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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에 이르자 스물네 용사는 즉시 칼을 빼서 손님들을 살상하며 외쳤습니다.
“고구려군사 십만 명이 이 성으로 들이닥치고 있다! 수많은 고구려 군사들이 성중으로 잠입했다!”
태수의 생일연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성안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십사 전사는 성문으로 달려가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을 무찌르고 성문을 열었습니다.
그 때 마침 개백현성에 당도한 을밀의 오천 수군은 물밀 듯이 성안으로 들어가 성을 점령하고 옥을 부수며 한주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한주는 이미 감옥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어머나! 벌써 사형당하고 만 건가요?”
태평공주가 놀라서 소리쳤다.
사비우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개백현성을 점령한 을밀은 스물 네 전사로 하여금 한주를 찾게 하는 한편 여세를 몰아 한수漢水(한강) 부근의 여러 성을 공략했습니다.
스물 네 전사들이 감옥 안의 사람들을 풀어주며 물었습니다.
“한주는 어찌 되었소?”
“옥리가 와서 데리고 나갔는데,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소.”
소스라치게 놀란 스물네 전사는 옥리를 결박하고 추궁하니 그녀를 놓아주었다고 대답합니다.
“실은, 자색이 곱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한주의 꽃다운 청춘이 너무 가련하고 애석하게 생각되어, 소인이 그녀를 몰래 탈옥시켰습니다.”
“한주는 어디로 갔소?”
“그건 소인도 모르옵니다.”
스물네 용사가 한주의 집을 찾아가보았습니다. 한주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한주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집에서 몸을 씻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구출하러 왔소. 어서 우리를 따라 갑시다.”
스물네 동지들의 말에 한주가 물기 젖은 눈으로 물었습니다.
“장사壯士들은 누구십니까?”
“우린 고려 군사들이오.”
“안장태왕께서 친히 오셨는가요?”
“아니오. 우리가 먼저 이곳을 점령하면 그분은 육로로 오시기로 했소.”
“그러면 행주산으로 올라가 즉시 봉화를 올리십시오.”
“무슨 말이오? 봉화를 올려 백제 군사를 부르라는 뜻이오?”
“그런 게 아니옵니다. 봉화를 올리면, 태왕께서 틀림없이 계백현이 고려군에 의해 위험에 빠진 것을 아시고 개백현으로 달려오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한주는 고려군 스물네 전사를 인도해 행주산 꼭대기로 가서 봉홧불을 올렸습니다.
그 때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하던 고구려 안장태왕은 개백현의 산에서 봉홧불이 오르는 것을 보고 곁의 장수들에게 물었습니다.
“저곳은 개백현성이 틀림없는데, 봉홧불은 개백현이 위험에 빠졌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닌가?”
“그런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대군이 오기 전 우리가 속히 가서 저곳을 점령해야 하겠소.”
안장태왕이 개백현에 도착해 보니, 그들을 맞은 것은 백제군이 아니라 고구려군사였습니다. 안장태왕이 한주를 만나니, 한주는 그 동안에 받은 고통을 생각하며 슬픔에 겨워 눈물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한주가 엎드려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리웠던 낭군님, 어찌하여 이제 오시나이까?”
“이제라도 왔으니 내가 그대를 만나게 되지 않았소?”
“한 발만 늦었더라도 하마터면 소녀는 황천객이 될 뻔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안장태왕이 말했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어여삐 여겨 그대를 살렸구려. 이제 함께 고려 황성으로 가서 백년해로 합시다.”
그러나 백년해로하자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어머나!”
태평공주가 다시 한 번 놀라며 물었다.
“혹시 안장태왕이 한주를 속였나요?”
그렇게 물은 후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가 중얼거렸다.
“천하에 몹쓸 남자 같으니라고.”
“아, 그게 아닙니다.”
사비우가 부인하며 고조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조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사비우를 대신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두 분은 혼인했으나 안장태왕은 그로부터 8년 후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그 분의 동생의 측근들이, 그가 백제의 딸과 혼인한 것 등 여러 가지에 불만을 품고 안장태왕을 제거한 후 그의 동생 고보연(안원왕, 재위 531-545)을 왕으로 옹립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백제의 자객에게 시해 당했다는 항간의 전언傳言도 있습니다.
“을밀이라는 장군과 안학공주의 혼사는 약속대로 이루어졌나요?”
태평공주가 고조영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자, 훗날 을밀이 반역을 일으켜 안장태왕을 죽이고 그의 동생을 왕으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그리 신빙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비우와 조영이 입을 다물자 모든 사람이 박수로써 화답하며 한 마디씩 건네었다.
“나는 사비우 장군이 이토록 기억력과 입담이 좋은 줄 오늘 처음 알았소.”
“평소 여자 앞에서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비우 장군이, 오늘은 웬일로 청산유수요?”
“사비우 장군은 무예에만 능한 줄 알았더니, 말로 사람을 녹이는 기술도 갖췄구려. 그 동안 자신을 깊이 감추고 내숭을 떤 것 아니오?”
“이 얘기는 한주라는 여인의 절개를 찬미하고 있으나, 그 배경에는 우리 삼한三韓(고구려, 백제, 신라도 당대에는 ‘삼한’이라 지칭되었음)의 백성들이 서로를 원수로 삼았던 참혹한 이야기가 깔려 있습니다.”
고조영이 같은 조선백성인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을 염두에 두고 탄식조로 말한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인 하나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민을 살상하니, 이래저래 슬픈 건 백성들이군요. 안장왕이 일찍 죽은 게 어찌 보면, 하늘의 심판 같기도 해요.”
이루하가 입을 열어 말하며 은근한 눈길로 고조영을 쳐다보았다.
“여인 쪽에서 보여준 일면은 애절한 정절의 미담이지만, 남자 측에서 드러낸 다른 한 면은 참혹한 전쟁의 추설醜說이라. 상극相剋이 내재한 이야기로군.”
무 태후가 입을 열어 말했다.
“하지만 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용기를 보여준 것은, 상찬할 만한 남아대장부의 신의가 아닐까요?”
태평공주가 무 태후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이 이야기는 일견 쉽고 재미있지만 참으로 난해합니다. 안장왕은 신의를 지켰으나 신의를 위해 이웃나라를 침략해야 했다는 사실, 한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안장태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또 일편단심 정절을 고수했으나, 그것을 위해 자기 백성을 버리고 적국의 군사를 끌어들여야 했다는 사실 등이 서로 모순을 이루고 있는 어려운 사건입니다.”
연헌성의 분석이다.
“만일 아가씨가 안장태자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뜻 밖에도 이단이 여미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저 같으면, 아마도 보위를 버리고 평민이 되어 적국인 백제에 들어가 한주와 혼인하든지,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간 즉시 한주와 그 부모를 남몰래 고구려로 데려오든지 했을 거예요.”
“안장태자가 보위를 버리고 한주에게 갔더라도 한주가 반갑게 맞았을까?”
이번에는 태평공주가 물었다.
'“그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고조영은 이 이야기를 사비우의 입으로 들으면서 속으로 깊은 번민에 싸여있었다. 그는 가끔 안장왕과 한주의 입장을 곱씹으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곤 했었다.
‘조국과 백성을 위해 태평공주의 잘못된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효도를 위해 조부님이 정해준 짝을 맞아들여야 하는가, 혹은 나를 그토록 사모하고 있는 이루하와 결혼해야 하는가?’
조영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태평공주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는데, 그 때 우연히도 태평공주가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얘기를 놓고 벌이던 갑론을박은, 이단의 제의로 끊어졌다.
“자, 우리 이럴 게 아니라, 각자가 짤막한 옛이야기를 하나씩 하기로 하고, 그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얘기를 뽑아 상을 주면 어떻소?”
이단이 말을 맺으며 무 태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도 좋겠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제외한 타인들에게 점수를 매겨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자가 상을 받는 걸로 하지.”
무 태후의 의견이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심기일전해 각자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회상하느라 좌중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지금까지 좌중에서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던 연헌성이 입을 열었다.
“나도 명색이 고려 출신인데, 고려 이야기 하나쯤은 해야 될 것 같소. 이 이야기는 고려인들이라면 죄다 알고 있는 유명한 사실이고, 일어난 지 불과 백여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도 사랑이야기인가요?”
태평공주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비우 장군의 이야기만큼 감동적이지 않을지 모르나, 이것도 역시 과연 사실일까 의심될 정도로 대단히 파격적이고 흥미로운데요,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부터 백여 년 전 고려 도성 평양에 온달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온달은 눈이 먼 늙으신 어머니와 단 둘이 지내고 있었는데, 무척 가난해서 밥을 빌어다가 노모를 먹이곤 했습니다. 그는 평소 말이 없고, 하는 행동도 바보 같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천대하고 멸시했으나 온달은 언제나 화도 내지 않고 사람들의 놀림을 그저 듣는 척 마는 척하며 온화하게 웃곤 했습니다. 얼굴도 아주 이상하게 못생겨서 그는 더욱 주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온달에게 이런 저런 특이한 면이 있었던지, 온달 이야기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으로 퍼져 도성 안에서 온달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고구려 임금은 평원왕平原王(재위 559-590)이었는데요, 그에게 평강공주平岡公主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 공주가 어릴 때 울기를 잘하므로 평원왕은 그녀를 달래고자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오냐, 오냐. 우리 공주 이쁘지? 어서 울음을 뚝 그쳐라.”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평원왕은 이렇게 위협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울기를 좋아하면 후제 네가 컸을 때 너를 귀한 집에 시집보내지 않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버릴 터다. 그러니 어서 뚝 그쳐라.”
공주가 울 때마다 바보 온달 운운하며 공주를 을러대자, 하루는 공주가 울음을 뚝 그치고 물었습니다.
“아빠, 바보 온달이 누구예요?”
“응, 바보 온달은 저기 가난한 마을에 사는 소년인데, 하도 멍청해서 사람들이 놀려대도 똑바르게 항변 한 번 할 줄 모르고 그저 실실 웃기만 할 뿐만 아니라, 일도 할 줄 몰라, 늘 밥을 빌어먹어 앞 못 보는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한단다.”
“바보 온달은 어떻게 생겼어요?”
“응, 얼굴도 울퉁불퉁하고 못생겼단다.”
“바보 온달은 효자예요?”
“응? 응, 그래, 효자인 것 같구나.”
평원왕은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바보 온달은 착해요?”
“응? 허허허허! 그래 우리 공주가 이렇게 총명하구나. 착하니까, 늙으신 봉사 어머니를 봉양하겠지?”
그 후 공주가 울 때마다 평원왕이 바보 온달 운운하면 신기하게도 공주는 울음을 딱 그치곤 했습니다.
신통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왕은 공주가 울라치면 언제나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 버릴 것이니 울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조금 장성한 후 공주가 바깥출입을 하게 되자 어느 날 공주는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가, 사람들에게 물어서 바보 온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바보 온달의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었는데, 바보 온달은 어디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강공주는 보자기에 싸온 떡과 과일을 허술한 싸리 대문 앞에 슬그머니 놓아두고 나왔습니다.
하루는 공주가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누군가를 놀려대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이 “바보온달! 바보온달!” 하며 외쳐대는 것이었습니다. 바보 온달이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멀찍이서 바보 온달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입은 옷은 지극히 남루했으나 얼굴은 참 착하고 정직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지저분하지도 않고 그리 못생겨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바보 온달은 그 얼굴에 웃음을 띠고 아이들이 놀려대도 들은 척 만 척하며 사라져갔습니다.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월이 유수 같아, 어느 덧 평강공주는 장성해 시집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임금은 평강공주를 왕족인 고高씨 가문에 출가시키려 했습니다.
그러자 평강공주가 거부하며 말했습니다.
“아바마마, 소녀는 따로 맘에 정해둔 낭군이 있사옵니다.”
“오, 그래? 우리 공주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간 행운의 청년은, 어느 고관 댁의 헌헌장부인고?”
“그는 바보 온달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딸의 말에 평원왕은 일순,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너 지금 바보 온달이라고 했느냐?”
“네, 그렇사옵니다.”
평강공주가 총기 번득이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대답했습니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평원왕이 얼굴이 노기를 띠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아바마마, 노여움을 푸시고 잠깐 제 말씀을 들으소서.”
평강공주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습니다.
“부왕께서는 소녀가 어렸을 적부터 늘 저더러 말씀하시기를, 바보 온달에게로 시집보낸다 하셨사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니 된다 하시오면, 아바마마의 그 말씀은 모두 거짓이었사옵니까?”
기가 막힌 평원왕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딸을 노려보았습니다. 딸이 정신 이상에 걸린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일부러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 반항하고 있는가 등등 잡다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건, 내가 너를 달래기 위해서 겁주고자 한 말인데, 어찌 그것을 진심으로 들었단 말이냐?”
“아바마마, 소녀는 늘 사람이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아바마마께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사옵니다. 그런데 그 말씀만은 진심이 아니고 거짓이었단 말입니까?”
잠자코 있던 평원왕이 목소리를 낮추어 천천히 말했습니다.
“너는 만승천자萬乘天子의 딸이 아니냐? 만승천자의 딸이 어찌 한낱 거지에게 시집을 간단 말이냐?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아바마마, 바보 온달 같은 필부도 거짓을 몰라, 빌어먹을지언정 남을 속여먹지 않는다 했는데, 하물며 아바마마는 어찌 만승천자로서 거짓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공주의 당돌한 말에 크게 당황한 평원왕은 한편으로 공주가 이토록 당당하고 대담한 아이로 장성했나 하는 생각에 공주의 얼굴을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공주가 얼굴에 의연한 기색을 가득 담고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갈 것입니다. 그러니 아바마마께서 저를 말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녀의 단호한 말에 평원왕은 아연실색하다가 위협했습니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공주는 굳은 결의를 보이며 대꾸했습니다.
“소녀는 죽어도 바보 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
홧김에 평원왕이 소리쳤습니다.
“네 이년! 너는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다. 즉시 궁을 나가 내 눈 앞에서 보이지 말렷다!”
평강공주는 그 길로 집을 나왔습니다. 그녀가 궁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금팔찌 수십 개를 챙겨가지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녀는 온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예전에 보던 것처럼 바람이 집안으로 숭숭 들어갈 만큼 벽이 다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온달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의 눈 먼 노모만 있었습니다. 그 앞에 절하며 공주가 물었습니다.
“온달은 어디에 갔어요?”
눈 먼 노모였으나 청각과 후각은 몹시도 예민해 노모는 공주에게서 고귀한 향내가 나고, 공주의 목소리가 매우 아리땁게 들렸으므로 이상하게 생각하며 반문했습니다.
“누구시오?”
“저는 평강이라 하옵니다.”
노모가 평강공주의 이름을 들었을 턱이 없습니다.
“평강이라?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소?”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의 노모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가슴에서 뭉클 솟아올라 가까이 다가가 노모의 손을 만지며 다시 물었습니다.
“온달을 만나러 왔어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노모는 명주같이 부드럽고 고운 공주의 손을 만지며 대답했습니다.
“어디서 오신 귀한 집의 처자인지 모르지만 어찌하여 헐벗고 빌어먹는 내 아들을 찾으오? 내 아들은 굶다 못하여, 산으로 가서 느릅나무 껍질이나 벗겨다가 먹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는 기다리지 않고 노모에게 물어서 그길로 산을 찾아갔습니다. 산기슭에 당도하니 마침 한 사람이 등에 지게를 지고 산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편, 온달은 느릅나무 껍질을 잔뜩 벗겨 지게에 지고 산을 내려가는데, 어느 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온달은 길을 재촉하다가 산을 다 내려오지 못해서 문득 앞을 바라보니, 산기슭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몹시 아리땁게 보이는 한 여인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온달은 낯선 곳에서 의외의 여인을 만나자 다소 긴장했으나 본척만척 하며 길을 내려왔습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공주가 짐을 진 남자를 척 보니, 옛날에 먼발치에서 한 번 보았던 그 바보 온달임이 분명했습니다.
“당신이 혹시 온달이라는 사람인가요?”
평강공주가 대뜸 물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바보 온달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뜻밖에도 똑똑한 음성으로 대답하고 되묻습니다.
“나는 당신과 혼인하기 위해 찾아온 평강이라는 처자입니다.”
온달은 공주의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속으로 괴이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산을 다 내려오지 못하고 날이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는지라, 놀란 온달은 헤아렸습니다.
‘이 처자는, 척 보기에 얼굴의 미색이 사람의 애간장을 아주 녹일 것 같고, 입은 옷이나 태도는 몹시 부귀한 집의 귀한 딸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귀한 집의 아름다운 처자가 빈천하기 짝이 없는 나 같은 거지 남편을 구할 리 있겠는가? 이건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렷다!’
이런 상념이 들자 그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습니다. 온달은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이 요망한 것아! 썩 물러가렷다! 너는 사람을 홀리는 백년 묵은 여우이거나 귀신임이 분명하렷다! 해가 어둑어둑해지니 드디어 네가 나에게 나타났구나. 바보 온달이라, 내가 만만하게 보이더냐?! 썩, 물러가라!”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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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12. 6.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