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와 고고학적영역
남한과 북한의 사회적 구성원이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에서 기인합니다.
‘이병도학파’를 중심으로 한 국내 주류사학계가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을 부정하면서 중국의 망명세력이 세운 나라가 곧 고조선이었다고 규정하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동족(同族)이라는 기존의 인식이 틀렸다는 점을 강변하기 위해서이며 한민족의 정통사였던 환국 배달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중국의 식민사관과 일제의 제국주의사관에 기인합니다.
주류사학계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 전해지는 사서(史書) 중에서 단군조선의 역사가 가장 자세히 기록된 사료라는 그저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친일파의 후예가 이어받은 일제식민사학을 거부해야 한다면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중요성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환단고기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야 할 만큼 위대한 사서입니다.
환국(桓國)·배달국(倍達國)·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성에 관하여 그 실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다음의 몇 가지를 통해 그 진실성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환국·배달국·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이 가장 풍부히 남아 있는 사료는 환단고기(桓檀古記)입니다. 여기서는 환단고기의 기록과 고고학적 물증을 기준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환단고기의 기록이 물증으로 증명되고 있는데도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성을 부정하는 ‘이병도학파(李丙燾學派)’ 주류사학계는 과연 어느 나라의 국민인지 스스로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1. 북경(北京)의 삼조당(三祖堂):기원전 2707년부터 시작됐던 배달국의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화하족(華夏族)의 지도자인 헌원황제(軒轅黃帝)가 격돌한 전쟁은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쟁입니다. 중국에서는 2004년부터 이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치우천왕과 헌원황제의 묘를 정비하고 그들을 중국 민족의 정식 조상으로 받아들여 북경의 탁록(琢鹿)에다 삼조당을 세웠습니다. 환단고기는 동아시아를 뒤흔든 역사적 전쟁인 치헌전쟁(蚩軒戰爭)의 기록을 가장 많은 분량으로 가장 완벽히 기록하고 있는 사서입니다.
2. 강화도의 참성단(塹星壇):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과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記)에 제1대 단군(檀君) 왕검(王儉) 재위기인 기원전 2284년에 쌓았다고 나옵니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단군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며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차제에 마니산 참성단은 국보로 지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강동군의 단군릉(檀君陵):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안도 강동군에 있는 대박산(大朴山)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제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이 단군릉을 거대하게 재축조하여 성역화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기원전 2084년 고조선 제5대 단군 구을(丘乙)이 붕어(崩御)하고 대박산에 묻혔다는 단군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유물유적인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역사성이 여기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4. 제13대 단군 흘달(屹達) 때의 오성취루(五星取漏):단군세기(檀君世記)와 단기고사(檀箕古史)에는 고조선 제13대 단군 흘달 재위 50년인 기원전 1733년에 5개의 별이 일렬로 서는 장관을 연출했는데, 이것이 박창범 서울대학교 교수에 의해 천문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국내 최고의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기원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목성·토성·수성·화성 등 추가로 초승달까지 1렬로 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을 연출했음을 확인하였습니다(우연일 확률은 0.007%대 불과).
5. 갑골문의 귀방: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기원전 1291년 고조선 제21대 단군 소태(蘇台) 재위 때 은나라의 국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쳤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의 기록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甲骨文)에서 은나라의 귀방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학계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 환단고기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阿瑜陀國)과 백제 상인들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백제가 현재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정확히 뒷받침해 줍니다. 이는 백제의 중원대륙 식민지 개척설이나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인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는 환단고기를 연구도 해보지 않고 위서 운운하는 것이 국내 제도권 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7. 장수태왕(長壽太王)의 연호 건흥(建興):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장수태왕이 즉위하자,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건흥의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명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世在炳眞)’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태백일사에 그 정확한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실로 대단한 기록이요 엄청난 고고학적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주류사학계는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8.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내력: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발해의 정사인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을 연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의 무덤에서 연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진가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고구려 및 발해의 역사와 환국·배달국·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을 알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서인 것입니다.
9. 이정기(李正己) 장군과 제나라: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서기 781년 고구려 유민 출신의 군벌인 이정기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고구려의 유장(遺將) 이정기는 중국대륙 산동반도 일대의 15개 주를 장악하여 제나라를 건국하고 4대 58년간 통치했던 군벌인데 환단고기는 여기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유장 이정기가 중국의 산동반도에 제나라를 건국하고 다스렸음은 KBS 교양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방영되어 그 역사적 사실이 인정되었습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위대한 사서인 것입니다.
10. 발해 문제(文帝)의 연호 대흥(大興):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발해 제3대 황제인 문제(文帝) 대흠무(大欽茂)의 연호가 대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1949년 만주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貞孝公主墓地) 비문에서 발해의 문제 대흠무가 자신의 연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補力孝感今倫聖法大王)’이라 쓰고 있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가 얼마나 정확한 역사기록을 남긴 사서인지가 확실히 증명된 것입니다.
11. 비파형청동검(琵琶形靑銅劍):고조선의 비파형청동검은 단군조선이 중국과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고조선의 유적유물입니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비파형청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원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12. 고인돌 유적:환단고기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존적 증거물입니다.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로부터 고인돌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배달국·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며 세계적인 역사서인 것입니다.
13.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하북성 중산묘에서 기원전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 도끼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天子建防重山后)’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서기전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22세기부터 기원전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천자국이라 불리었던 단군조선이었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사 내용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최초로 천자(天子)를 참칭한 것은 기원전 221년의 진시황(秦始皇) 때였습니다.
14. 요녕성의 ‘번한(番韓)’ 명문: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번한(番韓;番朝鮮)을 나타내는 번간(番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으로 만든 도장이 발견된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 등의 ‘삼한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입니다.
15. 단(檀), 기(箕), 언(彦), 고죽(孤竹) 명문:서요하(西僚河) 지역의 적봉시 하가점을 중심으로 하북성(河北省)에서 요서지역까지 출토되는 청동기 문화 유적지를 ‘하가점하층문화’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단군조선을 나타내는 단, 단군조선의 제후국 기자조선(번한/번조선)을 나타내는 기, 단군조선의 제후국 서국의 서언왕(徐彦王)을 나타내는 언, 단군조선의 제후국 고죽국을 나타내는 고죽 등이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습니다. 모두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명문(銘文)들입니다.
16.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서요하지역의 적봉시 홍산과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웅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홍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홍산문화와 나사대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서기전 3898년과 서기전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17. 배달국의 녹도문(綠度文)과 창성조적비(昌城造積碑):환단고기에는 기원전 3898년 역대 18명의 환웅(桓雄) 중 배달국을 건국한 초대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담시킵니다. 그런데 이 녹도문이 북한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山東省)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같아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18. 가림토문(加臨土文)과 일본의 신대문자(新代文字):환단고기에는 기원전 2181년 제3대 가륵(嘉勒) 단군이 을보록에게 정음38자를 창제할 것을 명령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가림토문의 흔적은 지금의 한글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일본의 신대문자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구주신사’의 가람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 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 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 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입니다. 또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 요하(遼河)는 압록(鴨綠)이고 난하(灤河)는 요하: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의 정사인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와 삼국유사(三國遺事)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은 중국의 고지도인 ‘지리도’·‘연산도’·‘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20.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北夫餘紀)는 낙랑군과 낙랑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1767년 제13대 단군 흘달과 기원전 1237년 제23대 단군 아물(阿勿), 기원전 195년 북부여 제1대 단군 해모수(解慕漱), 기원전 169년 북부여 제3대 단군 고해사(高奚斯) 재위기입니다. 특히 기원전 195년에는 낙랑국왕 최숭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도읍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성은 이렇게 고고학적으로도 명확히 나타났습니다. 아시아 대륙과 중원대륙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환국·배달국·단군조선 72세 6962년의 역사를 모조리 생매장한 일제식민사학의 후예 ‘이병도학파’를 중심으로 한 매국적 주류사학계의 학문적 범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불행한 역사를 이제는 제대로 밝혀야 합니다. 부끄러운 동양의 얼굴을 다시금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민족사적 요청이며 동양사적 요청이며 세계사적 요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