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범일동
동구 범6동에서 범4동으로 이어진 계곡 주위는 숲이 우거져 있는 그 계곡의 내를 범내라 했다. 범천(凡川)은 계곡 중간을 흐르는 내를 가리키며, 이를 범내라 부른 것은 이곳 냇가에 때때로 범이 나타났기 때문이라 한다. 오늘날은 범천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호랑이를 뜻하는 범이라는 음을 한자에서 빌려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범내골 시장통에 세워져 있는 "호천석교비"는 범내가 호랑이 내라는 것을 입증 해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범일동의 서쪽 산비탈은 ''널박''이라 불렀다. 널박의 뜻은 이 주변에 민가가 밀집해 있는 상태, 즉 인가가 널리 밀집되어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이곳이 양지인 데다 앞에 있는 바닷물이 반사하여 낮에도 유달리 늘 밝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인가가 널리 밀집하여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 범내 주위로 마을이 형성되자 범천1리 범천2리라 했는데 일제강점 이후 범천1리와 범천2리가 병합될 때 범천1리의 약칭인 범일동(凡一洞)을 동명으로 삼았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범일1,2,3,4,5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 범일4동을 4동과 6동으로 분동하였다. 1975년 구역조정으로 범일3동 일부를 남구 문현동에 편입시키는 동시에 일부를 범일2동과 범일5동에 편입시켜 범일3동을 폐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널박마을, 노하마을, 대지막거리마을, 범내골마을, 소고마을, 안창마을, 연동개마을이 있다.
수정동
수정동(水晶洞)은 조선시대에 동래부 동평면 두모포리(豆毛浦里)라 불렀다.『동국여지승람(1481)』의 기장현 관방조의 기록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원래 기장에 있었지만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이 일어난 부산포의 방위를 보다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게되자, 울산의 개운포(開雲浦)와 함께 부산진 부근에 이설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 지명도 그대로 두모포리로 쓰이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6년(1614) 우리 나라와 일본과의 국교가 회복되자, 두모포에 왜관이 개설되어 약 70년간 존속하다가 숙종 4년(1678) 용두산일대로 옮겨갔다. 용두산의 왜관을 신왜관(新倭館)이라 한데 대하여, 두모포왜관은 구왜관(舊倭館)이라 하여 신관, 구관으로 불러왔다. 수정동은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자리는 황토가 적고 지면에 모래가 많아서 비가와도 신발에 물이 묻지 않았으며, 또 이곳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어서 수정동(水晶洞)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수정동에는 성이 있었는데 정상에 큰 분지가 있으며, 그 일대를 조금만 파도 크고 작은 수정이 나왔으므로 그 산을 수정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산아래 마을 이름도 수정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또 지금의 수정동·초량동 뒷산을 통칭하여 사병산(四屛山)이라 하였는데, 특히 수정동 뒷산은 마이성(馬餌城, 馬里城)이라 불렀으며, 이 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흐르는 시내의 이름 역시 수정천이라 하였다. 그러나 수정의 출토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수정1,2,3,4,5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감골마을, 고관마을, 소막골마을, 수정골마을, 오바골마을, 외솔배기마을, 화장막마을이 있었다.
좌천동
좌천동(佐川洞) 이라는 이름은『동래부지(1740)』에 나오는 좌자천(佐自川) 이라는 이름의 약칭이다. 좌자천은 가야산 및 감고개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수정동의 중앙을 거쳐 부산진 동쪽을 돌아서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개천을 말한다. 이 좌자천의 주변에 있었던 마을이 좌자천리이며, 이는 각기 1,2리로 나뉘어 있었다. 좌천동의 해안은 조선말기에 개운포(開雲浦)라 불리었다. 이 개운포란 이름은 부산에 단일 왜관이 설치되었고, 또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국방을 튼튼히 할 필요에 따라, 울산군 대현면(大峴面)의 개운포를 없애고 지금의 좌천동 해안으로 옮겨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기장현의 두모포를 오늘날 수정동 해안으로 옮기면서 그 이름을 사용하여 두모포리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좌자천 지역에 인가가 광범하게 산재해 있었다. 범천동 일부와 좌자천 일부가 범일동으로 개편되자, 좌자천리는 좌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좌자천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이곳이 바다의 입구이므로 태풍의 피해가 잦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물이 깊지 않고 잦은 물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좌천동(佐川洞)이 되었다고 한다. 1959년 동개편 때 좌천1,2,3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 좌천2동을 2,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능풍장마을, 자진내마을, 좌천마을, 사도천마을이 있었다.
초량동
초량동(草梁洞)의 유래는 1678년 초량소산(草梁小山)인 지금의 용두산 주위에 왜관이 설치되기 이전은 지금의 부평동에 어민들이 얼마간 살았을 뿐 초량 이남은 사람이 살지 않은 억새풀과 띠풀의 초원지대로 「샛디」라하여 초량이었다. 지금의 중구·동구·서구지역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초원지대였다. 이 초원지대인 풀언덕을 초량이라 했는데 그 초량이란 이름이 맨 먼저 쓰인 곳은 그때의 사천면(沙川面)인 지금의 서구 일대였다. 그뒤 지금의 초량을 신초량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자니 동래부사 정현덕은 같은 고을에 같은 이름이 둘 있을 수 없다 하여 신초량을 초량이라 하고, 구초량을 부민동이라 하게 했다고 한다. 그때의 부민동은 지금의 부민동에서 남부민동까지를 말했고 신초량인 초량은 지금의 초량에서 남쪽으로 용두산 끝자리까지를 말했다. 풍수상으로 부산의 지형은 엎드려 있는 소의 모습인 여와우형(如臥牛形)이라 하여 풀밭이 있어야 하기에 초량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한편, 초량동(草梁洞)은 조선후기 해정리(海丁里)라고 하였으며, 이 지역에는 고분이 있었고 해정리의 해변은 노송이 울창하여 이곳을 일인들이 기석빈(棋石賓)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물로 씻은 깨끗한 돌들이 널려 있어서 흡사 바둑돌과 같았다는데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초량동은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동개편 때 초량1,2,3,4,5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에는 초량4동은 인구의 증가로 초량4,6동으로 분동하였고, 초량5동은 인구감소로 인해 1995년 초량3동에 흡수·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매축지마을, 사량마을, 신초량마을, 산막마을, 연화동마을, 죽림동마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