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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발원지) | 계곡 | 약수 및 기타 |
과천응봉·청계봉·망경대·옥녀봉으로 둘러 싸였다. | 북 서쪽 계곡 | 과천·조절 저수지·양재천 |
과천 응봉·국사봉으로 둘러 싸였다. | 남서쪽 계곡 | 청계사·청계동 계곡 |
국사봉과 이수봉 사이 계곡 | 두레이계곡 | 천림산 봉수지
정일당 강씨사당 |
545m(이수봉)과 망경대 사이 계곡 | 상적동계곡(약초샘골,어둔골) | 약초샘, 천수샘, 이슬샘, 청계산 굿당, 정토사, 여의천 |
매봉과 옥녀봉 사이 계곡 | 원터골·청계골 | 원터샘 1,2샘, 청계샘
관현사, 천개사 |
국사봉 남쪽 | 남쪽 계곡 | 운중저수지·정신문화연구원, 천주교성지(서루도비꼬볼리외) |
옥녀봉 북동쪽 계곡 | 개나리골·바람골 | 소나무산림욕장 |
망경대부근 | 능선일대 | 하늘샘(金井水)
마왕굴·한비샘(마왕샘) |
*이슬샘 : 이슬샘은 뱀들이 이용하는 샘이어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청계산 부근 주민들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이 이슬샘을 찾기를 갈망했다. 하루는 병든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하는 처녀의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슬샘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효녀의 정성이 지극하자 뱀이 사람으로 환생하여 자기들만이 먹는 이슬샘의 위치를 일러준 것이다.
하늘샘(金井水)
하늘샘높이(592m) 높은산 하늘가까이 있다하여 하늘샘으로 불리었다 금정수는 과천현 신읍지에"청계산정상에 금정수가 있는데 깎아지른 백척바위 절벽사이로 맑은물이 솟아나며 물빛은 황금색을 이룬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정여창선생이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후 사약을받고 함경도"종성"에서 부관참시를 당하자 이곳의 샘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한다 그후 억울함이 밝혀져 복권이 결정되자 다시 황금빛으로 되었다고한다 금정수옆에는 정여창선생의 움막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주변에는 집터와 다량의와 편이 산재해 있다.
하늘샘(金井水)
*마왕샘(단비샘) : 마왕굴암벽 사이에서 솟는샘물이다 고려말충신 조견선생이 청계산에 은거하면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갈증을풀고 쉬어가던곳 이라고한다
▶동굴
마왕굴(魔王窟)
석기봉 북서편 100m바위 절벽아래 커다란 두개의 굴이있는데 오른쪽 굴에는 맑은샘(마왕샘,단비샘)이 흘러내리고있다 고려가 망하기직전 맥 이라고 하는 이상하게생긴 큰짐승이 여러산짐승을 몰고 이굴로 들어갔다하여"오막난이굴"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굴에는 긴꼬리 검은 박쥐가 서식하고 있다. 단비샘(마왕샘)은 이 곳 암벽사이에서 솟는 샘이다.
마왕굴(마왕샘)
▶고개(령)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鄭汝昌)선생이 스승 김종직선생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부관참시 당하였다는 소식에 은거지인 금정수(하늘샘)로 가기위해 피(血)눈물을 흘리며(泣) 넘어다녔다는 고개. 정여창도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까지 당하지만 사후에 우의정으로 봉한다.
혈읍재
*길마재 : 서초구 원지동 청계산 제2야영장 정상에는 모양이 길마(짐을 싣기 위해 소의 등에 얹는 안장)처럼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야영장 오른쪽에 거인의 손자국과 머리자국이 찍혀있어 장사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으며 그 옆에는 바위가 넓적하다 하여 넓적바위라 부르는 큰바위가 있다. 그리고 야영장 북쪽산을 부영배라 하는데 그것은 이 산에 부엉이가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길마재 쉼터 길마재 오르는 나무계단
▶폭포
수종폭포
청계산 서쪽에 있는 수종폭포는 과천에서 바라볼 때 해가 뜨는 동향에 있다고 하여 동폭포라고 한다. 상대적으로 과천 서쪽 관악산 중턱에 있는 폭포를 서폭포라 했다. "과천현신수유지"에는 수종폭포는 "과천의 동남간 8리 청계산 광명동에 있으며 높이는 두길쯤 되고 수석이 맑고 깨끗해 목욕하며 피서할 만한 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폭포는 서울대공원 한덕개발 정문에서 우측 청계산으로 향하는 등산로 따라서 15분 쯤 올라가다보면 길 좌측에 있다.
수종폭포
폭포 높이는 약10m 폭은 약 8m정도이다. 폭포 아래에는 지름약 7~8m 깊이 1.5m정도의 못이 있다.
▶사찰
*청계사(경기도 지방 문화재 제6호) : 의왕시 청계동에 위치한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로 "봉은사말사지"에 의하면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1284년(고려충렬왕10년) 평양부원군 조인규가 사재로 청계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가문에 원찰로 삼았으며 후손들이 500년간 중창을 거듭한 것으로 보아 한 사찰과 특정가문간의 관계는 국내사찰의 특이한 사례이다.
극락 보전 중앙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는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 밖에는 삼성각, 봉향각, 요사, 지장전, 감로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이색·변계량 등 당대문인들이 즐겨찾으며 절을 주제로 시를 지었으며 조윤·정송산 등은 이 곳에서 출가하거나 칩거를 한 곳이다.
경내에는 신라석 등과 부도조각 일부가 남아있으며 동종과 목판 등 문화재도 있다.
청계사 대웅전
*청계사 동종(보물 11-7호)
조선숙종 1701년에 승려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후기 범종중 대표적인 종이며 높이는 115cm, 입지름 71cm, 무게 700근의 큰 종이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연꽃줄기를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보살상 4기가 조각되어 있다. 명문은 "강희40년(1701년)신미 4월에 주성하였고 광주 청계사에 보관하였는데 무게는 700근"이라 새겨져 있다.
*청계사 불교경판 "목판"(경기도 유형문화재 135호)
청계사에서 판각간행한 것으로 14종466판이며 현존하는 466판의 경판 중에서 "묘법연화경"이 총 213판으로 가장 많다.
*청계사부도
경허, 만공, 금오 월산스님 등 청계사와 인연을 가졌던 고승4분의 부도탑이 조성되어 있다.
경허스님 부도 동 종 불교 경판
2. 역사탐방·사(유)적지
*정일당·강씨사당(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있으며 1772년(영조48년)~1832년(순조32년) 조선후기 여류문인 본관은 진주, 호는 정일당, 제천출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0세에 출가한 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파평윤씨 윤광연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경서를 통달하고 시문에 뛰어나 당시에 문명이 높았다. 또 글씨에 능하여 홍의영 등의 필법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정일당 유고1채", "시문집 1책"등이 있으며 규장각 도서관에는 필사본이 남아있다. 특히 시어머니 "지일당 전씨"와 시로써 대화를 주고 받는 일화로도 유명하며 분묘는 남편과 합장되었으며 성남시에서 파평윤씨 문중의 협조를 받아 사당과 묘지를 재조성한 것으로 정일당의 지극한 효성과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정일당 강씨사당 정일당 강씨비
원지동 원터
원터마을은 삼남도로를 가다보면 청계산 제 1야영장과 청계산기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원터인데 한자는 원기(院基)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먹고 잘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교통요충지인 이곳에 잠원나루에서 말죽거리를 거쳐 판교 이남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역과 원을 설치하였다 원지동 400번지일대에 원이있었는데 1970년 취락지구 개선사업으로 석축이 없어지고 경부고속도로가 놓임에따라 주민들의 일부가이전하였고 옛농촌주택은 현대주택으로 바뀌었다
@참고:현재 원터보호수와 함께있는 원터푯말 위치는 잘못된것원원터푯말
원터푯말
*원지동 석불입상 및 석탑(서울시 유형문화제 제93호)
고려말 조선초에 제작한 것으로 미륵당 안에는 흰색석불입상이 모셔있고 마당에는 작은 석탑이 있어 옛날에는 이 곳이 사찰인 것으로 추정한다.
석불 입상 크기는 2.25m의 우람한 형상을 하고 있는 토속적인 석물로 가느다란 눈과 작은 입술, 뭉툭한 코의 형상은 다소 투박하면서 정감을 느끼게 한다.
불교가 쇠퇴하고 성리학이 유입되던 고려말 조선초의 시대적 흐름을 담고 있는 불상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미륵불로 알려져 있다. 미륵당 앞에 놓여 있는 3층 석탑은 자그마하며 마모가 많이 되엇다. 고려말 조선초의 전형적 양식이다.
*원지동(미륵불) 전설 : 미륵불은 원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이 석불에 정성을 드리면 미륵불 배꼽에서 휘파람같은 소리가 나와 기도하는 자에게 길흉 화복을 계시하여 영험하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미륵불의 영험만 믿고 일제가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경찰이 1926년경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 내었는데 그 후부터는 영험한 능력을 상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미륵당 석불입상
*원지동 고인돌 유적지
1986년 "한강유역 서울 원지동 지석묘 조사연구·이형구"자료에 의하면 1984년 원지동 경부고속도로변에서 선돌과 고인돌군 4개소가 발견되었으며 원터마을 미륵당 야산에도 선사시대 지석묘와 석기유물 및 일정 간격으로 열을 지어 있는 많은 괴석들이 발견되었고 북쪽 150m지점 밭 가운데서도 7기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지동 미륵당에서 남쪽으로 약 100m 고속도로 동쪽 20m지점에서 선돌 1기가 발견되었으며 인근에 지석묘로 보이는 돌무리가 계속확인 되있다고 한다.
한강유역의 고인돌은 북방식 지석묘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원지동 고인돌은 남방식 형태의 지석묘로 추정되어 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안내표석 위치 : 원지동 336-2
*천림산 봉수지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산 35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수형태는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며 전체의 둘레는 80m정도이고 동서 길이는 33.6m 남북의 길이는 12m이다. 2중 북쪽 방화벽의 길이는 30m이고 동쪽 방화벽은 16m이며 남쪽 방화벽은 29.3m이다. 봉수대 내부의 전체면적은 약 100평 정도이다.
조선 초기 봉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천림산 봉수는 현존하는 봉수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구조적으로 가장 완벽한 5개조 연조와 방화벽 및 담장지 등을 갖추고 있는 봉수로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 조선시대 5로거 봉수노선 중 2로거 내지 직봉으로 용인 석성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서울의 목면산(남산) 봉수에 신호를 전달하는 경기도 관내의 마지막 봉수로 천림산에서 용인 석성산 봉수와는 18.75km 서울 목면산 봉수와는 16km거리에 위치해 있다.
천림산 봉수의 명칭은 천천산·천천현·월천현·천림산 봉수 등으로 4차례 변경되었다.
그리고 천림산 봉수에 근무하였던 봉수군의 일원과 관련해서 "중정(重訂)·남한지" 봉수조에 봉군 25명, 봉군보 75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여타의 다른 봉수와 마찬가지로 봉군 5명이 조를 이루어 5교대로 월평균 6일씩 근무하였으며 봉군보 75명은 실제 근무를 하지 않는 대신 근무를 서는 봉군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으며 봉군 1인당 봉근보 3인이 배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봉수제도는 전신 전화 도입과 함께 고종 31년(1894년) 폐지 되었다.
3. 동·식물 분포
▶동물
북방산 개구리 : 우리나라 산개구리 중에서 가장 큰 종으로 암컷이 수컷에 비해서 조금 크며 몸길이는 4~7cm이다 몸의빛갈은 등면이 갈색또는 짙은갈색 배면에는 회색의 구름무늬가 있으며 산 계류나 물이 괴어 있는 곳에서 서식한다. 산간 계곡의 바위 밑에서 동면하며 2~3월이 되면 동면에서 깨어나 유속이 빠른 곳을 제외하고는 물이 있는 모든 곳에 산란하며 산란기는 4~5월이다. 수온에 따라 다르지만 산란한 알은 2~3주가 지나면 부화하게 된다. 북방산 개구리는 서울시 지정 보호 야생 동식물이다.
북방산개구리
▶식물
*청계산 원터골 낙엽 활엽수림
서울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2004년 8월에 지정되었으며 크기는 146,281제곱미터이다.
도시 근교에서는 보기 힘든 피나무 등 잘자란 낙엽 활엽수림으로 이러진 곳이다.
*서울시 지정보호수
수고 : 25m 수고: 21m
나무둘레 : 370cm 나무둘레: 224cm
4.기타
▶청계산 천주교 성지
*성지 : 서루도비꼬 볼리외
*위치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산73
*동굴규모(크기) : 1m(외부), 1.2m(내부), 5m(폭), 3.2m(외부직경), 4.8m(내부직경)
*개설 : 조선고종 때 대원군 집정시 프랑스신부 "성루도비꼬볼리외" 신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은거하였던 곳으로 성지 부근의 능선상에는 "성마태오성당"에서 세운 "성루도비꼬볼리외"의 성지입구 및 성인 "성인 루도비꼬볼리외"신부 유적지 등의 안내판이 있다.
*형태 : 현재 청계산 국사봉 남쪽 능선의 정상 바로 아래 대원군 집성시 프랑스신부 성루도비꼬볼리외 신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은거하였던 동굴터가 남아있다. 이 터는 성인 4~5명이 은거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의 동굴로서 출입구가 북향하여 있다. 동굴바깥의 높이 1m 직경 3.2m로서 낮고 좁은 편이나 내부는 높이 1.2m, 직경 4.8m, 폭 5m정도로서 약간 넓은 편이다.
천주교 성지
동굴 내 중앙에는 천주교 사자들이 언제라도 임시예배가 가능하도록 상자 안에는 묵주, 찬송가책, 촛대 등이 담겨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1992년 5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신내동 성심회에서 마련하였음을 성물에 붙여 놓았다. 동굴입구에는 성인 성루도비꼬볼리외신부님의 약력을 적은 안내판과 표석 2기가 세워져 있다.
▶청계산 청계굿당(천황당)
토속적인 민간신앙(미신)으로 무당이 신을 모시고 굿을 하는 당집.무당은 신비한 능력을 신으로부터 받은 반성인적(半聖人的)인 존재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인간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고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무당이 하는 굿은 병원의 심리치료행위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우리조상은 4000년전부터 굿을 하여 심리치료 행위를 해왔다.
청계산 굿당
▶정토사
*연잎칼국수(사찰음식)
*정토사, 사찰연잎칼국수(주말 신도들을 위해 준비하는 국수이기 때문에 평일엔 맛 볼 수 없다.)
*위치 :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338번지(옛골종점, 정토사)
*참고 : "선오스님의 근심을 더는 108백련요리" 선오스님은 당진정토사 주지
*연잎칼국수 상식
칼국수는 스님들이 즐겨 먹는 별식 중의 별식이다. 큰 스님이 오시거나 귀한 손님의 접변 또는 반가운 도반이 왔을 때 접변 음식이다. 오염되지 않은 청산에서 채취한 능이버섯, 송이버섯, 표고버섯, 싸리버섯, 느타리버섯 한가지를 넣어 장국을 만들고 우려진 버섯을 건져서 채썰어 볶고 텃밭의 싱싱한 애호박, 풋고추를 따다가 채썰어 들기름에 살짝 볶아 고명을 얹는다. 양념장에 김치 한 가지 뿐이지만 정성과 사랑으로 만든 칼국수는 인연을 더욱 소중하게 하는 최상의 공양이다.
정토사 극락전 홍련,백련지
※참고문헌 : 한국의 발견(뿌리깊은나무), 과천현신수읍지, 봉은사말사지, 청계산사적비, 네이버백과, 월간山(조선일보사) 서울시서초구청, 과천시청, 의왕시청, 성남시청 홈페이지, 정우영山기고문, 현지안내문
2006. 12. 26.
청계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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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달동안 서초구 향토자원 조사를 한 작품중에서 사람들이 자주찾는 "청계산"을 올려보았습니다..
쌘님들을 비롯해 청계산을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알 보고 읽고 즐겼습니다
꽃님,자알 보고 읽고 즐겼다니 고마우신데.......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 하셨능교???
물어보고 싶어도 차마.....믿을수밖에.......ㅋㅋㅋ
청계산과 인근에 이런 명소들이 많이 있다는걸 몰랐습니다. 늘 내려와서 어디어디서 묵사발이나 먹고 땀빼는 산 정도로만 알았지요. 감사 합니다.
백선생님,다음에 청계산 등산할 기회가 있으면 묵사발만 드시지 마시고 소문난 곤드레밥 한번 잡숴보시기를..그밖에 청계골 간판없는집(찾기힘듬)에서는 살아있는 오리,닭,토끼,직접 고르면 잡아주는 싸고 맛있는 집이 있습니다..기회있으면 원하는 집으로 함께 가실까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멋진 작업입니다.
멋진 작업 이라는 칭찬!! 모든 피로가 사라집니다..감사합니다
이 방대한 자료를 아낌없이 공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읽어보겠습니다.
밝은님,언젠가 불시에 두고두고 읽었나 물어 볼꺼에요!!!.......ㅋㅋㅋ
카페에서 밝은님 글을보면 덩달아 즐겁고 행복합니다..결석 하지 마세요!!!
청계산... 나무계단 지겹고. 들어가는 길 장난 아니구. 어쩌구 저쩌구 그랬는데 청계산에 미안합니다.
머리속을 깨끗이 지우고 언제 청계산 산행시에는 다시 미안합니다 합장하고 오르겠습니다.
경선생님의 일목요연한 설명 고맙습니다.
정말 오랫만 입니다..청계산 자주 가시죠?? 글을 보니 알고도 남겠습니다..기회를 주시면 바람풍님 좋아하시는 청계골 멋진(?)집으로 안내하겠습니다..청계산에서 음식(술)께나 자셨다해도 이집(살아있는 닭.오리.토끼등 직접잡아 요리)은 모를겁니다..그리고 일목요연 하다는 전문가의 평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ㅋㅋㅋ..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