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1736-1801년)
권일신의 형. 조선 개국공신이며 주자학자인 권근의 15대손으로 집안 대대로 거유가 많이 배출되었다. 학문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제자들이 많았다. 이벽 성조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대상자를 찾다가 가장 먼저 선택한 집안이 권철신의 가문이었으며, 그는 5형제 중 장남이었다.
그의 형제가 모두 학문이 높고 덕망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중 권철신은 경학과 예학 등 학문이 뛰어나 경서와 철학을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내게 되었으며, 당시 북경으로 부터 한역 서학서가 많이 들어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다.
1777년(1779년?) 겨울 고향인 양근 감호(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에서 멀지 않은 주어사(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에서 강학(走魚寺講學)회를 개최하였는데, 김원성, 이총억, 정약전, 정약용, 이벽, 이윤하 등과 함께 주자학과 기타 윤리서 및 선교사들로부터 입수한 철학 수학 종교 서적을 놓고 천주의 존재, 인생의 기본 문제 등에 관해 연구회를 가졌다. 연구결과 그들은 천주교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천주교 계명을 아는 대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벽과 달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고, 강학회가 끝난 후 이벽의 주선으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은 천주교 전파를 위해 학덕이 높은 학자를 입교시킬 의도로, 1784년 음력 9월 양근의 권철신 형제에게 입교를 권하게 되었으며, 이때 셋째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아들 권철신도 주저하다가 결국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는데, 그는 매사에 조심성 있고 신중한 사람이라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입교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입교한 후에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대하여는 효도의 본분을 다하고 사회와의 관계에는 너그러움과 헌신적인 행동으로 주위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한 크나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권철신 암보로시오는 직접 전도하거나 천주교 일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집에서 학문과 종교 생활에만 전념하였으나, 그 이름의 권위로 말미암아 외교인들이 복음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저 양반이 천주교를 참된 교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 교를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서로 말하였다.
이와 같이 직접 천주교 일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1799년 여름 대사간(大司諫) 신헌조가 상소를 통해 권철신을 천주교 두목으로 몰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화를 면하였다.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교우들이 형벌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가련한 인간들, 참 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만들고, 그들의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는 것이다"라고 탄식하곤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 저명한 학자들이 체포되고, 같은 해 2월 11일 정약종과 같이 잡혀 국문을 받았는데, 그는 천주교 신앙을 용감하게 변호하였다.
형벌 중에도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자기 직분으로 인해 그의 심문에 참관하였던 그의 철저한 정적 중의 한 사람도 심문 장소를 나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에 다른 죄인들은 몹시 당황하는데, 권철신은 마치 잔칫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4월 7일(음력 2월 25일, 22일?)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66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국문에서 천주교 신앙을 배반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으며, 달레의 교회사와 황사영의 백서에는 순교자로 쓰여있어 이 부분에 대한 검증이 요구된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51-1792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삼대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삼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양근 땅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의 명문가인 권씨 가문 5형제 중 셋째였다.
권일신은 가학을 이어가며 형과 함께 성호 이익에게 사사하였고 뒷날 실학자 안정복의 문인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 광암 이벽은 당대 거유인 이가환과 사흘 밤낮을 토론하여 천주교의 옳음을 밝혔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을 뜻이 없음을 알았고, 복음을 더욱 올바르게 전하려고 학식과 덕망으로 존경받는 양근 땅 감호의 권씨 형제를 찾았다. 지우인 이벽의 열의에 찬 강설을 듣고 크게 감동한 권씨 형제 가운데 권일신이 먼저 입교하여 이벽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활약을 보여주었다.
1784년 9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을 때 권일신은 이미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수호자로 모시기로 하고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였다. 그의 명성과 학식, 덕행은 주변의 친지들에게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내포 출신으로 형의 제자였던 이존창에게 천주교를 알려주고 중요한 믿을 교리와 신자로서의 본분과 실천방법을 자세히 일러주었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하게 하였다. 이존창은 크게 감복하여 루도비코 곤자가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고, 충청도 내포로 내려가 전교활동에 투신해 내포지방의 사도가 되었다.
또 전라도 전주 초남에 덕망이 높고 재산이 많아 세력이 컸던 유항검 또한 권씨 형제를 따랐는데, 권일신은 그도 전교하여 그를 한국 초대교회의 전라도 사도로 남게 하였다. 이렇게 권일신의 덕망과 인품으로 한국교회는 서울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퍼져나가게 되었고,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이들이 속속 입교하였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가진 정기적인 종교집회가 한국 천주교 복음 선포의 기점이 되는데, 권일신은 정약용 형제, 이벽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집회는 우연한 기회에 형조의 나졸들에게 발각되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면서 중지되었고, 김범우만이 형조에 투옥되었다. 이때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 김하진에게 가서 성상을 돌려주고 김범우를 석방하든지, 아니면 함께 처벌해 달라고 용감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벽은 집 안에 감금되고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으며 지도층 교우들은 흩어졌다. 그는 교회 재건을 다짐하며 조동섬과 함께 양근에 있던 용문사에 들어갔다.
1787년 박해가 진정되자 권일신은 교회를 떠났다가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과 함께 조용히 교회재건운동을 벌였다. 이때 한국교회의 터전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신부처럼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성사,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아직 성품성사와 성직제도, 전례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때, 오직 교회재건의 열의에 불탔던 이들은 이른바 '가성직 제도'를 수립하여 평신도로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 집행은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권일신과 동료 10여 명은 대단한 열성으로 엄격하게 재를 지키며 성사와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교회서적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교리에 위배되고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곧 북경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 문의하였다. 당시 밀사로 윤유일이 선정되어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 북경을 다녀왔는데, 권일신은 그 첫번째 파견 때 북경으로 서한을 보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서 천주교 교리와 윤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함부로 성사를 집행한 사실에 대한 엄한 책망을 들었다. 주교는 회답에서 일체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다만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일은 기쁘고 좋은 일이니 꾸준히 계속할 것을 당부하면서 신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였다. 주교의 편지를 받은 권일신 등은 모든 신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난처한 입장임에도 교회에 순명하는 자세로 곧 성직수행을 멈추고, 오직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며 전교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교의 회신 가운데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내용도 있어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는데,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제사문제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박해가 일어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이미 그 신원이 드러났던 권일신은 1791년의 이 '진산사건'으로 홍낙안, 목만중 등에게 천주교 교주로 지목받아 고발당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에 넘겨졌다.
권일신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형리들 앞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께 대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웅변하였다.
당시 정조 임금은 권일신의 덕망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형조의 보고를 듣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를 설복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욕을 치르면서도 권일신의 신앙고백은 한결같았고, 어떤 유혹과 형벌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배교'란 말만 나오면 무섭게 화를 내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권일신을 사형에 처하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그를 제주도로 귀양가게 하였다.
유배지로 떠나기 전 누이동생인 이윤하의 집에 머물던 그에게 충신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애쓰던 정조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80세의 노모를 생각하게 하였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착잡해진 권일신의 심정을 이용하여 배교가 아니라 임금께 조금만 양보하는 뜻을 쓰게 하였고, 이를 권일신의 굴복으로 임금께 보고하였다. 그렇게 해서 유배지가 노모가 계시는 예산으로 바뀌었으나 그는 이미 모진 형벌로 기진하여 귀양지에 가던 길에 한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신앙 때문에 당한 그의 고독한 죽음은 민족의 구원사에 더 깊은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출처 : 김길수 요한, 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윤유일(尹有一) 바오로(1760-1795년)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바오로는 그 후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과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후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N.J. Raux, 羅) 신부로부터 조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로부터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바오로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일 때문에 바오로는 그 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해 조선 신자들과의 약속에 따라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바오로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유일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이와 관련된 모든 신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주 신부는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집주인 최인길은 신부의 피신을 돕기 위해 그 대신 신부 노릇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해자들은 마침내 신부의 입국 경위를 알게 되었다. 또 신부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의 이름도 알아내고 말았다. 그 결과 그들은 즉시 체포되어 최인길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5세였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유한숙(兪汗淑, ?-1801년)과 윤유오(尹有五) 야고보(?-1801년)
대왕대비의 천주교 박해령이 내리자 조정의 대신들은 일제히 그동안의 온건책을 버리고 천주교도를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잇달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정약종의 심문에 참여하였던 영부사 이병모는 "이들 흉악한 역적의 경우는 남을 죽이는 것보다 그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며 "엄히 심문하여도 한결같이 진술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다"고 하면서 이들을 엄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1801년 2월 지중추부사 등 현직관리 수십 명이 연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올려지고 이미 지목된 신자들에 대한 심문과 탄핵이 가중되는 가운데, 앞서 본 바와 같이 2월 26일에 정약종을 비롯하여 최필공, 이승훈, 최창권, 홍교만, 이존창, 홍낙민이 처형됐다. 이때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사하였으며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귀양가도록 확정됐다. 이들의 박해를 자세히 알아보면, 서울에서의 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 당하였고, 이 무렵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무명의 순교자와 함께 청주에서 잡힌 이종국은 공주에서 처형당했다. 경기도 포천에서는 홍교만이 아들 홍인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아버지 홍교만이 먼저 서소문 밖에서 정약종과 함께 순교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주에서는 일찍이 부활찬미경을 함께 부르다 잡혀온 신자들이 이때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이 확정된 후 각자의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는데 원경도, 임희영, 최창주, 이중배, 정종호 등이 그들이다. 이때 함께 체포된 조용삼은 옥사하였다. 이후에도 대왕대비는 박해를 멈추지 않고 아직도 숨어있는 서학도를 조속히 체포하라고 독려하고 나섰다.
그러자 음력 2월 30일에 좌부승지 김근순은 홍낙임, 송문로, 유기주 등을 탄핵하였다. 이로 인해 송문로는 전라도 녹도진으로 유기주는 진도군 금갑도로 유배되었고, 3월 10일에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부로 오석중은 전라도 영광군으로 각각 정배되었다. 그런 다음 특별한 혐의가 더 드러나지 않자 박해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듯하다가 3월 14일 주문모 신부가 자현하여 자수함으로써 박해는 새로운 국면을 띄며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자현과 순교하기까지 즉, 주신부가 의금부에서 심문과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지방인 양근에서는 유한숙과 윤유오 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정철상, 최필제와 중인출신인 정인력, 윤운혜, 정복혜, 이합규 등 6명이 처형되었는데, 이제 신유박해의 새로운 국면의 전개에 앞서 이들 중 몇 사람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한다.
먼저 유한숙(兪汗淑, ?~1801년)이다. '사겸'이라고도 불리던 유한숙은 경기도 양근지방의 동막골에서 살던 향반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입교한 뒤 한동안 친척인 동정녀 이아가다의 동정생활을 돕기 위해 그를 보호하며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서울의 윤점혜 아가다에게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는 양근의 유력한 신자로서 누구보다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속의 쾌락을 버리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신심을 굳혀나갔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경기도 감사인 이익운으로부터 심문과 형벌을 달게 받고 끝내 배교하지 않아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인 양근의 길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는 가운데 참수형을 당하니 그때가 1801년 음력 3월 13일이었다. 유한숙이 참수형을 당할 때 함께 참수형을 받은 사람이 윤유오(尹有五, ?~1801년) 야고보이다. 이때 양근에서는 7명의 신자가 함께 체포되었는데 모진 형벌 속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사람은 유한숙과 윤유오 둘 뿐이었다.
유한숙과 같이 윤유오 또한 그에 대한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어서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여주지방의 양반이었고 양근으로 이사한 다음 그가 태어났다. 집안 전체가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였으니 그도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양반으로 세속적 복락을 누릴만했던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가족들을 한국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의 사촌 형인 윤유일 바오로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1795년 6월 28일에 순교한 한국교회 초대역사에 높이 기억될 순교자이다. 동정녀로 유명한 윤점혜 아가다는 그의 사촌누이로서 순교자이며,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부친 윤장은 임자도로 귀양갔고 숙부 윤형은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는 고문 중에 옥사하였다.
이렇듯 그의 가계는 온통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파산되고 희생된 그러나 놀라운 신앙의 증거자들이었다. 윤유오는 이러한 증거자들의 가족답게 모진 형벌과 심문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마침내 고향의 신앙동지인 유한숙과 함께 고향 땅 큰길가에서 고향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참 삶의 길을 목숨 바쳐 증거한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5일]
윤점혜(尹点惠) 아가다(?-1801년)
윤점혜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 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 위하여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장을 지어 숨겨 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 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로 갔는데, 가족과 이웃 사람들이 자신을 질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꿋꿋하게 참아냈다.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으며, 2년 뒤에는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 하였다. 또 주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서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와 같이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점혜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동시에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훗날 그녀는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윤점혜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했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에 앞서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윤운혜(尹雲惠) 루치아(?-1801년)
윤운혜(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난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 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아가타)는 그의 언니가 된다.
나이가 찬 후 루치아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그녀는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가 1799년이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루치아 부부는 전교에도 힘써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오래지 아니하여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 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운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배교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 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권철신(암브로시오)은 그의 큰아버지였으며,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1769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세바스티아노는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또 장성한 뒤에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웃에 사는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의 신유박해로 생부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죽임을 당하자 세바스티아노는 마음이 약해져 한때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성사를 받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 신부를 방문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얼마 후에는 고향인 양근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1795년의 을묘박해로 주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세바스티아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전에 한 말을 취소하였으며, 무수히 가해지는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동시에 형조에서는 ‘권상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세바스티아노의 고향인 양근 주민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조숙과 권 데레사
박해시대 순교자들 가운데 동정을 지키며 살았던 두 부부가 있습니다. 전주 치명자산에 모셔진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그리고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입니다.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숙 베드로(1786-1819년)는 선하고 친절한 성격에다 근엄하고 침착하였습니다. 그의 조부와 숙부가 1801년 신유박해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는 강원도에 있는 외가로 피신하여 여러 해를 지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과 친척들이 신앙 때문에 당한 어려움으로 교리를 실천하는 데 그다지 열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권 데레사(1783-1819년)와 결혼한 뒤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최근 한국교회사연구소 방상근 박사는 “일성록”에 기록된 기록과 결안을 통해 조숙의 한자명이 기존에 알려진 숙(淑)이 아니라 숙(塾)으로, 또 권 데레사의 이름이 천례(千禮)였음을 새롭게 밝혀냈다(“교회와 역사” 2010년 3월호 - 필자 주).}
권 데레사는 7세에 어머니를, 9세에 부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여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집안이 몰락하고 오빠들은 귀양을 갔으며, 모든 재산을 잃는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부모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네 아이들 가운데 데레사는 막내였습니다. 정신과 마음의 모든 자질을 갖추고, 온유하고 호의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는 모든 이와 절대적인 화합 속에서 지냈습니다.
권 데레사는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을 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현실적인 처지를 걱정한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21세에 조숙 베드로와 결혼하였습니다. 이때 권 데레사는 동정부부로 지낼 것을 제의하는 글을 전했고, 조 베드로는 곧바로 동의하였습니다.
서울 북부 사재감계(司宰監契, 종로구 창성동)에 살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였고, 때때로 동정부부 서원에 거슬리는 유혹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물리치는 각별한 은총을 얻었습니다.
조 베드로는 신심이 깊은 아내의 탁월한 덕성과 마음을 파고드는 말들로 뜨거워져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살림에도 성직자 영입을 추진하는 정하상 바오로의 모든 것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기도와 묵상에 열심인 그는 종종 통회로 많은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습니다. 세속적인 일들을 멀리하면서 교회 일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즐겨 그에게 배우러 오곤 했습니다. 그는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부는 각자가 자신을 온전히 성화시키며 이웃을 돕는 데 전념하였고, 그들의 생활은 교우 부부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가르침과 위로와 감화를 찾는 모든 이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1817년 3월 22일 이전 한성부에 체포되었습니다. 포도청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확고하였습니다. 감옥에서 쓴 서한에 “내가 들어선 이 길은 나로 하여금 예수와 마리아의 계획하심을 누리게 할 목적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고 하였습니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는 함께 감옥에 갇혀서도 서로 위로하였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렸습니다.
권 데레사는 “나 같은 죄 많은 여자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미 동정을 지킬 수 있는 너무나 크나큰 은총을 허락하여 주셨는데, 또 이렇게 나를 순교의 은총에 불러주십니다. 내겐 너무나 과분할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합당하게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조 베드로에게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유혹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때 권 데레사가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권 데레사는 같은 날 함께 순교자가 되고자 하는 확고함을 지키도록 그를 얼마나 잘 이끌었는지 모릅니다.
수감되고 2년 동안 크나큰 형벌과 궁핍함을 견디어낸 그들은 1819년 6월 20일 이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 직후 그녀에게서 세 번의 칼자국을 발견한 한 신자는 “온몸은 빛나고 한 송이 꽃과 같은 신선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시신은 한 달 뒤에야 거두어졌는데, 뼈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권 데레사의 머리카락은 1839년에 순교한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집에 있는 대바구니 속에 흐트러진 채 넣어져 보관되어 있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거기서 향기가 나와 온 방안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조숙과 권 데레사가 이룬 동정부부의 삶은 한국 교회 안에서 신앙과 순교의 꽃이 가정생활 안에서 어떻게 피어나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요셉과 마리아처럼 성가정을 이루는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들처럼 우리의 가정도 성가정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출처 :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조용삼 베드로(?-1801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후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서야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 정약종은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부친을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 베드로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님을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1802년)
홍익만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홍익만 안토니오는 1785년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연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다만,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할 생각을 가졌으나, 주변 환경 탓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796년 안토니오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자주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았다. 또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익만 안토니오는 안산과 여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안토니오는 교우들을 밀고하고 천주교를 배교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포된 교우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이때 그가 재판관들 앞에서 대답한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었다.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몇 달 동안 도망을 다니다가 비로소 체포되었습니다. …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따로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증거한 안토니오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