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브레이크 뉴우스에 실린 나은의 수필의 미학

[이숙진]

“양반 체면에…양 볼때기 옴실거리며”

<샘터에서>김우영, ‘은근초란 이름의 상추쌈’

김우영 /수필-소설가

▲ 양 볼때기를 옴실거리며 그 맛이란.

요즈음은 비닐하우스 재배로 인하여 언제 어느 때 이고 상추쌈을 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여름 한 철에만 잠시 먹을 수 있었다. 여름날 정오에 온 식구가 둥그런 두레상을 마루에 펴고 앉아 금방 채전에서 따온 상추 잎을 우물물로 씻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왼손에 놓고는 보리밥 한 덩이와 된장을 얹어 입에 넣고는 양 볼때기를 옴실거리며 먹던 그 맛이란.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었다. 여름 볕이 따사롭게 토방에 드리우고 씨암탉이 담 밑을 기웃거리는 날, 배고프던 차에 밥 한 사발을 단숨에 먹은 지라 졸음이 스르르 와 허리띠 풀어 배꼽 드러내 놓고 낮잠 한숨을 자노라면 여름 해는 짧아 서녘을 붉게 물들이곤 하던 그 때 그 시절.

상추는 국화과 일년초로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꽃은 6월쯤 피는데, 상추 잎 특유의 풋풋하고도 부드러운 맛 때문에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추쌈은 식탁에서 인기이다. 상추 잎 뿐 아니라 깻잎쌈, 피마자 쌈, 호박잎쌈, 배추쌈, 김치쌈 등의 소채류 쌈은 옛 부터 서민의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상추쌈이다. 뭐랄까, 음식물을 남에게 보이지 않고 상추 잎이란 소채류로 보기 좋게 싸서 먹은 우리 조상의 식탁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쌈을 싸서 먹는 모습이 양반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여겼던지 예절을 가르치는 책에 품위 있게 상추쌈을 먹는 방법이 예시되어 있다. 이덕무라는 사람이 쓴 ‘사소절(士小節)’에 보면 상추를 싸 먹을 때 직접 손을 대선 안 되고 먼저 수저로 밥을 떠 밥그릇 위에 가로놓고 젓가락으로 상추 두세 잎을 들어 밥을 싼 다음 입에 넣고서 그 다음 된장을 떠먹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당시 고려에 이 풍습이 멀리 원나라에까지 전해져 고려풍(高麗風)의 하나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방법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당시의 양반 사회에 흡수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상추쌈이란 손바닥을 사용하여 밥과 된장 등을 올려놓고 먹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이 아닐까. 그땐 예의범절을 중시하던 때라 흰 수염 긴 할아버지가 며느리나 자손들 앞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상추쌈을 싸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안 먹자니 맛이 그립고, 먹자니 양반 체면에 그렇고 하여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 굵직굵직한 고추 밭 이랑 사이에 심은 상추일수록 약이 잘 올라 최고로 평가되며

 
상추쌈에는 취면(就眠) 성분이 있어 먹으면 졸음이 온다는 얘기는 흔히 알려진 말이다. 그러나 이 상추쌈을 많이 먹으면 남녀 정사(情事)가 잘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호사가들의 군침을 흘리게 하고 있다. 속설이기는 하지만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상춧잎 자체가 여성의 처녀막이나 질 벽을 뜻하고, 상추 잎이나 대를 자르면 젖 같은 유즙이 나오는데 이것이 남성의 정액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젖이 적은 여인에게 이 유즙을 먹이면 젖이 많아진다는 민간 한방법이 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 집에서 상추를 심을 때, 텃밭이 아닌 채전이나 뒤켠에 심고는 싸리나 짚으로 울타리를 쳐 아낙네들이 암암리에 가꾸었다. 상추를 많이 심게 되면 그 집 안방마님의 음욕과 성욕이 많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추는 몰래 그 집 안주인의 치마폭에서 큰다 하여 ‘은근 초’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 상춧잎 자체가 여성의 처녀막이나 질 벽을 뜻하고, 상추 잎이나 대를 자르면 젖 같은 유즙이 나오는데 이것이 남성의 정액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특히 굵직굵직한 고추 밭 이랑 사이에 심은 상추일수록 약이 잘 올라 최고로 평가되며 남편의 밥상 위에 알뜰하게 챙겨져 남자의 성욕을 키운다는 유감 주술법이 있다. 이런 며느리를 욕할 때 예전에는 ‘고추밭 상추 가리는 년’이라고 했다. 남편을 위하는 척하며 실은 자신의 음욕을 채운다는 얘기다.

안방의 문갑이나 장롱은 잠그지 않아도 상추를 심으면 싸리나 짚 등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은근초를 감쌌던 옛 선조들의 행태를 보면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녀가 물 불을 안 가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서양의 철학자 로렌스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은 육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고, 동양의 성인 임어당도 ‘인간의 행복은 대개가 관능적인 행복에 있다’고 그의 저서에서 기술한 바 있다.

상추 잎을 펴고 그 위에 밥 한 술과 된장을 얹고는 입을 찢어지게 벌려 쏙 집어넣고는 양 볼때기 옴실거리며 먹는 은근초의 그 맛이란 어쨌든 참을 수 없는 유혹인 것만은 사실이다. 

 
▽ 김우영 프로필

- 충남 서천 출생
- 장편소설은 ‘월드컵’ 단편소설은 ‘라이따이한’
- 꽁트집 ‘거미줄’ 수필집 ‘부부’ ‘살며 생각하며’ 外 多數
- 한국문예대상, 박재삼 문학상 2005년 한국문학세상 작가상
- (사)한국해외교류문화협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