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다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기사승인 2024-08-25 13:00:03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를 시작한다. |
곽인옥 교수
inokkwak@hanmail.net
‘고난의 행군’은 지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경제적,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북한의 선전 구호였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할 때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100여일간 행군했던 정신을 이어받자는 구실을 내세운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주민들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죽음의 대가(아사자 300만명 추정)를 통해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 즉 자생적 시장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철저히 통제하는 사회였다. 한 톨의 쌀이라도 국가의 허락 없이 판매할 수 없다. 때문에 국가 배급시스템이 붕괴하면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다.
국가 배급시스템은 평양에서 먼 곳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중앙당 산하 무역회사에서 골동품 장사를 했던 K씨는 함경북도 회령시, 무산시, 온성군을 차를 타고 돌아보게 됐다. 집은 한 집 건너 한 집씩 비어있었다. 배고픔에 탈북을 한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시에서는 기업소 노동자 배급이 한 달에 15일 정도 나오다가 이마저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타격을 받은 사람은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이후에는 탄광 기계를 만드는 공장 기업소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 외에도 하급 공무원, 교수, 교사, 기업소 노동자들이 배급을 준다는 국가의 말을 믿다가 굶어 죽었다.
황해남도 해주시에는 곡창지대라고 불리는 연백평야가 있다. 그곳에 사는 농장원 일부도 국가의 재산, 즉 벼나 옥수수 등 농작물을 훔치지 않고 국가로부터 배급을 기다리다가 굶어 죽어갔다고 한다.
황해북도 사리원역에 사업차 갔던 B씨는 사리원역 주변에 굶어서 죽은 시체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시 인민위원회에서 트럭을 동원해 죽은 사람들을 실어다가 묻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B씨는 그때 비참했다고 했다. 시체는 옷이 벗겨져 있었고,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다. 굶주림이 매우 심하다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옷이나 신발을 가져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총참모부 산하 무역회사 부원인 C씨는 농토산물을 구하려고 평안북도 구장군을 방문해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위원장은 “군내에 아사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는데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서 식량을 가져와 살릴 방법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구장군에서는 한 달에 1000명이 죽어서 뜯어진 쇠문으로 만든 손수레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장례 도구를 사용할 수도 없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C씨는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고난의 행군은 평양시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권력 있는 보위부, 안전부, 검찰소 간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배급 농장에 직접 트럭을 보내 배급을 받아왔다. 이는 일반 인민에게 돌아갈 배급이 모자라는 계기가 됐다. 서성구역, 모란봉구역, 대동강구역, 선교구역 단층집에서는 이 시기에 한 사람이 한 끼에 옥수수 일곱 알씩만 먹으면서 버텼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식량이 없자 노부모님을 방에서 가두고 문을 걸어 닫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비관해 자살한 노부모도 많이 생겼다. 비극은 끝없이 발생했다. 평양시에서 인육을 먹었다가 10명이 총살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평양시 강남군에서 40대 청년이 온 가족이 굶어 죽은 가운데 혼자 살아남았다. 이 청년은 집으로 찾아온 고모를 고깃덩어리로 생각했다. 결국 안전원(경찰)에게 붙잡힌 청년은 선교구역 무진천 뚝방에서 총살을 당했다. 배급이 중단되자 국가만 믿었던 많은 사람이 굶어서 죽어 나갔다.
그 시기에 김정일과 그의 친인척들은 갖가지 상품이 진상되는 선물관을 통해 기름진 음식을 풍족하게 먹었다. 중앙당에 있는 1만5000명 역시 중앙당 공급소를 통해 음식을 공급받아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배고픔을 잘 몰랐다고 한다. 또한 권력 있는 보위부, 안전부, 검찰소 간부 및 직원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배급 농장에 직접 트럭을 보내 배급을 받아 왔고, 만약을 대비해 집에 쌀 20가마니 이상을 쌓아놔 식량난을 겪지 않았다. 그들은 자녀에게 이러한 사실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교육했다.
고난의 행군은 동유럽 민주화 바람과 구소련의 붕괴, 그리고 이에 따른 김일성 부자의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 빚은 최악의 참사였다. 김일성 주석을 모방해 루마니아의 태양으로 추앙받던 차우셰스쿠가 지난 1989년 민중들에 의해 무참히 총살당했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 동유럽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북한에 큰 충격을 줬다. 사회주의국가와의 무역에서 원자재를 공급받는 북한에 시장경제의 원리가 작용하면서 무상원조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충격은 경제 타격으로 변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를 열고 남북정상회담(김영삼-김일성)을 통해 통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통일이 될 거라는 소문이 평양시 전체로 퍼지면서, 평양 시민들은 희망감에 잠 못 이루었다고 한다.
동시에 김일성 주석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간부들에게 또 다른 해결 방안이 있는지 물었다. 누구도 대책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후계자 김정일이 악에 찬 목소리로 “수령님, 핵무기를 만들어 지구를 깨버리겠습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일성 주석은 손뼉을 치며 “박력이 있어서 좋다”고 마무리를 했다.
이후 1994년 7월8일 새벽 2시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정일은 타살 의혹을 받게 됐다. 남북통일을 반대하고 체제 유지를 위해서 핵실험을 단행한 김정일의 행동이 남북정상회담 취소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남과 북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까지 감돌았다. 다행히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전쟁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수많은 인민이 굶주려 죽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와중에 북한 정권은 북한 주민들을 구제하기는커녕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들여 독일에서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 컴퓨터로 수치를 제어하는 기계를 사 왔다. 이는 북한의 핵무기 기술이 완성된 단계까지 이르게 된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