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신 중에도 저의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 상에 조의를 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2018년 4월 17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꽃비가 날리는 좋은 철에 평소 좋아하시던 꽃들과 함께 영면하실 수 있었습니다.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예의지만 황망한 중에 우선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바쁘신 중에도 저의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 상에 조의를 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2018년 4월 17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꽃비가 날리는 좋은 철에 평소 좋아하시던 꽃들과 함께 영면하실 수 있었습니다.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예의지만 황망한 중에 우선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7년생이신 작고하신 부친과 32년생이신 모친은 세월만큼이나 이런저런 훈장을 달고 사셨고 사십니다. 모친은 다행히 정신이 맑으시지만, 심장박동이 약하여 심장박동기를 단체 신경통으로 보행이 불편하셔서 지팡이 대신 소형차를 손수 운전하셔서 이런저런 동네일을 보시며 거동이 불편하신 부친을 작고하실 때까지 24시간 보살피셨습니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며 자신의 집도 2체씩 있는 여동생이 기특하게도 부모님과 함께 살아주어 부친의 마지막 길을 편하게 해 주었고 홀로 남으신 모친을 위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니 여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뒤로하시고 동작동 현충원에 영면하신 제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의 모습을 자손들을 위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아 업 겁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서 후손들에게 복을 베풀고 바르게 인도하는 한산이문(韓山李門)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길 간절히 구합니다. (不孝子 李相遠 拜上).]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은 한산이씨 호장공의 28세로 목은 이색 선생님의 21대손이며 인재공 이종학(목은 3남 중 차남) 선생님의 20대손입니다. 또 인재공의 6남 1녀 중 장남인 광목공 이숙야 선생님의 19대손이고 직재공 이유청 선생님의 16대손이고 상주영장를 지낸 이사목 선생님의 8대 종손입니다.
그리고 구한말과 일제 초, 탁지부 이명직 주사님과 이철규 선생님(금광국 기수로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 1919년 일제에 주살 당함)의 증손이며 손자입니다.
방원(芳園) 선생님은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출생합니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제게는 할아버지) 선생님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 고등 소학교로 유학을 나왔습니다.
해방이 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님은 경성원예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에 취임합니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식물원이 전라북도 전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근무를 합니다. 그해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전주 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진 참전하여 1950년 6·25전쟁 당시 화천전투에서 6사단의 일원으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속 연대가 전멸하는 와중에 수류탄이 옆에서 폭발하여 전신에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폐가 손상되는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화천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되었습니다.
하늘이 8대 종손 외동아들의 목숨을 지켜 주셨는지 방원(芳園) 선생님은 폐를 관통하는 엄청난 수류탄 부상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합니다. 마침 덴마크 상선이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참전한 바로 그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 호에서 군종병 지학순 (후일 주교로 선종)과 함께 재생의 환우 시간을 보냅니다.
폐에서 파편을 빼내고 기적적으로 상처가 아물어 1953년 4월 퇴원하여 6·25 전쟁 부상으로 인한 상이용사로 명예제대를 함과 동시에 한시의 여유도 가지지 않고 바로 삭막한 전후 사회를 밝게 바꾸겠다고 일거리를 사방팔방으로 찾습니다.
1953년 4월 전주 중앙국민학교 온실 원예촉탁으로 근무하면서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장으로 갈 때까지인 1954년 5월까지 학생들의 국화전시회를 개최하여 원하던바 전쟁으로 삭막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국화 향기와 국화꽃 같은 넉넉함이 묻어나게 하였습니다.
부산에 본원이 있던 국립원예기술원은 우장춘 박사님이 원장으로 있었고 자신을 도와 육종기술을 보급할 인재를 찾던 중 나의 부친 방원(芳園) 선생님이 발탁되어 청량리에 있던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7년 4월 꽃을 유난히 좋아하던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을 방문하여 그 자리에서 경무대 온실장으로 발령을 내는 바람에 한국말을 못 하던 우장춘 박사님의 통역을 도맡아 하며 한국 원예육종발전을 도우며 우장춘 박사님에게 향하는 이런저런 견제의 바람막이 일을 못 하게 되어 그 여파로 1959년 8월 10일 우장춘 박사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닌지 늘 미안해했습니다.
다행히 경무대 원예 조경 담당관 자리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님을 만나게 되어 1957년 11월에 마치게 되어 4·19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하게 됩니다. 방원(芳園) 선생님은 1957년 11월 백상 장기영 사장님과 의기투합하여 한국 최초의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한남동에 시설하여 1967년까지 서울의 명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1961년에 태어났습니다.
방원(芳園) 선생님은 수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활동 중의 하나는 1962년 3월 7일 국제친선 꽃씨협회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이 행사는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1967년 방원(芳園) 선생님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가난한 농촌이 잘살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믿음으로 쌀 채소 농사에만 의존하던 한국 농촌에 부가가치가 높은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겠다는 일념으로 근교농업의 붐을 일으키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3천 평에 방원식물원(http://blog.daum.net/enature/15853024)을 시설하여 부천군 원예협동조합 창립을 주도하고 분재전시회를 열고 의욕적으로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부천군이 부천시로 서울의 메트로폴리탄에 흡수되어 농장을 정리할 때까지 한국의 화훼원예 기술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나의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은 목은 이색 선생님의 후손으로 구한말 애국지사 이명직 선생님의 증손이고 일제의 금광수탈을 최일선에서 막아내던 대한제국 금광국 이철규 기수님의 손자이며 11세 어린 나이에 조부와 부친을 여의고 혈혈단신 만주국의 관리로 살아가며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던 이성구 미곡검사관의 아드님입니다.
방원(芳園) 선생님은 해방 후 초대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본분을 다했고, 자신의 몸을 던져 공산군에 맞서 싸운 6.25 참전 상이용사인 전쟁영웅이었고, 국화전시회를 통해 전후 삭막한 한국인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었고, 우장춘 박사님을 도와 한국의 육종분야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한국 최초의 꽃씨 날리기를 주도하여 국토를 아름다운 꽃 강산으로 만들었으며, 한국의 근교농업발전을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선각자였습니다.
더하여, 6.25부상치료후 의병제대를 하였지만 2005년까지 상의군인등록도 안하고 사셨습니다. 이유는 6.25후 상이군인들이 이곳저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상이군인혜택 받자고 전쟁을 치루고 부상을 당한게 아니라 공산군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기위해 참전한거라며 상이군인등록도 안하고 살아 오셨습니다. 상이군인 혜택을 받았다면 우리 형제자매는 월사금이나 학비걱정으로 마음조리며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고지식한 방원 선생님이셨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은 한국시간 2018년 4월 13일 20시 11분 6.25동란중 수류탄폭발로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과 외상성폐손상이 악화되어 흡인성폐렴으로 인하대학병원11층 2호실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빈소는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2호실에서 젊은시절 초대식물원장으로 근무하셨던 창경궁 식물원이 바라보이는 곳에 모셔서 5일장으로 조문객을 맞았습니다. 발인은 4월 17일 9시 30분에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을 떠나 성남화장장에서 화장한후 명혼을 동일 16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봉안의식을 국군의장병의 의장행사를 통해 충혼당 314호실에 모셨습니다.
장지에서 돌아온 당일 저녁 혼란스런 영가께서 밝은 빛이 나는곳으로 잘 가시도록 인도해드리는 초우재와 역시 손없는 날을 골라 4월 19일 저녁에 재우제를 인천 송도 신도시 평소 머무셨던 자택에서 지냈고, 4월 22일 일요일 장지인 현충원 제1제레동 2호실에서 삼우제(三虞祭)를 올려 탈상을 마쳤습니다.
요단강 건너가 뵈올때까지 아버님,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첫댓글 선생께서는 천상에 드실것입니다
그곳에선 전쟁의 아픔도 상처의 고통도 없을것입니다
애통함도 이젠 그리움으로 바뀌어 갈줄압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