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0편
1) 나무막대 시계
2) 용머리 해안
3) 아버지가 자라고 있다
4) 하루의 장레식
5) 해국 (2)
6)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7)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던 것이다
8) 다시 안동애서
9) 너에게만 말해 줄게
10) 사과
나무막대기 시계
막대기가 비스듬이 꽂혀 있다
정오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가고 싶은 태평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시간을 채운 다음 뚜껑은 닫는 걸까 여는 걸까
다음 순서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두운 골목이 쭈뼛해지지 않도록
불빛이 꼬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지금은 까맣게 굳은 딱지지만
떼 내고 보면 새살이 돋아나 환해질 거라고
멸종 위기의 식물이나 동물이 걸어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내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가고 싶어서
이런 뻔한 생각을 하면 더 쓸쓸해져서
백 년 전 오늘 날씨를 읽었다
막대기, 태평양, 뚜껑, 목련
도대체 낯선 이 조합이 어떻게 어우러져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인가
태평양으로 가는 방향을 모르는 척 막무가내 가만히 서 있으면
다 용서되는 것이냐고
그래도 구차한 변명들이 목련 꽃송이로 피어났으면 좋겠다고
뚜껑이 열리고 햇살이 길게 꽂히기를 기다린다
태평양에 잘 도착할 것이다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
나무막대 시계가
빗금 친 제 그림자를 방향처럼 짚고 길게 서 있다
용머리해안
바람의 포구 사계리 해안
원생누대의 박제된 바람 뼈가 묻혀 있다
끝없이 깃을 치는 파도의 하얀 날개
바람 뼈를 묻은 암벽이 가슴을 드러내어 길을 내었다
백만 년을 살아온 암벽을 보려고
사람들이 문명의 폰카를 들이대며 몰려들고 있다
오랜 연대기를 거쳐온
거친 검은 암벽의 시간 속으로 걸어간다
먼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길의 흔적을 지우며
끝없이 암벽에 저를 묻는다
박제된 바람의 뼈가 묻혀 있는 해안가
층층 쌓인 뼈가 서로를 단단히 받치고 있다
아버지가 자라고 있다
본 적 없는 식물을 심었다
그 후부터 나는 기다린다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를
사라진 생각들의 이름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나를 버려다오, 아버지가 촛불처럼 흔들리며 말한다
희미해진 아버지 얼굴에 손을 얹으며
내 피가 바람의 피였구나 생각하면, 아버지를 들추며
모래무덤 속으로 발을 거두는 구름
아버지의 아버지를 본 적은 없지만
염색체를 재생하곤 하는 잘린 나무의 밑동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구름에게 말을 건넨다 그때마다
나는 하늘을 짚고 서 있는
식물의 숨구멍을 생각했다
지도 위에 구름이 떠 다닌다
부활을 꿈꾸고 있는 구름에게 발톱을 붙여주었다
하늘을 흘겨보던 손톱을 자주 깨물던 소녀가 꽃집 앞을 지나 선착장에서
평평한 바다 끝 무덤을 바라본다
오래전 버려져서, 잊힌 아버지가 쓰이지 않는 말을 하며
본 적 없는 식물처럼 자꾸 자라고 있다
하루의 장례식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오늘을 닮았다
만년설에 박혀 있는 기호들이 흘러 내린다
수천 년 빙하의 내력이 바닷속 깊이 수장된다
내일쯤 북대서양을 떠나 파미르 고원 지나 비단길을 걷다가
천 년 전을 기다리다가
누군가 소리보다는 울음에 가깝다고 고백처럼 말하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햇살에 버무린 독이 싹을 틔운다
질주의 본능은 화분 속 뿌리에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바오바브나무 영령이 쓴 유서를 메일로 받았다
수상한 꼬리만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공감하지 않는데도 종일 뛰어내리는 물발굽들
시멘트 바닥을 두드리고 맨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언젠가 대양에 닿을 것이다 아픈 발톱을 보면 알 수 있다
허공에 걸려 있는 무표정들 때로는 불안하게 때로는 성자처럼
레시피를 점검하고 오늘을 도마 위에 올린다
해체 비법은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자주 불편했던 오늘을 죽여 만년설에 묻었다 언젠가
유빙으로 떠돌다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반성보다는 불온한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내가 낯설어질 때마다
별이 되고 싶은 까만 씨앗을 허공에 심었다
간빙기 때의 별 이론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내일과 어제가 꼭짓점에서 만난다는 명제를 잊고
오늘을 떠나보냈다
천 년 전 서쪽으로 간 계절의 여정을 바람에게 물었다
해국(2)
그녀가 물어서 도착한 종달리 바닷가
세상의 중심은 외딴섬 보다 더 고독한 것이어서, 몸을 낮춘 그녀 앞에선 바닷가 바람도 마음을 낮추어 지나곤 한다. 집 나온 지 오래됐어요. 이 년이 넘었어요. 올 추석에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아침 일찍 파도 소리에 잠을 깨는 여자 바닷가 작은 집 덜컹거리는 창가에서 망연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여자 지나간 계절에게 꽃의 자세를 묻는 여자 왜 바닷가로 오게 되었는지 바위가 어떻게 곁을 내주었는지 그녀 앞에선 파도의 혀가 왜 부드러운지, 사뭇 그 연유가 궁금해진다.
연보랏빛 모자를 꾹 눌러쓰고
바닷가에 길을 내는
나도 나와 나 사이, 수평선과 그 너머의 행간을 그녀처럼
침묵으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이거나 다른 종種이거나
곤히 잠든 밤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도착한 별빛을 찾아 떠났다
서로 다른 식물의 종이 따라왔다
고인 물처럼 정박당한 시간, 뒤척거리는 새
마네킹처럼 심장을 응시하며 자지도 않고 길바닥으로
소리를 흘러 보낸다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은
주소를 잊어먹은 아비를 기다리는 것일까
입 안에 이팝나무 꽃 한 줌을 넣어주던 어미도
이미 돌아오는 길을 잊어먹은 모양이다
구석에 웅크리고 않아 죽은 적 없는 것처럼 떠 있는
아비 구름 어미 구름을 볼 때마다
먼 행성의 불빛들이 밤마다 찾아왔다
멀어지는 속도만큼 희미해진 작은 옛집을 생각했다
적요로운 흰 초승 낮달
바깥이 어두운 내면들
주파수가 다른 소리의 파장을 들으며
이틀째 같은 속도로 비가 내린다
뒤꿈치를 보니 어제 죽은 햇살의 다른 종이다
공중에서 길을 잃은 비문 같은 떠돌이 구름 몇 장 초대장에 새겼다
나는 늘 알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곤 했다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던 것이다
머리통이 견고한 못은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를 부르며 단련되었다
꽉 조이며 맞물리던 시간에서
못은 얼마나 단련되며 길들여졌나
흰 벽을 우듬지라 믿으며
걸어 놓은 빨간 모자가 열매인 줄 알고 쪼아 먹으며
후렴구가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며
웅덩이 빗물처럼 벽안에 고여 있었다
고여 있는 물이라는 생각을 잊고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경전처럼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으면 벽이 창공이 될 수 있을까
자목련 서 있는 꽃밭으로 눈길이 간다
나무 어깨에 이마에 박힌 자줏빛 꽃송이들
바람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나무를 빠져나온 꽃잎들
날개를 파닥이며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간다
먼 눈빛으로 사람들이 벽이라 느낄 때
못은 꽃잎처럼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그 너머로
마음껏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안동에서
병산서원 앞에서 강물은 서서히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가는 곳 알고 있는 듯 손잡고 함께 가고 있었다. 맹개마을 앞에선 생각에 잠긴 듯 고요히 천천히 가고 있었다. 발등 고운 발이었다. 저렇게 평화롭게 걸어가는 걸 모천에게 타전하고 싶었다. 염려 마시라고.
물에도 꼬리가 있는 걸 알았다. 길게 연하여 부드러웠다. 칼선대에서 본 강물은 허리를 잠시 펴고 쉬어가는 듯했으나 가끔씩 뒤척이는 녀석도 있었다. 산허리를 휘어 감고 여와 소를 지날 때면 흰 꼬리를 하얗게 드러내기도 하며 까르르 웃기도 했지만 싱싱한 발랄함이 아름다웠다.
혼자서 처음 걸어 나왔던 신작로 같은 길, 하얀 꼬리로 흔들리는 몸통의 균형을 잡으며 앞 다투지 않고 하나가 되어 걸어간다. 남아 있는 그때의 시간들을 강물에 천천히 흘러 보낸다 안녕히 강물. 생은 물처럼 흐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는 왜 그때 하나로 흐를 수 없었는지, 물의 바깥은 지금쯤 어떤 모양으로 변했는지 강물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너에게만 말해 줄게
오늘 밤 나는 저곳으로 갈 것이다
송장 자세로 손등을 바닥에 뉘이고 고요히 누워 있다
그 길로 가는 길목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위장술을 쓰고 있기도 해서
우물가 목백일홍 나무에 사과가 달려 있기도 했다
깊은 잠에 이르러야 행복한 벌거벗은 나무들이
불면증 처방전을 이마에 붙이고 숲 속에 길게 줄지어 서 있다
한솥밥을 먹었던 귀신들을 찾아 나선다
엄마 아버지 내가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비문에서 보았던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찾았다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며
이산가족처럼 울음을 터트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누런 이빨과 성성한 흰 머리칼을 한 가족들과 낄낄거리며 웃기도 했다
여기서는 이승을 저승이라 했다
발전한 이승을 모르는 듯 할아버지는 옛날에 머무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친구의 증손자 안부를 묻기도 하며
너에게만 말해 줄게 신비한 표정을 지으며
바람은 이승과 저승을 모두 아우른다고 가르쳐 주셨다
정녕 궁금한 내 행복이나 미래에 대해선
그건 너만이 알 수 있는 거라고 하셨다
나는 내심 신통한 한방 같은 걸 기대했다가
귀신처럼 알고 있다는 말이 모두 맞는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잠시 실망에 빠져있을 때
할아버지의 움푹 파인 눈에서 순간 푸른빛이 일었다
멀리서 새벽 범종소리 은은하게 들려오고
이곳과 저곳의 경계쯤에서 툭 꽃송이 터지는 소리 들렸다
나는 아직 진짜 귀신이 될 수 없음을 그때 알았다
습관처럼 아이섀도로 눈두덩을 깊게 하고 긴 속눈썹을 붙이고 붉은 장미 같은 립스틱을 바르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람 무늬를 입고 저승을 빠져나온다
내가 잠시 저승의 불법체류자인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사과
칼끝을 겨눈다
심장 부근이다
드러나는 탐스러운 속살
반에서 반을 자르고 다시 반을 자르고
눈에 쉽게 뜨이지 않도록 안쪽에 두고 애착했을
다부진 씨앗마저 도려낸다
생명을 품고 있던 한 덩어리 우주가
칼자루를 쥔 나에게 간단히 해체되었다
그의 일생이 몇 조각 사과로 압축되었다
짧은 시간 나는
지구본처럼 둥근 내면 구석구석을 다 음미하며
살아온 날의 반성도 없이
상큼하고 달달한 그의 살 냄새를 만끽했다
이런 날을 위해 한 덩어리 붉은 우주는
따가운 햇살 거친 바람을 견디며
오롯이 한 생을 걸어온 것인가
자기 몸처럼 저를 아끼고 사랑했을
늙고 거친 손길을 생각하기도 하며
분홍꽃 어린 시절에 아슴아슴 젖기도 하며
그리운 들판 고향집 언덕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누구에겐가 잊고 지냈던
사과를 떠오르게 하는 붉은 소우주
서산으로 가는 쓸쓸한 시간을 지나서
다음 봄을 흔들며 분홍꽃 피울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