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의 시인을 만나다|시집속 대표시-민창홍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 외 4편
사지가 마비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반려견 몰티즈의 안락사를 생각한다
술자리에서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
시인이 맞느냐고
뇌에 물이 차서 다리로 가는 신경을 누르니
걸을 수도 없고 수술도 안된단다
고통 속에 사느니 안식을 생각한 것이다
신부님이 다시 물었다
시인이 맞느냐고
꼬리를 흔들고 눈을 맞추고 매달릴 때면
멀뚱멀뚱한 아들보다 낫다는 생각
아빠를 부르던 딸의 모습까지도
몰티즈 검은 눈동자에 투영된다
그렇다 나는 시인이다
제자리에서 먹고 배설을 해도
다리가 불편해도 가족이다
눈곱 범벅이 된 얼굴 바라보면 나오는 한숨
연어가 들어간 비싼 사료를 산다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연어가 물살을 가르는 연습은 계속되고
등창의 농이 눈물로 쏟아진다
기적이란 있는 것인가
거실이 조금씩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이른 봄
꼬리가 빠질 정도로 힘주어 제집 밖에 나 뒹굴고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더니 비실비실 걸음을 떼고 있다
드디어
나도 시인이 되었다
---------------------------------------------------------------
사 과
아내의 성화에 분리수거를 하려고 종이 상자를 들었는데 사과 하나가 툭 떨어진다 내 발등을 찍고 구르는 사과, 반쯤 썩어서 시커멓다 도려내고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얼른 집어 들었는데 물이 흐른다 종이 상자에 갇혀 목을 조여 오는 답답한 시간들이 흘러내린다 어찌 견디었을까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어둠의 공포 혼자 이겨낸 장렬한 죽음이다 검게 그을린 농부의 잔주름 메워 주던 붉은 미소는 우리 집에 와서 일그러졌구나 웃음기 없이 생을 마감하고 있는 사과 하나, 그것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또다시 긴 어둠에 갇히고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몸부림칠 것 아닌가 달콤함 오래 간직하기 위한 욕심이었다 너의 잘못은 결코 없다 한 순간의 망각을 탓해다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기에도 벅차다 모든 피조물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너를 기억하마 사과 상자에 번진 너의 흔적
------------------------------------------------------------------------------
해자*
성벽을 따라 걷다 물길을 만난다
물은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듯 자장가로 풀을 키워
비밀의 숲처럼 오래된 성을 지키고
한 무리 참새가 낮잠에서 깨어 출격한다
때 이른 장맛비가 차단된 미로에 뿌리고
늪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
돌과 돌이 서로 기대어 숨바꼭질한다
술래가 한눈파는 사이
날개를 펴지 못한 참새 한 마리
첫 비행에 실패한 채 풀 섶에 몸을 숨기고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돌탑을 쌓는 마음으로 보이는 길 당기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는 듯
온몸에 전하는 두 손의 온기
바다는 외롭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성을 지키는 병사처럼 창 들고 돌고 도는
순찰병의 친구가 되어주는 물길
풀을 키우듯 어린것의 상처 보듬으면
비행 편대가 무사 귀환한다
망루에 선 장수 안도하며
물의 행진을 보고 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
----------------------------------------------------------
벌
- 마스크 7
커피를 앞에 놓고 조간신문을 편다
인류의 재앙을 경고하는 공포의 사진들
뿌연 하늘에 인화되어 날고
창밖으로 목을 빼고 햇빛을 향하더니
앙증맞게 하얀 꽃 드러낸
유자나무 화분
푸른 잎 사이로 가시를 감추고
당당하게 머리든 꽃들이 꿈꾸는
노란 열매
벌이 날아와야 하는데
버튼을 누르면 얼마든지 나오는 커피기계처럼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아, 모르고 살았구나
벌도 마스크를 쓰고 있음을
누르기만 하면 무엇이든 나온다는 착각
신문지를 깔고 생명을 찾는다
윙윙 꽃술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붓
엉거주춤 벌을 서는 날
---------------------------------------------
잔도棧道
- 마스크 14
강물이 와락 끌어안을 것 같은
산에서 흙더미가 쏟아져 덮칠 것만 같은
벼랑 끝
길이 뱀처럼 기어간다
원죄의 모습으로 길은 희미한데
바람은 안개를 맵게 피워내고
나는 물안개에 취해
몽롱해져서는 물에 빠진 해를 잡고
잔기침을 한다
열이 나고 목이 아파서 하얗게 보낸 밤
지팡이를 든 노인이 안개를 걷어내면
어부는 신선처럼 노를 젓고
독이 퍼져가는 절벽에서
하얀 분말에 녹아내리는 기침
놀라서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뛴다
다시 강물이 잔잔해지고
허리 굽은 노인이 사라진 곳
이정표가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