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권씨(安東權氏)의 계파
"계파(系派)"라고 하면 어쩐지 선입감이 좋지 않을런지도 모르나 보학(譜學 : 족보에 관한 학문)에서의 계파란 단지 편의상 필요에 따라 후손들의 갈래를 적절히 구분해 놓은 것일 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안동 권씨는 추밀공파를 비롯해서 14, 혹은 15개 계파로 나뉘어 진다. 시조이신 태사공할아버지 이후 10세 손 전후에 이르러 비로소 가문이 크게 번성하고 친족이 급격히 불어나게 되었는데, 후손들이 가문의 계보를 알아보기 쉽게해 두기 위해 주로 그 당시의 여러 형제 분들을 파조(派祖 : 각 계파의 시조)로 하고 그 분들의 관직명이나 시호(諡號 : 왕이 공신 등에게 내리는 작위) 등을 계파의 명칭으로 하여 적절히 구분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본관(本貫)에 같은 성씨를 쓰는 족친들이라면 모두가 한 조상의 후손들이므로 계파가 다르다고 해서 타성(他姓)을 대하듯 해서는 안된다. 안동 권씨 가문은 추밀공파를 비롯하여 14개, 혹은 15개 계파로 나뉘어 진다.
(1) 수중공파(守中公派), 혹은 종파(宗派) 파조(派祖) : 10세(世) 수중공(守中公)
태사공(太師公)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생존하시던 때의 관작이 호장(戶長)이셨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안동 권씨 가문의 종택(宗宅-종가)이다.
(2) 추밀공파(樞密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수평공(守平公)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충순공(忠純公)
고려 명종(明宗) 때인 서기 1180년 경에 출생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高宗) 때 광록대부(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셨다. 고종 37년인 1250년 7월 16일에 돌아가셨으며, 후에 추밀공파(樞密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셨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상장군(尙書左僕射上將軍)으로추증되셨다. 공(公)은 용모와 풍채가 당당한데다가 성품이 순수하고 곧아서 옛스러운 기품이 있었고 또 지극히 청렴결백하였다. 일찍이 공(公)이 대정(隊正)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마침 낭중직(郎中職)에 있던 복장한(卜章漢)이란 사람이 억울한 죄목으로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큰 비가 와서 그의 전답이 강물에 휩쓸려 못쓰게 될 지경에 이르자 공(公)이 수 년간 그의 땅을 보살피며 경작하여 소출을 거두게 되었다. 몇 년후 복장한이 유배에서 풀려나서 돌아왔는데 공(公)은 복장한과는 전혀 교류가 없어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도 그가 없는 동안에 거둔 소출의 내역과 지주에게 줄 몫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그에게 돌려 주었다. 이에 복장한이 크게 감복하여 굳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만일 그 땅을 그대가 돌보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경작하여 그 소출을 취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그동안 못쓰게 되었을 나의 땅을 잘 보살펴 오다가 이제 내게 되돌려 주고자하는 것 만해도 지극히 고마운 일이거늘, 하물며 내가 어찌 지주의 몫까지 챙겨 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두 사람이 한동안 서로 사양하며 다투더니 마침내 공(公)이 기록문서를 놓아두고 가버렸다. 이를 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르기를, "서로 재물을 차지하고자 쟁탈을 일삼는 세상인데 저런 사람이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다.
또 귀한 가문의 자제로서 견룡(牽龍 : 관청의 수비장교)의 직에 특별히 임명된 적이 있었는데 집안을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러자 주위에서 이르기를, "이는 영예로운 일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런 기회에 아내를 버리고 다시 새장가를 들어 부귀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그대도 마음만 새로이 먹는다면 어느 누가 사위삼기를 주저하겠는가." 하며 그 직임을 맡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공(公)은 웃으며 말하기를, "빈(貧)과 부(富)는 오로지 하늘에 달린 일인데, 내 어찌 명예와 부(富)에 눈이 어두워 20년을 함께 고생하며 살아온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귀를 좇는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니, 권하던 자들이 모두 부끄러워 하였다』 【고려사 절요(高麗史節要)】 돌아가신 후에 충순(忠純)의 시호를 받으셨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묘소가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의 천마산(天摩山)아래 침교(砧橋) 부근, 혹은 백자동(栢子洞)에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안타깝게도 잊혀졌으며, 최근 후손들에 의해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津東面 下浦里)에 단소(壇所)가 건립되어 그로부터 매년 봄 . 가을에 제향을 올려 오고 있다.
(3)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 혹은 시중공파(時中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시중(時中)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고, 수중공파(守中公派)의 파조이신 수중공(守中公)의 아우님이시다. 부호장(副戶長)을 지내신 것으로 전해진다. 그 밖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4) 복야공파(僕射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수홍(守洪)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복야 상장군(僕射上將軍)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고, 추밀공파의 파조이신 추밀공(휘 守平) 할아버지의 아우님이시다. 정3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셨고, 후에 정2품 상서좌복야상장군(尙書左僕射上將軍)으로 추증되셨다.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안동시 서후면 교리(西後面 校里)에 후손들에 의해 단소(壇所)가 건립되어 봄 가을로 제향을 올려 오고 있다. (5) 동정공파(同正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체달( 達) 호장동정(戶長同正)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전혀 없다. 안동시 안막동(安幕洞) 호소곡(虎嘯谷)에 후손들이 단소(壇所)를 만들고 비(碑)를 세워 향사(享祀)를 올려 오고 있다.
(6) 좌윤공파(佐尹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지정(至正) 좌윤공(佐尹公)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그 밖에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7) 별장공파(別將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영정(英正) 호장(戶長) 별장(別將)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호장(戶長)과 별장(別將)을 지내셨다는 것 이외에는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8) 부정공파(副正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통의(通義) 식록부정(食祿副正)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옛 족보에는 신기도령(神騎都領) 식록부정(食祿副正)을 지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지방 호족(豪族)에 대한 명예직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9) 시중공파(侍中公派), 혹은 인가공파(仁可公派) 파조 : 10세(世) 휘 인가(仁可)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문하시중(門下侍中)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옛 족보에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중내급사란 조선조의 종부시(宗簿寺)에 해당하는 정6품의 중앙관직이다. 또 문하시중이란 조선조의 영의정(領議政)이나 좌의정(左議政), 또는 우의정(右議政)에 해당한다.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10) 중윤공파(中允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숙원(叔元) 호장(戶長) 중윤(中允)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지방관직인 호장(戶長)을 지내셨고 중앙관직으로는 중윤(中允)을 지내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11)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사발(思拔) 군기감(軍器監)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군기감(軍器監)을 지내셨다 하는데, 이는 종3품에 해당하는 중앙관직이다. 그 밖에는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12) 광석공파(廣石公派), 혹은 대의공파(大宜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대의(大宜) 호장(戶長)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호는 광석(廣石)이시고 호장(戶長)으로 지내시다가 안동(安東)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1977년 10월에 파손(派孫)들에 의해 안동시 옥동(玉洞) 싸릿골에 단소(壇所 : 제사를 올리는 제단)와 비(碑)가 세워져서 향사(享祀)를 올려 오고 있다. (13) 호장공파(戶長公派), 혹은 추공파(樞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추(樞) 호장(戶長)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호장(戶長)을 지내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파조(派祖) : 10세 휘 척(倜) 군기감(軍器監)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 태사공할아버지의 10세손이시다. 군기감(軍器監)을 지내시고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에 오르셨다. 그 밖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1984년에 후손들에 의해 경북 상주군 공검면 율곡리(恭儉面 栗谷里)의 숭덕산(崇德山) 기슭에 단소(壇所)가 조성되어 그로부터 향사(享祀)를 올려 오고 있다. (15)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 파조(派祖) : 10세(世) 휘 형윤(衡允) 전서(典書)
옛 족보에는 복야공파(僕射公派)의 파조이신 복야공(僕射公 : 휘 守洪)의 손자이시며 태사공할아버지의 12세손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급사중파의 파보(派譜) 등에는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해서 정확한 계대(係代)는 분명치 않다. 그 밖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고려 충렬왕(忠烈王) 혹은 충선왕(忠宣王) 때 급사중(給事中)을 지내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종4품의 중앙관직이다. (독립된 계파로 인정하여야 할 것인지의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16) 정승공파(政丞公派), 혹은 왕상좌파(王上佐派) 파조(派祖) : 15세(世) 휘 상좌(上佐) 판이부사(判吏部事) 상좌(上佐)공께서는 본래 중국 송(宋)나라의 권씨(權氏)이시다. 즉 송나라 때 국자감(國子監)을 지낸 권 여(權與)의 손자이신데, 원나라에 가있던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가 귀국하던 1349년, 고려 충정왕(忠定王) 원년에 이를 호행(護行)하여 고려에 들어오셨다가 그 후 고려에 귀화하셨다. 후에 충목왕(忠穆王)이 왕씨(王氏)로 성을 내리고 영가군공(永嘉郡公)의 작위를 내렸는데, 우리의 23대조이신 국재공(菊齋公 : 휘 溥)할아버지의 손녀 분을 배위(配位 : 배우자의 높임말)로 맞아 들이면서 우리 추밀공파 집안에 입적되셨다. 공(公)의 후손들을 한 계파로 따로 구분하여 정승공파(政丞公派), 또는 왕상좌파(王上佐派)로 부르기도 한다. (독립된 계파로 인정하여야 할 것인지의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 다.) |
출처: 청하 권대욱 - 소로문학골 원문보기 글쓴이: 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