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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설교본문 : 마가복음 10:17~31, 46~52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4년 8월 3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행을 떠나시는 부분을 큐티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가까운 도시인 여리고에 도착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세 번째 수난예고를 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사로잡힐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을 이방인에게 넘길 것이며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능욕하며 침 뱉고 채찍질 한 후에 죽일 것이나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하신 세 번째 수난예고를 증거하면서 그 앞뒤에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믿음을 인정받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신앙에 있어서 나무랄 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 나라 백성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예고를 하실 때 있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다 예수께 칭찬을 받을 만큼 신앙이 훌륭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께로부터 신앙이 훌륭하다고 칭찬받을만한 사람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이유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바른 것일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부분을 바르게 배우고 이해하고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1. 부자 청년의 근심
1) 부유한 청년 관원 :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예수께서 길을 떠나려 하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부자 청년이라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관원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이 사람은 아주 부유한 청년 관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원은 산헤드린을 의미합니다. 분봉왕 헤롯을 제외하고는 유대사회에서 최고위층입니다. 어떤 일로 그리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젊은 청년임에도 부자이면서 최고위층인 산헤드린 회원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재벌의 아들로, 최연소 국회의원이나 국무위원까지 되었으며,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무위원과 대법관을 겸직할 수 없지만, 당시 산헤드린은 그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2) 그가 예수께 무릎 꿇고 영생에 대하여 질문함
그렇게 그 시대의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그 부유한 청년 관원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청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젊은 나이에 최고위층에 오른 이 청년이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와 영생의 문제에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청년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이 땅에서 부유하고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껏해야 100년도 못사는 인생이고, 그 후에 영생이 있으니 당연히 이 세상보다 영원한 삶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그러나 목숨을 걸만큼 간절할 열망이 아니었다 : 근심하고 떠나감
주께서 그에게 십계명의 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말씀하시자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가 그 계명들을 다 지킨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 그를 사랑의 눈길로 보셨다고 했습니다(21절).
이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그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 후에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크게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예수께서 그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하신 것은 그를 괴롭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을 채워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순종함으로 온전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끝내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 청년은 비록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만큼 간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면 자기 재산을 사용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진 것인 아니었던 것입니다.
4) 이 청년의 문제 : 재물과 지나친 자신감
이 청년이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근심하며 돌아간 데에는 다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 포기하기에는 재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만일 주께서 나에게 명령을 내리신다면 그 즉시 이 땅의 것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 믿음과 결단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지금 이 청년에게 주께서 그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재물을 가진 것입니다.
② 선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이 청년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어려서부터 자기는 선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너무나도 강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판단한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잘 한 것은 십계명 중 금지의 계명을 잘 지켰을 뿐입니다. 주께서 십계명 중 더 중요한 계명인 1~4계명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그 다음의 금지의 계명만 잘 지켜왔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예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은 것은, 금지의 계명은 어떤 것이든 지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은 해서는 안 되는 금지의 계명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하라고 명하시자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 목숨을 걸만큼 간절히 원하고 사모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
마가복음은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열정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해왔습니다. 본문의 부자 청년 관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기는 했지만, 자기 재산을 모두 포기할 정도로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목숨을 걸만큼 간절히 원하고 사모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고, 어려움이 됩니다. 본문의 부유한 청년 관원처럼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들보다 가진 것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2.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
1) 예수께 부르짖는 소경 바디매오
이제 두 번째 사람인 소경 바디매오를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렀다가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를 막 떠나려하실 때에,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께서 그 곁을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무리들이 바디매오에게 잠잠하고 조용히 있으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주변 사람들의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48절)는 말은 미완료시제입니다. 미완료시제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혹시 예수님이 자기의 소리를 못 들으실까 싶은 마음에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꾸짖든 말든 더욱 큰 소리로 계속해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은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가 처음 부르짖을 때 이미 들으셨습니다만, 그가 계속 부르짖도록 한동안 가만히 내버려두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꾸짖는 것도 아시면서 가만히 내버려 두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꾸짖는데도 그가 계속 부르짖는지를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처음 기도할 때 이미 들으시고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아시지만 곧바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바디매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께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 부르짖고 또 부르짖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겉옷을 벗고 즉시 예수께 뛰어 달려 나아가는 바디매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시자, 제자들이 가서 말했습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예수께서 너를 부르신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즉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뛰어 일어나 주께서 나아갔습니다. 겉옷은 밤에는 이불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처럼 가난한 자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소경이 아니었다면 결코 겉옷을 벗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 바디매오에게는 겉옷이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데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입니다.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겉옷 챙기랴, 앞을 더듬으면서 예수님께 나아가랴 복잡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리라는 간절한 열망으로 과감히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께로 나아갑니다.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이 말을 들으시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의 무엇을 믿음으로 보셨을까요?
1)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그리스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야(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삼하 7:12, 사 9:7, 렘 23:5, 겔 34:23~24)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하고 고백을 했지만 예수께서 고난 받으실 때 계집종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을 보면 베드로 역시 주님을 확실히 알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메시야요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하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아기였을 때에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에 아기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 본 두 노인 시므온과 안나(눅 2:33~38)와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고백은 주께서 원하시던 고백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정확하게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2) 주변의 꾸짖음에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하고 고백했더라도, 그 고백이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입술로만의 고백이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주변 사람들이 잠잠하고 조용히 있으라고 계속 꾸짖어도 계속해서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그의 이 열망과 열정은 그의 믿음이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3) 주님은 그의 믿음과 그 믿음에 합당한 열망을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마가복음 큐티를 해 오면서 지붕을 뚫고 들어온 중풍병자의 그 간절함,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함을 통해 주께서 바라시는 믿음에는 그 믿음에 합당한 열망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바른 것이라면 그가 믿는 것을 향한 열망과 열정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세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좋은 학교라는 믿음이 있으니 학생들이 그 학교에 들어가려는 열망과 열정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열정을 방해하는 것이 나에게는 없는지 살펴봅시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그렇다고 세상 꿈을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열정이 식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4. 부자청년과 바디매오와의 대조
1) 부자 청년(막 10:22)과의 대조
우리는 소경 바디매오와 부자 청년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이심을 믿은 것은 두 사람 모두 같습니다. 부자 청년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았기에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대하여 물은 것이고, 소경 바디매오는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즉시 그가 가진 소유의 전부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뛰다시피 하며 예수께 나아갔으나, 부자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고민하다 떠나갔습니다. 부자 청년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생도 믿고 하나님 나라도 믿었지만 끝내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입니다.
3) 많이 가진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장애물이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많이 가졌다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위하여는 많이 가졌다는 것이 장애물이 됩니다. 포기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예쁘다든지, 몸매가 좋다든지, 머리가 좋다든지 해서 남들보다 훨씬 빨리 성공하는 자들을 보고 많이들 부러워하지만, 이들은 자기의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은 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야곱에게 복을 주려 계획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에서가 하나님의 복을 스스로 걷어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에서가 가진 능력이 너무 많아 하나님의 복을 별로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자 청년도 자기가 가진 것이 많아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믿기는 했지만 그것을 소경 바디매오처럼 절박하게 원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많이 갖기를 원합니까? 더 성장하고 더 성공하기를 원합니까? 당신의 이런 소망이 이루어질수록 하나님의 나라와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5.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이유
1)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 : 불가능하다는 것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가장 큰 것을 비유할 때 낙타와 코끼리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낙타나 코끼리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속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아람어로 낙타는 카멜로스이고, 밧줄은 카밀로스로 점 하나 차이가 있을 뿐이라 해서, 이 말씀은 밧줄이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바늘구멍을 좀 크게 만든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바늘구멍이란 광화문에 양 옆에 조그만 문이 있는 것처럼 좁은 문을 뜻한다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뜻을 완전히 왜곡하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이 속담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2)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소유로 여기고 있으므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 첫 번째는, 그들이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소유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큐티를 할 때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가 ‘카리스마의 사유화’때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왕의 직분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질도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이 역시 카리스마의 사유화인 것입니다. 물질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로 여기지 않고 자기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3) 하나님 나라보다 이 땅의 것에 더 열망을 품고 있으므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두 번째 이유는, 그가 하나님 나라보다 이 땅의 것에 더 열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진 자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는 돈을 모으는데 더 열심히 했습니다.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아니니 상관없습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열망을 품고 있다면, 그 열망이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보다 더 큰 열망이라면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깜작 놀라 그러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서로 말합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 중에서 부자가 되기를 싫어하는 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으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주께서 주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부족할지라도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이 땅의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열정을
가진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 것을 많이 가질수록
하나님 나라에 더 멀어지기
쉽다는 것을 기억하고
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영적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