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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遼東)을 찾아서
-장군 이성계(李成桂)는 요동(遼東)을 정벌하라!!
1.
이전의 글을 통해 남만주(南滿洲)의 역사강역을 찾아보았다. 남만주가 밝혀지면서 드디어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 이전 고조선(古朝鮮)과 부여(扶餘)로부터 이어지는 조선민족의 요동(遼東)땅에서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정확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사오천년의 백두산(白頭山)을 찾아내고 다시 청산리(靑山里)전투의 전장(戰場)을 고찰하며 북만주(北滿洲)를 고증해 내고, 다시 남만주(南滿洲)의 강역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를 통해, 현 반도위쪽의 만주(滿洲)라는 이동된 지명에서 요녕성(遼寧省)은 대륙 남만주(南滿洲)의 일이요,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은 북만주(北滿洲)의 일임을 분석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심양(瀋陽-봉천-묵덴)은 남만주 강역에서 찾아야 할 일이고, 하얼빈과 장춘(長春)은 북만주(北滿洲)에서 찾아야 할 사항이 되는데, 이중 장춘(長春)에 대한 조선독립군 지복영(1920-2007)여사의 회고록을 보면, 장춘은 심양(瀋陽)에서 멀지 않은 남만주의 어느 지역으로 묘사되는데, 일제가 세운 만주괴뢰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장춘에 대한 부분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우리 역사서에 보면 고조선(古朝鮮)이래로 끊임없이 요동(遼東)에 대한 쟁탈전이 묘사되어 나온다. 유사이래(有史以來)로 강역의 쟁탈전은 바로 경제(經濟) 즉 부(富)와 관련이 있었음은 고금(古今)의 진리다.
또한 고조선이래로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민족사에서 요동지역에서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은 바로 요동이 천부(天府)의 땅으로 이 지역을 지배한 자는 천하(天下)를 지배할 수 있는 풍부한 재물(財物)이 나왔기에 가능했던 일임을 분석해 낼 수 있다.
현 반도위쪽의 지명이동된 요동(遼東)이 아니라 현 대륙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북쪽의 거대한 평야지대를 바라보면 왜 천부(天府)라 하는지, 왜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을 목숨을 걸고 지켜내며 광대한 역사를 이어왔는지가 명확히 설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정조(正祖)대왕이 말한 전유대동(全有大東)이 그 역사적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현 신강(新彊)지역인 천산(天山)북쪽의 거대한 평야지대를 조선(朝鮮)민족이 영유해 왔음을 고증해 내야 하고, 이를 통해 영국인 헨리 율(Henry Yule,1820-1889)이 기록한 이마우스(IMAUS)의 동쪽에 중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바로 조선(朝鮮)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우리는 당당히 밝혀내야 한다.
2
14세기 중엽 원(元)나라가 쇠퇴하고, 명(明)이 건국되어 힘을 키워 나갔다. 당시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반원(反元)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고, 공민왕은 명(明)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으로 쫓겨 가는 북원(北元)에 공동대응하려 하였다.
명(明)이 원(元)나라 세력을 밀어내고 요동(遼東)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감에 따라 고려(高麗)와의 우호적 관계에 마찰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친명(親明)성향의 공민왕(恭愍王,1330-1374)이 시해되고, 우왕(禑王,1365-1390)을 즉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李仁任,?-1388)이 명(明),원(元)과의 이중 외교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명(明)은 고려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1387년(우왕 13년) 명(明)이 요동에 남아있던 북원(北元)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듬해 명(明)은 철령(鐵嶺)이북의 땅을 요동에 귀속시키고,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직접통치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철령(鐵嶺)이북의 땅은 원(元) 시기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었다가 공민왕때(1356년) 수복한 지역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 우왕(禑王)은 주원장(朱元璋)이 철령(鐵嶺) 이북땅을 빼앗고자 하므로 노하여 최영(崔瑩)과 더불어 비밀리에 의론하고 명(明)을 치고자 했다.
이에 서해도(西海島)에 팔도의 군사를 모아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니 좌군에는 심덕부(沈德符), 이무(李茂), 박위(朴葳),최운해(崔雲海) 등이 따르고 우군에는 정지(鄭地),지용기(池湧奇),배극렴(裵克廉), 이두란(李豆蘭) 등이 따랐다.
좌우군이 모두 3만8천830명 군속이 1만1천600여명이며 말이 2만1천여 필이었다. 이를 10만군이라 하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어 무기와 식량을 운반하였다.
우왕과 최영(崔瑩)은 서경(西京)에 주둔하면서 진군하는 군사를 통제했다.
고려의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니 큰비가 쏟아져서 진창에 무릎이 빠지며 전염병이 돌아 사람과 말이 많이 죽었다. 이에 좌우군이 글을 올려 군사를 돌릴 것을 청했으나 우왕(禑王)은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환관 김완(金完)을 보내 진격하라고 다그쳤으며 최영(崔瑩)은 북원(北元)과 요동을 함께 공격하고자 하여 배후(裵厚)를 북원에 보냈다
이성계는 군사들에게 이익과 손해를 잘 타일러 군사를 돌이켰고, 우왕(禑王)이 이를 듣고 샛길을 거쳐 개경(開京)에 돌아왔다. 좌우군이 이를 추격하여 개경에 이르러 최영(崔瑩)의 군사를 무찌르고 최영을 유배시켰으며 또 우왕을 폐하고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위에 앉혔다. 그 후 또 창왕(昌王)을 폐하고 종실인 용(瑤)를 세웠는데 이분이 바로 공양왕(恭讓王)이다.
명사(明史)에서는 이성계가 군대를 후퇴시키니 우왕이 노하여 이성계의 아들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역사의 기록은 이로인해 천부(天府)의 땅 요동(遼東)이 명(明)의 주원장에게 넘어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3.
이전의 글에서 영국인 신부(神父)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1829–1890)의 1870년에 출판된 <Journeys in north China>중 남만주(南滿洲-Southern Manchuria)에 대한 기록을 일부 살펴보았다.
그의 글 중 아래의 글이 남만주(南滿洲)에 대한 지형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할 수 있다.
<Southern Manchuria may be divided into two distinct regions, the one a plain, and the other an elevated country full of high mountains.>
남만주는 두 개의 뚜렷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평원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산으로 가득한 고지대이다.
이를 남만주로 고증한 현 천산(天山)북쪽의 요동벌을 지도로 보면 다음과 같다.
명확히 알렉산더 윌리암슨의 기록대로 평원과 고산지대로 뚜렸하게 나누어짐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천산(天山)의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융빙수를 관개(灌漑)수로(水路)를 통해 작물을 재배하는 기술이 이미 2천년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우리 조선민족의 창의성에 기반했음을 우리는 남만주(南滿洲)를 고증해 냄으로써 슬기로운 선조의 유지(遺址)를 찾아내게 되었다.
가뭄과 한발의 피해가 전혀 없는 천부(天府)의 요동 천리(千里)벌판이다.
지금은 사막화가 진행되어 많은 부분이 사막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가로 500km, 세로 70-90km의 거대한 경작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보고 구한말(舊韓末) 조선(朝鮮)과 만주(滿洲)를 방문했던 서양인들은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무진장 발전가능성이 있는 남북만주에 주목하며 찬사를 보냈던 것이고, 러시아는 이 남만주(南滿洲)에 철도를 놓아, 풍요로운 동방 제국에 대한 구애(求愛)의 손짓을 보낸 것이다.
북경(北京)의 추운 겨울밤에도 화롯불 하나에 의지하면서 얼어붙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조선의 웅대한 민족혼을 되살리려 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바로 이 남만주(南滿洲) 요동의 동쪽 끝에 있는 만번한(滿番汗)을 찾아 상고(上古)역사의 올바른 강역을 갈무리 했던 것이고, 간교한 일제와 친일파는 그 강대한 남만주의 역사를 반도 위쪽의 축소되고 척박한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일부의 일로 조작해 버렸다.
바로 단재(丹齋)가 밝힌 상고역사의 강역을 천산(天山)이북에서 백두산까지로 이어지는 천리벌 요동평야 남만주로 옮겨 고증(考證)을 해 가게 되면, 모든 것이 확연해 지고, 북방기마민족의 후예인 우리 조선민족에 깃들인 영혼은 수천리를 날아 강역을 개척하고 만들어왔음을 온 몸으로 전율하게 된다
현 감숙성(甘肅省) 기련산(祁連山)의 아래 서녕(西寧)지구에 위치했던 진(秦)나라의 시황(始皇)이 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는가의 문제는 흉노(匈奴)때문이 아니라 바로 남만주(南滿洲)의 경계인 현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북쪽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부여(扶餘)의 남하를 막기 위해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판축(板築)공법을 이용해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장성(長城)을 쌓아 대비했음을 간파해 낼 수 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조선민족의 상고(上古)역사는 이 천리평야 요동(遼東)에 대한 강고한 점유를 통해 그 부(富)를 버팀목 삼아 나라를 경영해 왔고, 간간히 한족(漢族)에게 요동(遼東)의 점유권을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징기스칸의 원(元)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발해(渤海)를 이어 고려(高麗)의 패권앞에 다스려졌던 강역이었다.
이성계가 정말 반역(反逆)을 통해 정권을 잡기 위해 천혜의 요동(遼東)을 포기하고 주원장(朱元璋)에게 넘겨버렸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우리가 보는 모든 사서(史書)는 현재의 친일식민강단사학의 관점대로 명기되어 있으니, 강역의 고증을 통해 역(逆)으로 되짚어 가며 밝힐 수밖에 없는 일인데 이는 올바른 역사의 강역이 확정되면 사서(史書)의 잘못된 또는 교열된 강역사를 정확히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4.
요동(遼東)과 관련된 글들을 몇 가지 모아 살펴보면 이 글속에 나와 있는 지명들의 연계성이 명확히 설명되며, 한족(漢族)의 터전인 현 감숙성 기련산(祁連山)을 중심으로 한 강역사(疆域史)와 또한 면밀하게 연계되어 고찰(考察) 되어진다.
①백두산기(白頭山記)-석지탁(釋知濯)
白頭西南 則直遼東右北平
백두산 서남(西南)쪽은 요동(遼東) 우북평(右北平)이다.
→위 지도에 표시된 현 탑성(塔城-타청Tacheng)지역으로 비정된다.
②송서(宋書)는 남조(南朝)의 네 왕조 가운데 하나인 송나라의 정사(正史)를 담은 책 으로 심약(沈約,441-513)이 편찬한 사서다.
"百濟國은 본래 고려(高句麗)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1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遼西를 공략하여 소유 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晉平郡,진평현)이라 하였다“
→요동동쪽 1천리가 맞다면 사막의 한복판이 되니 이는 잘못된 기록이거나 반도에 맞춘 후세 교열된 기록이다.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본다면 2천리가 되어야 타당하다.
③魏나라의 장수 劉盺(유흔), 劉茂, 궁준 등이 의거하고 있던 낙랑(樂浪),대방(帶方)은 요동의 낙랑, 대방인 동시에, 고이왕(古爾王)이 쳐들어갔던 樂浪도 遼東의 樂浪이 니, 이는 대개 百濟의 해외발전의 처음일 것이다.(신채호-조선상고문화사)
→낙랑과 대방의 위치가 위 지도상 천산(天山)이북의 요동평야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기 록한 글이다.
④管子에서의 秦夏와 東國通鑑에서의 秦韓은 다 辰韓의 先代인데, 辰韓은 양국이 연합하기 이전의 독립적인 이름이고, 說文의 樂浪潘國(낙랑번국)과 漢書地理志의 遼東番汗縣(요동번한현)과 新唐書 渤海傳의 海北卞韓은 다 卞韓의 옛터이니 卞韓 도 양국이 연합하기 이전의 독립적인 이름이다.(신채호-조선상고문화사)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요동군현 내에 汶,番汗이란 두 縣이 있는바. 滿番汗은 곧 汶, 番汗이며, 따라서 滿番汗은 지금의 海城, 개평 등지의 부근이 될 것이다.(신채호-조 선상고사)
→변한과 만번한도 모두 요동땅 즉 지금의 천산이북 천리평야에 있었다는 글이다.
⑤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이니, 漢書地理志의 요동군 險瀆縣(험독현) 이 그곳이다.(신채호-조선상고사)
→왕검성(王儉城)의 위치가 천산이북의 복된 터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⑥예(濊)의 임금 南閭(남려)가 衛氏(위씨)의 침략에 노했으나, 능히 적을 막아내지 못 하여 남녀 백성28만을 이끌고, 요동을 지나 支那 漢땅에 이르러 한의 지경안에 속할 것을 청하였다.(신단민사-김교헌)
→예족(濊族)백성이 현 천산이북의 천리평야를 종단하여 동남으로 내려가 현 기련산(祁連 山)의 서쪽 즉 산서(山西)에 도착하여 한족(漢族)의 강역으로 이동했음을 말하고 있다.
⑦고구려가 發岐(발기)의 난을 겪으면서 요동을 잃어버리고 나라의 힘이 이미 쇠약 해지자 鮮卑는 드디어 고구려를 배반하고 떨어져 나가서 漢에 붙었다.(신채호-조선 상고사)
→발기태자의 동생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179-197)이 임금이 되어 발기가 반란을 일으 킨 일이다. 요동을 잃어 풍부한 재화의 산출지를 빼앗겨 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니 선비 가 배반한 일을 말하고 있다
⑧秦나라는 대군을 보내 연나라 수도인 薊(계)를 공격했다. 燕王일행은 요동으로 달 아났지만, 진나라는 공격의 손을 늦추지 않았다. 연왕은 태자 단을 목베어 그 목 을 秦始皇에게 바쳤다. (중국의 역사3-진순신)
→연나라는 진(秦)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다. 따라서 현 서녕(西寧)을 진 (秦)나라의 중심으로 보았을 때 현 주천(酒泉) 이서(以西)에 연나라가 존재했다고 보아 야 한다. 진(秦)나라가 서정(西征)을 하니, 연왕(燕王)은 서북쪽 요동으로 달아난 것을 설명하고 있다.
⑨사기(史記)
漢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지방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요동과 고조선의 경계로 삼았다고 적었다.
요동(遼東) 험독현(險瀆縣)에 조선왕의 옛 도읍이 있다. 昌黎(창려)에 험독현(險瀆 縣)이 있다.
→험독현은 지금의 우루무치(烏魯木齊)근방이 되어야 타당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 는 터전은 일단 사통팔달(四通八達)과 먹거리가 풍부한 지역의 중심이어야 한다. 왕검 성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
5.
이성계에 대한 고려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장군의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대한 명령은, 바로 천부(天府)의 곡창지대이자 북만주(北滿洲)와 남만주(南滿洲)를 이어주는 중간지대 그리고 조선의 북방과 우랄산 동쪽지역 수많은 부족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오는 많은 부족들이 조선민족과 한족(漢族)의 강역으로 이동하는 주요도로상에 위치하는 전략적 중요지역(거점)에 대한 강역확보를 하고자 함에 있었던 것이고 또한 유사이래(有史以來) 우리 조선(朝鮮)민족의 선조들이 경영해온 민족(民族)의 터전이었기에 이를 확보하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명장 이성계(李成桂)는 얼토당토 않은 불가론을 내세워 회군(回軍)을 하고 말았을까? 알수 없는 일이다.
다음 글에서는 청(淸)의 초기 수도인 묵덴 즉 심양(瀋陽)을 찾아보고 북위(北魏)가 만든 것으로 둔갑된 돈황(敦煌)을 살펴보겠다. 발해(渤海)의 심주(瀋州)였던 심양(瀋陽)에서 돈황까지는 약700km다. 북방 유목민족(遊牧民族)에게 있어 그리 먼 거리는 아니고, 또한 현재 출판되어 있는 돈황(敦煌)의 도록(圖錄)을 보면 너무나 황홀하고 놀라우며, 고구려(高句麗)의 향취가 물씬 풍겨나옴을 느낄 수 있다.
돈황 막고굴(莫古窟)이 만들어질 시기 고구려(高句麗)는 소수림왕(小獸林王,340-384),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4-412), 장수왕(長壽王,394-491)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의 강력한 시대였다.
2023.02.16.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성계 장군이 요동정벌을 하지 않고,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는데,
위화도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
사이트 동영상에서 배운 위화도의 위치는 황하의 상류, 삼수갑산 주변으로 들은 듯 합니다.
현재의 강단사학에선 압록강변 모래섬을 위화도로 지정 하고 있어서, 압록강과 관련 있는지 여쭙습니다.
남만주의 요동강역이 확정되어 역고증을 통해 밝혀야 할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려 북극으로 들어가는 압록강은 만주인들에 의해 얄루강이라 불리웠습니다. 만약 역사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고 고찰해 간다면, 위화도는 신강북부 포이진(의주)의 아래쪽 현재 사라진 요하와 만나는 두물머리 어디쯤 상정할수 있지 않을런지요? 어려운 부분입니다.하지만 요동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위화도 이야기는 반도에 맞추어 만들어낸 가공의 소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송계 좋은 자료들과 글들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 실로 감당이 안 되네요. ㅎㅎ..
기록에 따라 고증해 가야 하니..우리의 세뇌된 생각을 버리면 오히려 쉬울것입니다.
남만주(南滿洲-Southern Manchuria)에 대한 기록 인용 부준으로 chat gpt에게 이러한 지형이 지금 만주에 존재하는가? 물어봄
==>그렇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이 그의 책 "중국 북부의 여행"에서 묘사한 지형은 오늘날 만주에 여전히 존재한다. 랴오둥 반도(, )는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랴오닝성과 지린성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윌리엄슨이 그의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개의 뚜렷한 지형적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평야지대는 반도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토양으로 비교적 평탄하다. 반면 고지대는 한반도 북부에 위치해 험준한 지형과 높은 산, 깊은 계곡이 특징이다. 이 지역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며 창바이 산맥 국립 자연 보호 구역과 장광차이 산맥과 같은 많은 경치 좋은 지역들의 본거지이다.
남부 만주의 물리적 특징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지 지역은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고가 지역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천연 방어와 자원을 제공했다. 고지대의 험준한 지형은 또한 교통을 어렵게 했고, 이것은 그 지역이 중국의 나머지 지역들로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원인이 되었다.
재밌군요. 챗이 이재명이 대통령이라고 하고 윤석열이 대통령이라고도 하고..결국 설정값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니. 지명의 이동이라는 설정값이 주어지면...아마 제대로 분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간의 내용들을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들이 많네요, 수고에 감사합니다.
진실에 눈뜨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