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화의 집으로 왔을 때, 영술은 웃목에서 그저도 피를 흘리며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 선이의 죽음, 동리 문학의 원천
김동리는 스스로 자신의 문학의 뿌리 혹은 동기는 '죽음'이라고 생전에 밝혔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문학 세계에는 인간의 죽음과 삶의 문제를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깊이까지 천착해간 작품이 중요한 맥을 이룬다. 그가 이렇게 죽음에 골몰하게 된 연유엔 어린 시절의 친구, 선이의 죽음이 가로놓여 있다.
김동리는 유년기에 죽음을 많이 체험했다. 그가 어렸을 때 한 번은 지홍이(형 범부의 큰아들)와 함께 예기소에 목욕을 갔다가, 모래사장 위에 송장을 하나 건져놓은 것을 보았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인공호흡하다가 갑자기 죽은 사람이 붓는 바람에 무서워 그냥 달려온 적이
있었다. 평소 해마다 사람이 빠져 죽는다는 예기소 근처에 살면서 보고 들은 수많은 죽음들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깊이 사색하게 되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성찰은 유일한 소꿉친구였던 선이의 죽음을 통해
결정적으로 그의 삶과 문학 전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산문〈가랑잎 위에서〉를 보면 선이의 죽음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는지 알 수 있다.
'내 짝 선이가 거적에 싸여 저희 삼촌 지게에 얹힌 채 냇물을 건너가던
뒷모양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섰다가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얼마 동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선이를 잊을 수 없었고, 더욱이 선이의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 아아(아이)'들은 아무 데나 묻어버린다는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 데나 버린다는 것은 선이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선이를 미워했기 때문일 터인데, 그의 생각에 그 착한 선이를 누군가가 미워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이가 죽은 뒤 삼 년이 지나도록 그는 선이를 잊지 못했다. 언젠가 동네 안의 어떤 애가 죽은 날 밤, 그는 엄마와 누나에게 그 애도 아무 산자락에나 내버리느냐고 물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 뒤 선이를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창봉이(김동리의 어릴 때 이름)가 여전히 선이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리는 여전히 부모에 앞서 죽은 아이는 원수이며 아무 데나 버리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선이같이 순하고 예쁜 아이가 어머니의 원수일 리가 없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소년 시절, 언제나 어둡고 쓸쓸하고 외롭기만 한 나날이 계속된 까닭은 아버지의
음주도, 그 때문에 생긴 부모님의 불화도 아니었다. 바로 선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선이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죽음을 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밤이면 별을 쳐다보며, 낮이면 먼 산이나 수풀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비오는 날이면 비를 보며, 눈오는 밤엔 눈을 보며, 죽어나가던 선이와 죽음이란 것을 생각했다. 가을이 되면 산골짜기를 메우는 가랑잎 속에 누워…
◇ 죽음에 뿌리를 둔 문학, 그 구경으로서의 인간의 문학
한국 현대 문학의 거두 김동리는 1913년 음력 11월 24일 경상북도 성건리에서 김임수와 허임순 사이에서 5남매의 막내로 출생했다. 17살
때 서울 경신중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귀향해 철학서적과 세계문학,
동양 고전에 심취했다. 이때부터 그는《매일신보》와《중외일보》에
시〈고독〉, 〈방랑의 우수〉 및 수필을 발표했다. 1933년 무렵에는
서울 필운동의 백씨(伯氏) 범부(凡父) 선생 숙소에서 서정주를 소개받아 사귀기 시작한다. 1934년《조선일보》신춘 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되고 1935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경남 사천의 다솔사와 합천의 해인사를 전전한다.
〈화랑의 후예〉는 사직동 시절의 형님의 모습을 모티프로 하며 '조선의 심벌'='황진사'= '화랑의 후예' 를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밝혀나가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주인공 황진사는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세대의 변전을 수용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1인칭 서술자인 나는 이러한 황진사를 풍자와 연민이 뒤섞인 이중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다. 이 시선은 퇴색해가는 조선의 심벌을 심미적으로 관조하는 작가 자신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화〉가 당선, 상경하여 종로 연건동에 하숙을 정하고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그때 발표된 작품이〈바위〉, 〈무녀도〉등이다. 이들 작품의 모티프는 다솔사 지역이며, 김동리의 대부분의 소설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토속신앙의 발상지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무속신앙의 본고장으로 그의 성장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준 곳이라 짐작할 수 있다.
〈무녀도〉는 세 번에 걸친 개작 과정에서 보여지듯 김동리의 문학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개작을 통하여 첫 작품에서 미미했던 '욱이'를 기독교인으로 설정하여 모자간의 갈등관계를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인 샤머니즘과 대결시킴으로써 종교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켰다.
1937년 서정주, 김달진 등과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 활동을 하지만,
서울 생활에 실의하여 다솔사 소속의 광명학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1942년 소설〈소녀〉, 〈하현〉등이 일제 총독부의 검열로 전문이 삭제되고 광명학원이 폐쇄되는데 이어, 백씨 범부 선생이 구속되자 그는 절망하고 분노해 절필을 선언한다.
해방 이후 1940년대 후반은 좌·우익의 분열 대립한 시기로 이때부터
두 파 문인들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김동리는 '계급주의 민족문학론'에 대항해 '인간주의 민족문학론'을 제창하며 '본격문학'이란 말을처음 사용했다. 〈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 《백민》(1948. 3)에는 당시 동리의 문학관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글에서 문학하는 것은 '구경적 생의 형식'이라 했는데, '구경적 삶'이란 작가가 지닌 무한한 자아추구이자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을 찾고 구하는 것이며, 문학을 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과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순수논쟁은 그의 독특한 휴머니즘, 즉 신인간주의를 표방하기도 한다.
1955년《사반의 십자가》를 《현대문학》에 연재한다. 《사반의 십자가》는 '사반'이라는 가공적 인물을 통해 기독교적 서양 제국 문화의 한계와 문제점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을 위한 신의 존재를 모색해보는 작품이다. 인간 중심주의, 현실주의자 사반과 신 중심주의며 내세주의자 예수와의 가치관의 대립은 화합할 수 없는 서양의 정신에서
동양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1978년 장편소설 《을화(乙火)》가 발표된다. 김동리는 "〈을화〉를
통해 먼저 〈무녀도〉에서 줄거리의 일부에다 분위기만 붙여두었던
이 샤머니즘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일과 아울러 샤머니즘에서 이승과 저승에 관련되는 새로운 문제점을 한국 문학과 나아가서는 세계문화에 제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고 스스로 해설하기도
했다.
김동리는 절벽에 부딪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새로운 성격의 신과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샤머니즘적 인간형이라 한다. 이런 샤머니즘 인간형은 신성을 지닌 인간으로, '을화'라는 무당을 통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해주는 것이며 이를 통해 한국인의 신인간사상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을화는 옛날 무슨 신당(神堂)으로 세워졌던 뱃집에서 말을 잘 못하는
딸 월희와 둘이 살고 있다. 을화는 근동에 무당으로 널리 이름이 나 있으며 동네 푸닥거리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월희는 세수할 때만
방에서 나오고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거나 손거울을 보며 지낸다. 을화에게 월희는 아름답고 소중할 뿐 아니라 신비하고 거룩하게까지 보인다. 을화는 지난 꿈에 몽달귀를 봤다고 하면서 월희에게 몽달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주의를 준다.
그녀는 굿이 없는 날은 단골 술집에서 남자들과 어울리곤 했다. 을화는 그날 몽달귀가 안 들어왔냐고 묻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말에
안심한다. 그런데 그날 어릴 때 기림사에 맡겼던 아들 영술이 찾아온다. 그는 이틀 동안 옛집을 다 찾아다니며 지금의 을화의 집을 찾아냈다. 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아들은 감격한다. 그러나 저녁에 기도를
드리는 영술의 모습에 을화는 충격을 받는다. 영술은 잔잔한 목소리로 자신은 불도가 아니라 예수교도라고 말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