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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흥할 長興 땅으로의 여정
김 주 석
이틀간이나 봄비가 촉촉이 내렸다.
비갠 하늘로부터 길게 빗금을 그으며 햇살이 솟아져 내리는 곳에 오월의 봄 향이 물씬 묻어나는 연초록 푸른 빛깔은 청정을 더하였다. 틀에 박힌 매너리즘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비상은 언제나 그리움의 동경이었다. 이때 정남진땅 장흥으로부터 축제에 초대 받은 것은 무력한 일상의 탈출이었다. 먼 곳으로의 여정은 출발부터가 느낌이 순후하였다. 공익을 우선으로 하고 거북 등껍질 같이 딱딱한 「법」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생활은 강파르고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영혼의 귀향 처인 자연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점차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버거운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서 자연으로의 회귀는 도처에 숨어있는 희망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푸른 물감이 배어있는 연초록 세상 한 가운데로의 질주는 통쾌하고 짜릿한 스릴을 동시에 만끽하게 해준다.
어눌하면서도 띄엄띄엄 한두 마디씩 던지는 말이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이윤환이 ‘힘 좋은 차는 쌩쌩 달리고, 승객들은 매너 좋은데, 베스트 드라이버(Best Driver)인 박기사의 운전에 여행할 맛 난다.’ 고 너스레를 떨어 모두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웃다보면 웃을 일이 생긴다고 했던가. 갈 길이 멀지만 여행의 운치는 여유와 낭만을 빼놓을 수 없다. 서해대교 중간지점에 있는 오션 파크에 들러 커피 한 잔으로 잠시 느긋한 여유로 사치를 부려보았다. 대교를 건너면서 짭조름한 염분이 배여 있는 해풍 내음은 매캐한 대기오염에 시달리고 있는 도시인 에게는 상큼하고 싱싱함으로 닥아 왔다.
금강을 건너면 충청도 장항에서 호남 땅 군산으로 들어서게 된다. 청 보리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김제 만경평야의 들판은 생명력이 넘치고, 그 위로 바람결은 햇살과 살을 섞어 색체와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져 더욱 속력을 내도록 재촉하여 시속160km가 넘는 전속 질주로 차체가 부르르 떨리면서 요동이 심하여 앞좌석에 탄 오늘의 홍일점 김은영과 세심한 감정의 이윤환은 파랗게 질리며 내내 말문을 닫았다.
나비축제로 유명해진 함평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석양이 너울지는 풍경이 깔리기 시작했다. 황혼의 연출은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에 붉은 주황색을 토해내어 집 떠난 나그네의 헐렁해진 맘에 전원을 향한 몽환적 그리움이 가슴 저미게 엄습해왔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무렵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의 본고장인 목포를 지나면서 모두들 세발낙지와 홍어회를 안주삼아 소주한잔이 간절하다는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영산강 하구 안 뚝을 지나면서부터 차 속력이 느려지자 얼어붙었던 입들이 열리면서 대통령과 집권당대표까지 배출시키고도 가장 낙후된 도시의 모습에 비난들이 가해졌다.
약속시간인 저녁8시에 간신히 장흥에 도착했을 때에는 탐진강 변에 각양각색의 영롱한 폭죽이 현란하게 밤하늘을 수놓으며 축제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군청 앞에서 김근이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으며 ‘별미관’으로 안내했다. 올 1월에 한번 다녀갔던 곳이라 여주인은 단번에 나를 알아보고 상냥한 인사를 건네며 살갑게 맞아주었다. 군청 마켓팅과 위충환 과장, 김성계 계장, 장흥농협 조윤남 소장, 이영섭 부장이 연회석을 마련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운 저녁식사와 함께 주연이 계속되면서 차츰 격이 없는 어울림과 대화가 이어졌다. 전남도청에서 새로 부임한 위과장은 장흥이 고향으로 후덕한 인상에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향토사학에 깊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애향심이 남달랐다.
임진왜란당시 이순신장군은 왕명을 거역한 죄로 한양으로 압송당하여 죄상을 실토하도록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원균이 지휘하는 우리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 수군에게 전멸 당하였다. 이 해전에서경상우수사 배설은 싸우지 않고 도망쳐서 장흥의 회령포(회진)깊숙한 포구에 배 12척을 숨기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용된 이순신장군은 이곳의 배 12척을 인수하여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역사적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배설이 도망치지 않고 원균과 같이 일본수군과 싸웠더라면 12척의 전선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회령포에 숨겨둔 12척 전선이 있었기에 이순신장군의 빛나는 명량해전의 승리도,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배설은 1599년 권률 장군에 붙잡혀 참형에 처해졌다. 길지의 장흥 땅 이였기에 역사의 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라며 임진란사를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외에도 TV드라마에서 방영되었든 「무인시대」의 공예태후가 관산읍 옥동리 출신이다. 고려 인종은 왕자를 탄생시킨 왕후를 위해 영암부에 속해있던 정안현을 장흥부로 승격시켜 길이 흥할 고장이란 뜻의 장흥(長興)이란 이름을 하사하여 오늘날까지 불리워지고 있는 유서 깊은 역사적 배경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장흥은 수려한 자연환경과 문학적인 토양을 배경으로 이청준, 송기숙, 한승원 등 기라성 같은 문인을 배출한 문림(文林)의 고장으로 높은 문화적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고장이다.
지리적으로도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에서 정북방향으로 북한에 중강진이 있고, 정동쪽에는 동해안에 정동진이 있으며, 경도126도59분 위도34도32분인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 사금마을이 정남쪽 정남진이라며 자랑이 대단했다.
이외에도「석대들」은 갑오 동학농민군이 경군 및 일본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루어 참패한 질곡의 역사적 수난사의 현장이라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근래에 부산면 관한마을과 관산읍 방촌마을에서 대단위 야생 녹차 밭이 새로 발견 되어 차 재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듬직한 체구에 신뢰감을 주는 에니멀 닥터(Animal doctor)박태원은 좌석을 종횡으로 옮겨 다니며 분위기 메이커로 친화력을 과시하였다. 지난해부터 끌어오던 쌀 미수금 7천만원을 말끔히 해결해 주어 농협의 조소장과 이부장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거듭 감사를 표시하였다. 이후로도 정감 넘치는 연회는 길게 이어지다 밤이 깊어서야 아쉬움을 간직한 체 일어섰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김성계 계장이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다’고하며 막무가내로 우리들을 노래방으로 이끌었다. 또다시 술잔을 높이 들고 흘러간 노래, 대중가요, 렙 등을 돌아가면서 부르는 흥겨움 속에 거추장스럽고 치렁치렁한 사유는 벗어던지고 질펀한 음악에 감성이 밀착되어 서로의 신뢰를 쌓았다. 끝까지 함께 한 김근이 참새가 방앗간을 어떻게 지나칠 수 있느냐며, 이곳에오면 언제나 들렸든 「초원집』으로 떠밀리다시피 하여 들어섰다. 다시금 소주와 맥주를 즐비하게 비우며 알콜에 흠뻑 젖게 되었다. 부사골 장흥 땅에서의 하루 밤은 메마른 현실로부터 일탈하여 삶을 버무리며 꿈길에서 자주 빛 신기루를 더듬었다.
이튿날 아침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식당에서 얼큰한 된장국으로 쓰린 속을 쓸어내리고 읍내에서 20 여분 거리에 있는 제암산 축제장을 찾아갔다. 아침부터 많은 군민들이 모여들고 행사장의 텐트들이 늘어서있었다.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농 특산물을 팔고 있는 간이매장을 둘러보고 나서 군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천막 안에서 김인규군수, 위과장과 직원들이 합석하여 파전안주에 막걸리 파티를 잠시 가졌다. 김군수는 ‘바쁜 중에도 축제에 함께 해주어서 고맙다.‘며 막걸리 한 사발씩을 돌리고 환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장흥의 진산 제암산(帝岩山) 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임금 帝 를 닮은 바위가 있어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정상의 바위를 향하여 주위의 바위들이 마치 임금을 향하여 절을 하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졌다 한다. 제암산(807m)과 사자산(646m)사이 능선을 따라 넓게 펼쳐진 철쭉은 “산상화원”이라 할 만큼 온통 활활 타오르는 진홍의 황홀한 정경을 이루어, 전국의 산 꾼들이 이맘때만 되면 순례 지를 찾듯이 모여드는 유명한 산이다. 그러나 올 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와 꽃망울이 녹아내려 꽃구경은 망쳤다고 먼저 올랐다 내려온 사람들이 전해주었다. 우리들은 축제에 참가한 지역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온몸으로 산정을 느끼며 쉬엄쉬엄 올랐다. 산속의 햇살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산 풀 향기 가득하여 봄은 펄떡이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의 수많은 농민들이 등산복차림도 하지 않은 채 참여하고, 어림손자 손녀들의 손을 잡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동참하고 있었다. 이들이 산행을 하기에는 무리였는지 등산로 중간 중간에 주저앉아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즐거워하였다. 대체 무엇이 바쁜 농사일과 일상을 접고 온 군민들이 산으로 모여 들게 했을까? 이는 자기고장을 사랑하는 애향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 다.
당초 일정은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을 찾기로 예정되었으나, 제주도출신에다 바다가 고향인 해병대 사나이 이병수가 ‘남해안 바다는 꼭 구경하고 가야한다.’ 는 취중고집에 계획을 변경하여 『키조개 축제』가 열리고 있는 수문해수욕장을 김근의 선도차 안내를 받으며 바삐 이동했다. 흰백사장이 길게 이어진 곳에 끊임없이 파도가 밀며오고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바라보며 모두 바다의 유혹에 빠져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남도의 봄은 푸른 바다의 파도를 타도 오는 가보다. 멀리 수평선을 침묵으로 응시하는 여심, 김은영의 깊은 고뇌의 사유는 무엇일까? 수심 14-50m의 진흙 속에 살고 있는 이곳의 키조개는 청정해역에서자라 단백질이 풍부하면서도 저칼로리 식품으로 상품성이 뛰어나 내수시장보다는 생산량의 대부분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수문항 방파제에서 치러지는 『키조개 축제』행사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구워먹는 키조개 등심구이 맛은 담백하면서도 개운하여 입 안 가득 상큼하였다.
마지막 행선지인 보림사를 찾아 나서는 길에는 한여름과 흡사한 따가운 햇살이 내려 쬐였다. 막 바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절 입구의 오른쪽에 있는 부도 밭을 지나 보림사 뒤편 가지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곳으로 올랐다. 비자나무, 소나무, 참나무, 왕대나무 등 남도지방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각기 다른 나무의 삼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는 사이로 삼림욕조와 야외학습장, 지압로 등의 편이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웰빙시대에 이 지방 사람은 물론이고 광주와 목포 등도시민들이 많이 찾아와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100년 이상 된 비자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어 풍치를 더 하고, 나무아래에는 파란 야생 녹차가 즐비하게 널려져 차밭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연초록 여린 차순 사이로 수줍은 봄이 걸어 나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작년에 두 봉 보내준 차가 바로 여기 여린 야생녹차라고 김근이 살짝 귀 뜸해 주었다. 신라 말에 들어 온 차는 사찰의 스님들이 수행의 한 방법으로 인식될 만큼 다선일미(茶禪一味)또는 다선일체(茶禪一體)라 하며 독특한 사찰의 차 문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상업주의에 매몰된 현대인들도 다향으로 마음을 씻고 비운다면 삶이 훨씬 가벼워져 여유로워 질것이라 생각해본다. 속도에 지배당하는 치열한 현실에서 깊은 숲속은 원시의 생명력이 꿈틀대고 응축된 서정이 가득 녹아있는 곳이었다.
경내 넒은 마당에 있는 약수는 한국자연보호협회에서 지정한 우리나라 10대 명수(名水)중에 하나로 꼽히고 미네랄이 풍부하면서 사시사철 일정한 수량을 유지한다고 안내문에 적혀있었다. 바쁜 일정과 지난밤 과다음주로 지친 우리일행은 감로수와 같이 차고 시원한 약수로 먼저 목을 축이고 나서 경내를 두루 살펴보았다.
가지산 남쪽 넓은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보림사(寶林寺)는 신라 원표 대덕에 의하여 창건되고, 그뒤 보조국사 체징이 크게 번창시켰다고 미국 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에 적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삼보림(三寶林)의 유서 깊은 절로,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최초의 가지산문의 종찰 이다. 6.25전쟁과 공비토벌 때 대부분의 목조건물은 전소되고 석탑2기와 석등1기외 부도와 탑비 등 석재유물만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있고 종루, 대적광전, 이층으로 보이는 통층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신라말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하고 있는 석탑과 석등은 국보 제44호로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석등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나란히 서있는 삼층석탑은 구조와 크기가 꼭 같았며, 끗끗한 기백과 안정된 힘이 돋보여 신라예술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3층 석탑 신위의 머리장식이 온전하게 보전되고 있어 신라 탑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석등은 화려하면서 섬세하고 날렵한 세련미가 돋보였다.
그리고 국보 제117호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 불좌상은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 불상으로 대좌와 광배가 없이 불신만 있는 상태이다. 가슴과 몸체는 당당했으나 몸에 비해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전체적인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불상왼팔 뒷면에 신라 헌강왕 2년 (858년)에 무주장사의 부관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작품 년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유행한 철 불상의 첫 번째 작품으로 사료적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이외에도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호인 보조선사 창성탑, 보물 제158호인 보조선사 창성탑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인 사천왕문 등을 두루 살펴보며 불교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었다.
보림사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대적광전이 있고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엄종에서 선종사찰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명산에 명찰에 있다고 했다. 뒤돌아본 보림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탐진 땜의 호수를 배경으로 더욱 절경이 되어 천 년 전에 미리 절터를 잡은 조상들의 선경지명에 경탄할 뿐이다.
탐진강이 흐르는 기름진 들에 득량만의 청정해역을 끼고 있는 이 고장은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일찍이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충절과 의리를 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공업 및 정보화 사회로 이행되면서 도, 농간에 현격한 소득격차를 가져왔다. 여기에 FTA에 협정으로 우리 농촌은 붕괴되기 직전의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재정자립도최하위인 장흥군도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고 있다. 삶은 현실이다. 지금의 일반농업을 친환경 및 유기농으로 전환하여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하고, 전업농 중심으로 규모화와 전문화로 개편을 서둘러야하며, 생산된 물품은 고정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통망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지역 실정에 적합한 산업을 유치하여 고용과 소득을 증대시키고, 뛰어난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소, 돼지, 계란 등을 품질 인증 대상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각고의 노력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린 투어리즘(Green tourism)을 사업과 연계하여 농촌관광소득을 높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허리가 휘어지게 일을 하고도 가난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농민들이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활로를 모색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우리도 뜻을 모아 이들과 함께하는 디딤돌이 되도록 작은 힘을 보태고자 한다. 그리고 시대적 소명의식이 투철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공직자들이 있기에 장흥은 보다 더 살기 좋은 「길이 흥할 고장」이 될 것이다. 부사골 장흥의 넉넉한 인심과 아름다운 풍광을 한 아름 소매에 담고 귀경길을 서둘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