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상인 샤일록의 후예를 보며)
우리는 1천년의 바다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베네치아를 보기위해 기차에 올랐다. 베네치아는 피렌체에서 고속으로 달려 3시간가량 걸리는 거리이니 실은 꽤 먼 거리이다. 피렌체에서
조금 시간이 있다면 피렌체 시가지 한가운데를 흐르는 아르노 강이 바다로 향하는 하류에 위치한 피사에 들러 피사의 사탑을 보거나 민중의 영혼을
구제하는 데 한 평생 몸을 바친 성인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곳인 아시시를 찾아보거나 기원전 에트루리아 시대에 찬란하였던 고도 페루자를 방문하여
프리오리궁전과 아름답기로는 이탈리아전역에서도 빠지지 않는다는 11월4일의 광장을 찾아 볼 것인데 그저 아쉽고 미련이 남는다. 아무래도 조그만
도시들은 훗날 시간을 만들어 유랑하는 오붓한 묘미를 따로 갖아야 할 것만 같다.
아마도 피사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향하면 리비에라
해안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 제노바에 당도할 것이고 더 해안을 끼고 돌면 모나코의 몬테카를로에 당도할 것이다. 그리고는 프랑스의 니스가 나오고
마르세유가 이어질 것이다. 말만 들어도 낭만적인 느낌이 닿는 이름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해안을 따라 그리로도 따라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어느 덧 기차는 포도밭이 연이은 농촌을 지나고 있다. 구릉지대로 포도재배가 활발한 토스카나 지역이라 부르는 곳이다. 메디치가 가문이 힘을
잃으며 1569년 이후 19세기에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까지는 토스카나 공국령(公國領)을 이루었었다. 피렌체·시에나·루카·피사 등이 특히
번영하여 그들 도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이 되었었다.
13세기 토스카나 지방에서 활동하였던 화가들을 통틀어
토스카나파라 하는데 프란체스코 성인의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인간미가 넘치는 화풍을 전개하였으며, 피렌체파와 시에나파를 창설하여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한다. 그 지역엔 미켈란이 늘 사다가 썼다는 세계적인 대리석 생산지 까라라란 곳이 있기도 하다. 로마에서 가이드들이 베드로성당에 깔린
대리석을 설명할 때 천 가지 이상의 색상을 자랑하는 '대리석을 깔아라' 에서 나오는 깔아라의 제품이라 하는데 어음상 맞는 말이다. 토스카나의
대부분은 키안티산맥을 비롯한 각지에서 유명 상표의 포도주를 생산한다. 근대공업은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최근 피렌체와 피사 사이의 아르노강
곡지(谷地)에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전통적인 공업으로는 프라토·피렌체 등지의 섬유공업, 카시노 등지의 유리세공이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차는 밀라노를 향하는 길목인 볼로냐를 지나고 페라라를
지나자 이내 바다 냄새가 나는 파도바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30분 정도만 더 가면 베네치아에 당도한다. 파도바는 중세 때 별도의 공화국으로서
대학까지 있었기에 당시 대학이 없었던 베네치아로선 무시 못하였던 도시이다. 나는 베네치아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이란 작품이다. 사실 베네치아가 물에 떠있는 도시란 것은 익히 알았지만 물에 떠있다는 것이 당초엔 뭍이었는데 지형이 가라앉아 세월이
흘러 침식에 의해 물에 잠겨버린 것으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 정도의 상식 수준이니 베니스의 상인을 왜 선택하여 글을 꾸밀 생각을 한 것인지는
더더욱 알 리 없었다.
그런데 그곳 공부를 조금 하다 보니 물론 유태인의
특질을 잘 나타낸 것이기는 하지만 샤일록에게 맡긴 ‘살 한 점의 담보’그 절묘한 작품 내용만큼이나 그야말로 절묘하게 그곳을 잘 골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고 보니 베네치아는 당시 해상의 대단한 상인집단이 모여서 산 도시 자체가 큰 주식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소재의 배경으로선
그곳보다 더 적합한 곳은 드물었을 것이다. 아낸 로마보다도 베네치아를 더 보고 싶어 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지닌 베네치아, 120개 이상의 섬과 400개 이상의 다리로 이루어진 도시이니 누구든 상상도 힘든 그 매력에 빨려들지 않겠는가.
이윽고 기차는 베네치아 메스뜨레라 하는 역에 도착했다.
우리 숙소는 섬 한 가운데 위치해 있으니 그곳에서 내려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까지 가서 그곳에서 배(수상버스)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역에서 내려 승무원에게 산타루치아 행 기차에 대해 물었더니만 1유로짜리 승차표를 끊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바로 다시 오는 기차에 오르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하라는 대로 따라서 바로 그리 했다. 기차가 긴 다리로 연결된 바다를 건너서고 있다. 그 시대엔 이 다리가 없이 스스로
고립무원으로 지냈으리라. 저녁놀이 한가로운 바다의 느낌에 감정을 실어주고 있다. 아낸 이를 그윽한 느낌으로 맛보려는지 차 안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았다.
나와 아들 둘이 그렇게 기차 칸과 칸 사이에 서서 다리
양쪽으로 갈라진 바다를 편안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다. 앞 칸으로 부터 역무원인 듯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연 표가 있기에 주저할
것이 없었다. 불쑥 표를 내밀자 그가 아주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며 말을 건네었다. 그런데 그 말은 아주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이야기해 줄 것을 청하였다. 도시 믿기지 않는 경악할 말이었다. 벌금이 100유로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표를 끊고 정상적으로 차에
오른 곳인데 벌금이라니, 그의 말은 간단하였다. 표를 끊으면 승차 점검구에서 승차하였음을 확인하는 행위를 하였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로마에서도 지하철을 타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당일 승차 하였음을
나타내는 표 점검 확인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표를 사자마자 기차가 들어와서 그럴 시간이 없었고 그런 것이 지하철 아닌 곳에서도
철저히 통용이 되는 것인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였었다. 그에게 아무리 이방인이라 그런 절차에 익숙하지 않아 그렇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는 벌금
발부서를 써내려갔다. 4유로 가차 표 때문 100유로의 벌금을 낸다는 것이 억울하였지만 완강한 그를 막아설 방법은 없었다. 한참 떠들다보니
아내가 차 안에 있으니 못 본 것으로 하여 눈 한 쪽 감아 75유로로 해주겠다고 한다.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라고 하였는데 아들이
그렇게라도 해 달라 하여 끝내 75유로를 내고 말았다. 기차에서 내려
고충 처리 실인가 들려 하소연을 하였지만 들어줄 기미도 안 보인다. 하다못해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이 한사람도 없다.
베네치아의 첫
느낌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영얼 못한다 싶은 이탈리아인들인데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친구라는 것이 묘한 걸림이 생기며 일부러 파 놓은 함정은
아닌가 싶은 느낌도 든다. 다른 승객들에겐 전혀 관심없이 지나쳐서는 거의 끝칸인 우릴 힘들게 찾아와서 대뜸 손을 내민 것이 두고두고 의문으로
남는다.그러리라 짐작이라도 한 것인 양 그는 행동을 했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경우가 생기면 그렇게 이방인에게 일방적인 룰을 적용해서 벌금을
부과 할 것이던가. 아니 여타 나라에서도 그런 실수는 있었지만 가혹한 벌금을 물은 적은 여직 없다.그렇지 않아도 바가지 물가가 보통이 아니다
싶은데 우중충한 느낌마저 선사한다 싶으니 그들에 대한 정감이 송두리째 가시고 만다. 흡사 베니스 상인 샤일록을 제대로 만난 것인 양 느껴진다.
과거 죽음을 각오하고 교역을 하여 애써 돈을 벌어 도시를 꾸몄다는 이름 있는 곳에서 그 삶의 원천은 흐리고 얄팍한 행정 묘수풀이나 하는 지금
그들의 눈빛이 안 되어 보인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