry."
강인도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공항 밖.
강인은 기숙사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택시 운전사에게 주소를 내밀었다.
"여기."
"가 주세요."
운전사는 주소를 읽더니 빠르게 무언가를 물었다.
강인은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전사가 다시 물었다.
강인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전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파리가 펼쳐졌다.
오래된 석조 건물.
작은 노천카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거리 모퉁이마다 놓인 꽃가게.
강인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도시가
창문 너머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파리구나.'
강인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택시가 어느 골목 앞에 멈췄다.
강인은 요금을 내고 가방을 들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기숙사처럼 보이는 건물은 없었다.
빵집.
꽃집.
작은 식당.
그리고 오래된 교회뿐이었다.
강인은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숫자 하나가 달랐다.
자신이 적어 둔 주소의 17번지를
운전사가 70번지로 읽은 것이었다.
강인은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봤다.
"..."
"...처음부터 다시네."
강인은 커다란 가방을 끌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주소를 보여 주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첫 번째 사람은 왼쪽.
두 번째 사람은 오른쪽.
세 번째 사람은 다시 뒤쪽.
강인은 골목 한가운데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도윤이 있었으면."
"말이라도 많이 했을 텐데."
하지만 곧 혼자 피식 웃었다.
도윤이 있었다면 길을 더 빨리 잃었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걷던 강인은 작은 빵집에 들어갔다.
배도 고팠고,
다리도 아팠다.
진열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빵들이 가득했다.
강인은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을 가리켰다.
"이거."
점원이 프랑스어로 물었다.
강인은 이번에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후.
커다란 바게트 다섯 개가 종이봉투에 담겨 나왔다.
강인의 눈이 커졌다.
"다섯 개요?"
점원은 알아듣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강인은 지갑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도윤이 있었으면."
"좋아했겠네."
빵집 한쪽에 앉은 강인은
바게트 하나를 뜯어 먹으며 주소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때 옆자리의 젊은 여성이 조심스럽게 한국말로 물었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강인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여성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강인이 주소를 보여 주자 그녀가 웃었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에요."
강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입니까?"
"네."
"대신 파리 지하철은 처음이면 조금 복잡해요."
강인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패턴도 찾아냅니다."
"지하철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여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노선도는 거꾸로 보지 마세요."
지하철역.
강인은 노선도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선이 얽혀 있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마치 복잡한 패턴지 같았다.
강인은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갈아타고."
"이쪽으로 두 정거장."
그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
패턴을 볼 때와 같은 집중력이었다.
마침내 강인은 제대로 된 열차에 올라탔다.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작고 오래된 방.
좁은 침대.
작은 책상 하나.
창문 밖으로는 낯선 파리의 지붕들이 보였다.
강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다.
갑자기 방 안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서울에서는 항상 곁에 누군가 있었다.
부모님.
미송.
도윤과 친구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강인 혼자였다.
강인은 가방을 열었다.
아버지가 준 재단가위.
어머니가 싸 준 작은 바느질 도구.
도윤이 몰래 넣어 둔 쪽지.
길 잃으면 아무나 붙잡고 송강인이라고 해.
유명해지면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강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그 엉뚱한 편지 덕분에
조용한 방이 조금 따뜻해졌다.
마지막으로 미송의 사진을 꺼냈다.
남산에서 찍었던 첫 커플 사진.
사진 속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강인은 사진을 책상 위에 세웠다.
"미송아."
"나 도착했어."
"벌써 길도 잃었고."
"빵도 다섯 개나 샀어."
잠시 웃던 강인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그래도."
"잘해 볼게."
그때 창문 너머로 바람에 흔들리는 천 조각이 보였다.
맞은편 건물의 작은 의상실이었다.
창가에는 여러 색의 원단과 마네킹이 놓여 있었다.
강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낯설기만 했던 도시가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다.
하지만 원단을 만지고,
선을 그리고,
사람을 위한 옷을 만드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강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여기도 사람이 입는 옷을 만드는 곳이니까."
파리의 밤.
도시는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어 갔다.
강인은 낯선 방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새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첫 장에 적었다.
'낯선 도시.'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두렵지만, 그래서 더 배우고 싶다.'
언어도.
문화도.
거리도 모두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섦 속에서
강인의 새로운 성장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제83화 끝 ―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