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이후로 일본영화를 참 오랫만에 본 것 같다.
그동안 코미디나 폭력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 간만에 러브스토리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다른 영화를 볼 때와 일본영화를 볼 때 가장 다른 점은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너무나 무시하고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다른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이미 전에 봤던 영화를 배경지식으로 감독과 배우의 이미지를 떠올려놓고, 바뀌었거나, 진보되었거나, 퇴보되었거나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보게 되는데 (남들처럼 미리 영화정보를 뒤져서 보러 가지는 않는 편이니까) 일본영화는 아무래도 그런 사전지식이 머릿속에 워낙 없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도 주위의 누군가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다. 같이 본 사람은 영화를 추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추천해 준 언니한테 전화를 했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너도 이탈리아 가보고 싶지', 그런다.
보통은 영화가 어땠느냐, 그렇게 물어보지 않는가?
약간은 의아한 질문에도 나는 정말 '그렇다'고 대답했다.
영화를 우선 얘기하기 전에 그런 이야기가 오고갈만큼 이탈리아에 대한 풍경은 굉장히 인상깊었다.
나는 언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꼭 이탈리아가 아니라 하더라도 외국에 나가서 혼자 생활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들더라"고 했다.
그러니까, 정말 그 나라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들 말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헐리우드 영화를 볼 때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게 이탈리아라서 그런가.
워낙 - 영화에서도 말하듯이 - 과거지향적인 나라이다 보니 역사나 문화, 그런 내용을 다루는 책에 실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나라여서 말이다.
대성당에 올라 바라본 이탈리의 풍경은 온통 빨간색 지붕의 집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 풍경이 아~ 정말 이탈리아군, 하는 생각을 자아냈던 것이다.
"영웅"을 볼 때도 그랬고,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삼나무 어쩌고저쩌고"를 볼 때도 그랬고, 아, 그렇지, "책상 서랍속의 동화"를 볼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기가 거기군. (말이 좀 웃기네)
하여간 열거한 영화들보다 이 영화가 더욱 이탈리에 대한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는데, 왜 그럴까, 했더니, 감독과 배우 이름을 알아보려고 뒤져본 영화정보에서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과거를 간직하고자 하는 모습은 피렌체를, 현재를 달리고 있는 모습은 밀라노를, 그렇게 같은 이미지로 영화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그런 비밀을.....
여하튼 '사랑'이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늘 가지고 다니는 화두인가 보다.
한 때는 사랑타령으로 도배된 시나, 노래나, 영화나, 실은 좀 우습게 봤던 적도 있었다.
더 큰 화두를 안고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지금와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이제는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생에서 큰 무게를 가지고 있는가를 조금 알았다고나 할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랑론을 펼치며 성공(?)도 하고, 좌절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고, 불행해 하면서도 떨치지 못하고.
때로는 자신이 모르는 진실을 남이 안다고도 하며, 남이 모르는 진실을 나혼자만 간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정작 본심은 자신도 모를 수가 있다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준세이'와 '아오이'는 서로의 사랑을 10년이 지난 후에서야 확실하게 정리가 된 것 같다.
그 10년 사이 냉정함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 갔다면, 이제 앞으로는 열정만을 가지고 둘의 사랑을 이끌어 갈테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서야 나는 조금 눈치를 챘는데, 내가 눈치챈 것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외국영화는 원어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더군다나 일본 사람이 이탈리아를 갔으니 자기네도 외국어를 쓰는 입장이니까 나야말로 더더욱 신경이 덜 쓰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문득 주인공이 이탈리아어를 쓰지 않고 영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 귀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안들리는 외국어가 있다면 그건 이탈리아어라고 쳐도, 영어도 쓰고, 일어도 쓰고, 영화에서는 그렇게 이끌어 갔던 것 같다.
더 웃겼던 건 실제로 '진혜림'이 그렇듯이 극중 '아오이'도 가족을 떠나 일본으로 유학을 온 학생으로 그려졌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둘 사이는 영어와 일어 사이를 오간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영화 막바지에 둘이 대성당 꼭대기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고 다음 날 아침 헤어지기까지, 잠깐 대화방식에 우연히 주목하게 되었는데, '아오이'가 진심을 말할 때는 일본어를, 거짓을 말할 때는 영어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본심을 나는 알 수도 있으니깐)
역시, 본심은 어떻게든지 밖으로 표현이 되는 건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눈치를 못 채는 것이 둘의 사이를 더디게 하는 것일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어쨌든 사랑영화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보이는 풍경과 들리는 소리가 굉장히 많이 좌우를 하는 것 같다.
내 눈을 가득 채웠던 이탈리아 풍경도 그랬고, 둘의 사이를 결정지어준 체로 소리도 그랬고, 그렇게 둘 사이의 결정적 매체인 첼로 연주에도 불구하고 내 귓가에는 여전히 감미롭던 피아노 소리가 맴돌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