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제28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회
일시: 1995.06.10
공연장소: 서울놀이마당
*내용 봉산탈춤은 해서일대(황해도)에 분포된 탈춤 중의 하나로 19세기 말 이래로 해서(海西)탈춤의 최고봉을 이루고 그 대표격의 놀이였다. 봉산탈춤의 고장인 봉산구읍(鳳山舊邑)은 황주(黃州), 서흥(瑞興), 평산(平山)과 함께 팔역지(八域誌)의 소위 남북직로상(南北直路上)의 주요한 읍(邑)과 장터의 하나였다. 이 고장의 이속(吏屬)들이 대대로 중심이 되어 이 놀이를 이어왔으나 191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군청 등 모든 행정기관이 사리원(沙里院)으로 옮겨가고 경의선(京義線) 철도가 개통되자 약 200여 년 전부터 경수대(競秀臺)에서 놀아오던 이 놀이도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루(景岩樓) 앞 광장에 반원형의 다락을 매고 그 안의 탈판에서 놀게 되었다. 황해도탈춤은 가면, 의상, 무법(舞法) 등 형식적인 면에서와 대사 내용으로 보아 평야지대의 봉산탈춤형과 해안지대의 해주탈춤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현재 남한에서는 강령탈춤이 해주탈춤형의 하나로 봉산탈춤과 함께 황해도탈춤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봉산탈춤은 이북지방의 큰 명절인 단오 날 밤에 주로 연희(演戱)되던 놀이로서, 길놀이와 고사에 이어 제1과장 4상좌(上佐)춤으로 시작되고, 제2과장 팔목중춤의 건무가 있고, 제3과장 사당춤은 사당(社堂)과 거사(居士)의 춤과 노래, 제4과장 노장춤에서 제1경 노장춤은 노장과 소무(小巫)놀이에 이어 제2경 신장수, 제3경 취발이놀이가 있으며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의 양반과 말뚝이놀이, 제7과장 미얄춤의 미얄과 영감, 덜머리집과의 일부처첩(一夫妻妾)의 싸움은 미얄의 죽음으로 끝나고 지노귀굿을 한다. 이 놀이의 마지막 절차로 예전에는 놀이에 쓰던 가면을 불에 태우고 끝냈다. 이 놀이의 주제는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에 공통된 것이다. 단오는 계절적으로 모내기 직전의 한가한 시기요, 이때의 놀이인 봉산탈춤은 곡식의 생장의례(生長儀禮)와 벽사행사(가邪行事)를 겸하고, 또 하지(夏至)의 축제로서 민속적 의의와 종교적 의의가 컸다. 그러나 봉산탈춤은 오늘날 다른 고장의 가면극에 비해 민중오락적 요소가 가장 두드러진 놀이이다. 또 봉산탈춤 대사는 어느 가면극보다도 한시(漢詩)구절의 인용과 패러디(Parody)가 많아 지방 이속들이 이 놀이를 세습적으로 전하여왔음을 짐작케 한다. 그 중에서 취발이와 말뚝이 대사가 가장 흥미롭다. 봉산탈춤에서 사용되는 탈은 팔목중 노장취발이탈과 같은 귀면형의 이른바 목탈이 주요한 배역을 맡고 있다. 목중의 기본 의상은 화려한 더거리에 붉고 푸른 띠를 매며 소매에는 흰 한삼을 달고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웃대님을 맨다. 목중춤은 한삼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혹은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동작의 이른바 깨끼춤이 기본이 되는 건무(健舞)이다. 등장하는 배역수는 34명이 되나 겸용하는 탈이 있으므로 실제로 사용되는 가면수는 27개가 되며 상좌 4개, 목중 8개, 거사 6개, 소무, 노장, 신장수, 원숭이, 취발이, 맏양반, 둘째양반, 도령(道令), 말뚝이, 영감, 미얄, 덜머리집, 남강노인(南江老人), 무당, 사자(獅子)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