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 외 1편
최휘웅
새벽 4시 10분.
이곳의 여름은 해변의 바람을 부른다. 간밤의 꿈을 털어냈다. 별자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이정표가 아니다. 별 없는 창밖. 하늘의 눈썹도 보이지 않는다. 발을 떼는 순간부터 허공이다. 우리는 땅에 기대어 허공으로 직립한다. 허공을 떠도는 기호들이 자기 공명의 영상을 만든다.
4시 30분. 간편 복장.
어둠이 깔려 있는 거리. 아직 죽지 않은 불빛. 지붕 위의 여자와 사다리를 타는 남자의 위험한 곡예가 잠든 밤. 이월된 문자의 홍수, 헛간의 구호가 폰을 덮고 있다. 볼세비키 혁명은 벌써 오래전에 죽었는데 흑백 이념의 광기는 서로 여전히 새벽이 오면 닭이 울 것이라고 믿는다. 빨간 색이 푸른 등을 밟고 있다. 푸른색이 붉은 가슴을 누른다.
지금 도시는 울어줄 닭이 없다
영하의 진열장에 알몸으로 누워서 절대 울지 않는다.
걷는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투명해진다. 운동화 끝을 눈이 따라간다. 바다를 끼고 가는 길 위에 내가 있다. 바다에 한 발 더 다가왔다고 생각했지만 바다는 늘 멀리 있다. 늘 바다를 보고 있지만 바다는 늘 낯선 행성 어느 지점.
바다 위에 뜬 부표는 검은 과거, 흔들리는 미래. 얼마 남지 않은 나의 현재다. 바다와 겉돌며 걷기를 한다. 바다와 함께 걷고 있다고 착각한다.
5시 10분.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 뛰는 강아지도 있다. 강아지 목줄에 매달리어 가고 있는 여자. 가로등이 고개를 숙이고, 수상한 해바라기. 접시꽃이 덩달아 낯을 붉히는 시간.
과거와 현재가 머릿속에서 나란히. 미래도 잠깐 잠깐 나타났다 지워진다. 등과 앞이 시야에 동시에 들어온다. 많은 내가 나의 영역 밖에서 달린다.
정확하게, 그때 저 멀리 그녀가 나타났다. 다리를 다 들어낸, 순식간에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숨 가쁜 숨소리를 들은 것 같다. 어제도 그제도 그 시간에 그렇게 지나갔다. 앞에서 와서 뒤로 사라진다. 나는 늘 그녀를 기억에서 24시간 까맣게 비운다. 그러나 마주치는 순간 아, 탄성을 목 뒤로 넘김. 양 뒤에 숨은 철의 얼굴 가죽이 지나간다. 그 뒤에 내가 있다. 아니 앞을 보였다가 금방 등을 오랫동안 남긴다.
5시 30분. 뒤에서 달려온 청년이 앞지른다.
경쟁을 한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빠짐. 자꾸 뒤처지는, 유쾌하지 않은 나이를 곱씹으며 반환점을 도는데 해가 반, 반의 원을 내민다, 수평선이 환해지고 있다. 물색 환한 종교가 떴다. 종교는 엄숙하다. 작은 배 한 척이 수평선 끝에서 받들고 있다 나도 언제부턴가 신을 찾고 있었다. 간절한 기도가 저 배 밑에 있다.
죽음을 강탈당한 자가 죽음을 짐 지고 달린다. 골절된 생이 세월의 끝을 당긴다. 죽음이 생을 끌고 간다. 죽음은 생의 구경究竟이다. 드디어 우주의 어두운 내공內空으로 뛰어든다. 꽃 곁에 누워 허공을 보니 허공 또한 나비의 천국이네. 천상의 소리가 내 귀를 덮는다.
나는 난로가 없다.
난로와 함께 한 시간이 없다.
내 곁에는 네가 없다.
너와 함께한 시간도 없다.
고로 나는 비의를 상실한 빈 우주다.
해를 두 손으로 받는 순간, 기억의 울대를 치고 올라온, 멍든 누이의 사과가 공중에 떴다. 귀에 누이의 울음이 벽을 치기 시작했다. 파도는 그렇게 먹먹하다. 먹먹한 산의 능선도 보였다. 기억은 부재하는 현재의 연속. 기억은 현재를 계속 삼키고 있다. 저 멀리 소나무 몇 그루가 걸어온다. 그리고 지나갔다. 과거의 귀퉁이에 둥지를 튼다.
5시 50분 웬 중년이 황급히 내 앞에서 몸을 돌려 달려간다.
무엇을 놓치고 온 것일까 해를 등지고 가는 뒤 꼭지에 안개 한 가닥 서렸다. 안개에 갇힌 눈, 잃어버린, 허전한 빈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다. 곱셈에서 제로는 영원한 제로다. 아무리 곱하고 곱해도 제로다. 나는 제로 지점에서 곱셈을 열심히 하고 있다.
여명의 숨소리에 귀를 바짝 대고, 나는 수평선 이쪽에 있지만 늘 저쪽에 빨대를 대고 있다. 빨대는 물 한 모금 건지지 못한다. 수평선 저쪽에는 육중한 코끼리가. 꿈만 먹고 사는 사슴도, 아니 악마의 수염이 있을지도 모른다. 수평선은 언제쯤 이 막막함을 내려놓을지 모르겠다. 흰 이가 밀려온다. 무게 중심이 자꾸 한쪽으로 기운다.
6시 30분. 시인의 방,
그 시간, 그 문을 통과하는 중.
시는 연필 깎을 준비운동만 한다.
발음하지 못한 음계가 목에 걸려 있다.
동창이 밝았는데 노고지리는 울지 않는다. 그래도 시 한 줄 눈 뜨기를 기다린다. 창을 열었다. 바다 건너서 아침이 들어왔다. 몸과 분리된 빛 뒤에 바다가 있다. 8월이 발정하기 직전이다. 뚜껑 열린 하루가 또 시작한다. 견자의 몫을 위하여 하루는 저승 문턱까지 가서 싸늘한 저녁상을 차릴 것이다.
무명無明의 시간,
시는? 글쎄.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사실 시는 없다. 그것을 나는 매일 인정하지 않는다. 시를 죽이는 언어의 광기가 시라고 착각한다. 원본을 상실한 이미지들이 떠도는 노트 북. 자판을 두드리며 시가 발화하기를 기다리지만 거기에 꽃은 없다. 꿈꾸는 자 자멸하리라. 무지개는 서산을 넘는 순간 없었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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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찾아서
나는 늘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고로 나는 바깥에 존재한다
혼외자
도시의 변두리에서
완전을 꿈꾸는 불완전 명사
알리바이 뒤에 숨어
완전 범죄를 시도하지만
사과나무도 없는데 사과를 기다린다
나는 나를 더빙하기 바쁘다
변조된 내가 나의 영역 밖에서
배역에 맞지 않는 넥타이를 맨다
입을 가린 눈의 광란
이상한 가역반응이 나를 분해하고
색의 무장해제
생각의 에키스를 모아
나를 다시 구성한다
생각은 나무의 몸통을 지나
강물 저쪽으로 흘러가고
말은 그림자다
말 뒤에
스케치만 남은 하루, 한 달, 한평생
눈을 닫으니 귀가 열린다
소리가 청각 주변에 닻을 내린다
녹슨 나뭇잎 소리가 가시를 키울 때
폭죽이 터졌다
갑자기 환해진 그늘
빛의 발밑에서 추위가 떤다
별은 로맨틱하다
그런데 지구는 동상에 걸려 있다
그녀가 등을 보인 자리만 로맨틱하다
시간은 늘 허공
허공을 채우기 위하여
나는 생각 오려붙이기를 한다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알리바이가 없으면 나는 허상
존재를 흔드는 기호의 충동
전복의 쾌락과 쾌락의 고통 속에서
나는 찬란한 구토를 한다
최휘웅
1944년 충남 예산 출생으로 1982년 월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와의식, 절대시, 시21 동인활동을 하였으며 계간 『시와사상』 편집인, 『부산시인』 주간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지하에 갇힌 앵무새의 혀』, 『카인의 의심』, 『녹색화면』, 『사막의 도시』, 『하얀 얼음의 도시』, 『환상도시』. 평론집 『억압.꿈.해방.자유.상상력』 등이 있다. 동아문인상, 부산시인협회상 본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