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 천재화가 취옹 김 명 국(1600-1662이후)
달마도(達磨圖)로 더 많이 알려진 김명국(金明國)은 조선 중기 인조(仁祖), 효종(孝宗) 연간에 활동했던 미천한 신분출신으로 확실한 생몰연대는 모르고 있다. 도화서에 사학교수(四學敎授)를 지냈으며 자는 천여(天汝), 호(號)는 취옹(醉翁), 연담(蓮潭)이며, 필력이 힘차고 활달한 감필법(減筆法)의 대가(大家)로 도석화(道釋畵)와 산수화(山水畵) 등을 그렸으며, 조선 중기 화가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풍(畵風)을 창출(創出)한 화가였다. 김명국은 천재(天才) 화가, 신기(神技)의 화가, 주광(酒狂)의 화가 등으로 여러가지가 별칭이 붙어다녔다.
< 술(酒)은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자 생명수이다.>
김명국은 그의 호(號)를 보듯이 「술 취한 늙은 이」라는 뜻의 취옹(醉翁)으로 그림을 그릴 때면 맨 정신으로 작업을 하는 적이 없었으며, 항상 취중에 취필(醉筆)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만취(滿醉)되어 비틀거리는 와중에 술이 바로 기(氣)의 원동력이 되어 화제(畵題)가 떠오르면 신기(神氣)가 발현되어 신운(神韻)에 가까운 훌륭한 명작이 표출(表出)된다. .즉 술이 만취되어야만 명작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술이 바로 생명수였었다.
천성이 호방(豪放)하고 대범한 자유인으로 김명국은 죽은 후에도 어느 화가도 받지 못한 ‘신필(神筆)’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김명국은 뛰어난 천재성에다 새로운 기격(氣格)이 뒷받침 되어 표출되는 그만이 이룰 수 있는 높은 경지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주(大酒) 화가들이 많았지만 조선 후기의 과팍한 화가 최북과 말기의 장승업, 세 화가를 조선의 3대 광기(狂氣)의 화가라고 한다. 말술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두주불사(斗酒不辭) 김명국(金明國)과 술에 미친 최북(崔北)(1712-1760이후)과 술에 매우 취하여 살아가는 선비로 취명거사(醉冥居士 )장승업(張承業)(1743-1897)이다. (조선회화 비망록 12편 참조. 「남종국 편저 그림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김명국은 술과 관련된 일화들이 문헌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통신사의 화원으로서 일본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일본 열도를 달군 신기(神技)의 화가>
조선통신사가 1607년(선조40)에 1차로 시작하였는데, 4차인 1636년(인조14)에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도화서의 교수직을 맡기도 한 김명국을 일본에 보냈다. 그림 솜씨가 좋아 일본 내에서 학자와 문인들이 김명국의 그림에 감탄을 하였으며 그의 그림을 받고자 매일 김명국의 거처하는 인근에 장사진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4차 수행화원으로 가서 일본 당대 최고화가 기노탄유(狩野探幽)와 교류하였으며 백로도(白鷺圖), 달마도(達磨圖)등을 그렸다.
1643년(인조21)에 5차 조선통신사 사행일정이 예정되어 있자 일본에서는 수행화원으로 김명국을 꼭 보내 달라는 요청이 왔으며, 김명국은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두 번째로 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5차에서는 수행화원을 두 명으로 했다. 김명국과 같이 가게된 수행화원은 이기룡(李起龍)(1600-?)으로 도화서 화원교수이다. 일본내에서는 김명국의 그림 솜씨를 4차 때에 보고 듣고해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통신사행에 김명국이 포함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일본열도가 떠들썩할 정도로 환호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사행이 오사카에서 일본의 수도 애도(江戶)까지 가는 길에는 일본의 엄격한 규제에도 많은 인파가 연도에 나와 환영을 하였다. 사행이 애도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학자들과 문인들이 몰려 나와서 김명국의 그림을 구하고자 그의 뒤를 따라 다녔고, 심지어 사절단 숙소 밖에서 줄지어 밤샘까지 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밀려드는 일본인의 요청 때문에 쉴 틈 없이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지친 몸을 가늘길 없어 울번까지 했었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었다. 이 때 이름을 明(명)에서 命(명)으로 바꾸었다.
도구가와(德川) 막부(幕府)는 김명국을 다음 사행(6차) 때도 파견해 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미 그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작품만을 보내 주겠다고 화답하였다.
김명국이 일본에서 그린 백로도(고려미술관 보관), 달마도(국립박물관)가 있으며 달마도는 일본에서 전전하던 것을 일제 때 우리나라가 구입하였다.
『 김명국의 달마도(達磨圖)를 보면 그의 성격과 화격을 짐작할 수 있다. 떠 오르는 영감을 빠르고 힘찬 필력의 감필법과 간결하면서도 큰 변화를 느낄 수 있는 함축적인 미에다 깊은 정신세계를 표출하며,달마의 이국적인 풍모를 느낄 수 있다. 그만의 표현 가능한 신기(神技)의 발현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 <시대룰 초월한 전위예술가>
김명국의 술에 얽힌 일화를 보기전에 20세기에 일어났던 근대미술의 두 가지를 김명국의 작품제작 과정과 일부 작품과 연관지어 보겠습니다. 학문적인 연구결과가 아니고 단순한 견해입니다. 개인 견해로 이론상 합당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김명국이 17세기 초에 활동한 화가로써 기이한 표현 행위를 했었다는 일화를 볼 때 20세기 근대 미술의 일면을 보는 듯 상상되어 집니다.
<근대 미술 액션 페인팅>
*세계 2차대전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회화양식의 일종으로 추상표현주의 미술(형식은 추상적이고, 내용은 표현주의를 추구함)이라는 명칭의 액션페인팅(행위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로 인해서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졌다고 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던 미술입니다. 대표적 작가로 미국 출신의 잭슨 폴록(1912- 1956)이 한 액션 페인팅은 큰 켄바스를 펼쳐 놓고 물감을 켄바스위에 흘리거나 뿌리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며 화가의 격렬한 동작에 의해 힘차고 긴장감 넘치는 표출을 한 회화 방식입니다.
김명국이 일본에 갔을 때 일어난 일화를 보면 바로 액션페인팅의 일부였다는 생각이 떠 오릅니다.
한 일본 유지가 김명국에게 벽화를 얻기 위해 세 칸짜리 좋은 새집의 벽에 비단으로 바르고 많은 사례비로 줄 것이니 벽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명국은 술부터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주인은 좋은 술을 말대기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금가루 물을 한 사발 갖다 주었다. 김명국은 밤새껏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집주인은 그림을 다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려 왔다.
그런데 기가 막힐 일이다. 벽에 그림은 커녕 술에 취해 제 몸도 겨우 가눌 상태이다. 주인이 화가 나서 큰소리치며 위협을 하니 김명국은 그제서야 취기상태에서 일어나더니 금물을 한 모금 입에 가득 뿜고서 벽의 네 모퉁이에 확 품어 버린다. 그 장면을 본 주인은 깜짝 놀라고 화가 나서 당장 칼을 뽑아 죽일 듯이 한다.
그러자 김명국은 크게 웃으며, 붓을 잡고 벽에 뿌려진 금물을 물감으로 해서 그림을 그려 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레 작품이 되어 간다. 작품이 완성되자 조금 전에 뿜었던 금물이 산수화가 되어 마치 신기(神技)로 이루어진 듯 표현할 수 없는 명작이 된 것이다.
일본집 주인은 너무나 감탄하며 사례를 했다. 그 이후 그 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각지에서 구경꾼들이 몰려 들었다. 집 주인은 관람료를 톡톡히 받아 갑부가 되었다는 일화다.
김명국이 그림 그리는 방법이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의 일부 같지 않습니까? 금물을 입에 머금어서 벽에 뿜어 훌러내리는 형상을 그림으로 완성한 그 과정이 3세기를 앞선 행위미술의 단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을 의심케하는 극사실주의 미술.>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시작된 근대 미술의 사조로 일상 생활을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나타내어 사진처럼, 실물처럼 보이게 오직 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술인데 하이퍼 리얼리즘, 수퍼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인조 임금이 김명국을 입궐하라고 명하여 공주에게 줄 선물로 노란색의 비단을 붙인 「빗 접」에 그림을 그려 올리라고 명한다.
김명국은 열흘이 지나 빗 접을 들고 입궐을 했다. 인조 임금은 빗 접을 받아 들어다 보니 아무래도 그림을 그린 것 같지 않았다. 인조는 화가 나서 김명국을 대령시켜 놓고 문초를 했다.
김명국은 인조 임금에게 그림을 그렸으니 빗 접을 공주에게 주시면 아실 거라고 했다. 빗 접을 공주한테 보냈더니, 이튿날 아침에 공주가 빗 접으로 머리를 빗다보니 이가 두 마리 붙어 있지 않은가. 공주는 깜짝 놀라 이를 죽이려고 하니 잘 되지 않는다. 이상히 여긴 공주가 자세히 들어다 보니, 그것은 이가 아니고 바로 「이」그림이 아닌가. 이런 사실을 안 인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림의 귀신’ ‘백년이내에는 필적할 이가 없을 것 같다’. 고 하듯. 김명국의 「이」 그림은 눈을 의심케 하는 극사실주의 미술의 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김명국은 3세기를 앞선 또 한 분야의 예술의 새로운 세계를 표출한 천재 화가였다.
<술에 관한 일화>
* 영남의 한 사찰의 명부전에 그려진 명사도(지옥도)의 이야기를 여러 자료를 통해 적어 보겠습니다.
어느날 영남의 스님 한분이 명주 50필을 갖고와서 김명국에게 지옥도를 그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김명국은 명주 50필로 술을 다 사 먹고도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스님이 찾아와서 그림을 달라고 하자 김명국은 화의(畵意)가 잡힐 때 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며 돌려 보낸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지옥도가 머리에 잡히자 단숨에 아비규한의 무간지옥의 흉악스러운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 놓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에 그림이 되었다고 연락을 받은 스님이 찾아오더니 그림을 보고 안색이 홱 달라진다. 지옥 속에 떨어진 인물들은 모두 중들이기 때문이다. 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불사(佛事)를 그르쳐 놓았다고 화를 내며 대드니, 김명국이 호통을 치며 “지옥이란 없네 있다면 자네들이 안가고 누가 간단 말이야 지옥이 있다고 겁을주고 시주를 청하는 너희들이 정녕 지옥의 주인이 아니란 말이야” 하며 당당하게 그림에 대한 취지를 설명한다. 스님이 섬뜩해 하며 그래도 이건 좀 너무 하니 다시 그려 달라고 하자 취옹은 완전하게 해 줄 터이니 술이나 더 받아 오라고 한다. 술을 한 말 더 사오니 큰 잔에 철철 넘게 부어 마시고는 화면에 몽당붓을 대기 시작한다. 중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을 그려넣고 옷에는 채색을 하니 순식간에 그림이 확 달라졌다. 조금 전의 그림은 간데없고 새로운 그림이 스님앞에 놓여 진 듯, 스님은 깜짝 놀라면서 듣던 소문과 같이 ‘정말 천하의 신필(神筆)이로다.’ 하며 감탄한다.
술에 관한 유명한 일화로 그려진 이 그림은 불교계에서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명국은 성품이 대범하고 호방하며 해학적이었다. 그의 사망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2년 작으로 이금산수(泥金山水)로 사계절을 각 계절 마다 2폭을 한 쌍씩으로 8폭을 꾸민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가 남아 있어 생몰(生沒)시기를 1662년 이후로 짐작하는 것이다
<작 품>《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 《기려도(騎驢圖)》 《관폭도(觀瀑圖)》
《투기도(鬪碁圖)》 《은사도(隱士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
<관련 문헌>
*남태응(南泰膺)(1687-1740) 청죽화사(聽竹畵史) 조선후기 미술평론가.
‘청죽화사’는 청죽만록(聽竹漫錄)중 별책인 청죽별지(聽竹別識)에 들어있는 화사(畵史) 부분이다.
*남유용(南有容)(1698-1777) <뇌연집(雷淵集> 조선후기 문신학자
*김세렴(金世濂)(1593-1646) <동명집(東溟集).해사록(海槎錄)> 1636년 4차 조선통신사 부사로 1636년6월11일-1937년 3월 9일까지 쓴 기행일기
*정래교(鄭來僑)(1681-1757) 완암집(浣巖集) <화사 김명국(畵師 金明國)> 조선후기의 시인, 문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