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1 편집인의 글 물댄동산
엄마와 동태탕
큰나무 목장 우진숙 집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을 켠다. 강사인 나는 자주 장거리로 강의를 나간다. 강의 시간 전에 넉넉하게 도착하기 위해, 전날 미리 장소를 파악하고, 이동 시간을 계산해 둔다. 고속도로로 이동해야 하는 장거리는 교통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 미리 서둘러 준비하는 편이다.
‘GPS가 연결되었습니다. 안내를 시작합니다.’라는 멘트가 아침에 들리면, 가족들도 오늘 어디 멀리 가나보다 라고 으레 생각하게 되었다.
강의를 마치면, 홀가분한 기분으로 보통 근처 적당한 식당에서 식사하고, 구미로 오는 편이다. 운 좋게도 맛집이라도 근처에 있으면, 인증 사진 몇 장도 챙기고, 즐겁게 식사하고 오기도 하지만, 적당한 식당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요즘은 일인 식사가 안 되는 경우도 가끔 있어서 당황스러운 점심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일이 고되고 스트레스가 많을수록, 제대로 한 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특별한 메뉴가 아니어도 집밥 같은 소박한 한 끼를 여유 있게 먹을 수 있는 식당을 만날 때가 참 좋다. 마땅한 식사 장소를 못 찾거나, 오후 강의 시간이 빠듯할 때는, 회전율이 좋은 편의점 커피 한 잔을 사서는 바로 구미로 온다. 구미로 와서, 근기 있는 점심을 위해 가끔 들르는 식당이 있다. 할머니 혼자 운영하시는 식당인데, 건물 코너에 있어서 눈에 잘 띄기도 한다. 이곳에 가끔 들르게 된 지, 일 년이 좀 넘은 것 같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엄마를 돌봐드리러 친정에 가기 바쁜 시간이 있었다. 요양사님이 엄마 저녁 식사를 드리고 가시면, 나는 퇴근하고, 친정집에 들렀었다. 이것저것 좀 돌봐드리고,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신지 물어보기도 하고….
이맘때가 되면 엄마는 꼭 동태탕을 먹고 싶다고 하셨다. 가을 무를 숭숭 썰어 넣고, 동태 한 마리 넣고, 칼칼하게 끓여서 먹고 싶다고.
시간이 될 때는 내가 끓여드렸는데, 엄마에게 치매가 온 탓에, 며칠을 못 참으시고, 갑자기 찾으실 때는 바로 해드릴 수도 없고, 나도 속수무책일 때가 많았다.
날씨가 쌀쌀하던 그날도, 엄마가 동탯국을 찾으셨다. 장거리 이동에 퇴근 시간까지는 일정이 빠듯하기만 한데…. 내일 끓여드린다고 할까, 그냥 모르는 체하면 곧 잊으시겠지, 하는 마음마저 들면서 고민스러운 맘으로 운전하던 중에, 내 눈에 띈 게, 이 식당의 ‘동태탕 개시’ 현수막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주방에서 요리하고 계셨다.
식당 안에는 제법 여러 테이블이 있었고, 손님들도 꽤 있었던 기억이 난다. ‘사장님, 동태탕 포장 좀 해 주세요.’, 했더니, 사장님이 일회용 포장 용기를 꺼내시고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셨다. 기다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엄마가 좋아하셔서요”라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사장님은 말없이 아까 닫은 용기의 뚜껑을 여시더니, 동태 한 도막을 더 넣어주셨다.
늦은 저녁, 식사까지 다 드시고 누워계신 엄마에게로 갔다. 늦긴 했지만, 동태탕을 끓여왔노라고 너스레(?)를 떨며 엄마에게 이야기했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어디 맛 좀 보자고 하시면서, 몸을 일으켜 앉으셨다. 김이 모락 나는 동탯국을 엄마 옆에 가서 보여드렸다. 한 숟가락 입에 넣어드리니, 숟가락이 입에 닿기도 전에 아! 맛있다! 라고 하신다. 퇴근하기 바빴을 텐데, 언제 이걸 끓여왔냐고, 내일 아침에 먹게 냉장고에 잘 넣어두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찔리는 마음에 좀 더 과장된 목소리로 요리 실력을 자랑하며, 언제든지 먹고 싶은 거 말씀만 하시라고, 그렇게 으름장을 놓던 때가 있었다. 그냥 사 왔다고 해도 고마워했을 엄마인데, 나는 왜 내가 했다고 했을까? 그냥 하루 종일 기다리셨을 엄마에게 차마 파는 국을 포장해서 사 왔다고는 말 못 하는 죄송함이었고, 바쁘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것에 더 자녀가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힘을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한평생 농사일로 제대로 쉬는 날 없이 지내신 엄마였지만, 가족들을 위해 요리할 때만은 정말 행복해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요리에 진심이었던 엄마가, 뇌경색으로 편마비가 와서 요리를 못하신지도 십 년이 훌쩍 지났으니 얼마나 본인 입맛에 맞게 무엇이라도 해서 드시고 싶지 않으셨을까.
이번 주도 강의를 다녀오는 길에, 오랜만에 그 식당에 들렀다. 식당 안에 몇 팀이 있었는데도 생각했던 것보다, 음식이 빨리 나왔다. 자극적이지 않은 반찬들과 제철 반찬 다섯 가지와 제법 큰, 양은 냄비 안에서는 엷은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고춧가루가 고루 얹어진, 두툼한 동태 도막 위에 양파와 파가 적당히 놓여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동탯국을 보니, 맛있게 드시던 엄마 생각이 절로 났다.
그렇게 매일 음식으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지냈던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이제 꼭 일 년이 지났다. 아직 퇴근길에는 나도 모르게 친정 쪽으로 운전대가 향할 만큼 이제 더 이상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장거리로 오가는 길에 창밖으로 펼쳐진 사계절의 풍경을 보는 것은 강의하게 되면서 나에게 주신, 선물 같은 일상이다. 찬양을 들으며, 밀린 기도를 하기도 하면서, 이제 막 단풍이 드는 아름다운 산과 추수가 한창인 넓은 들녘을 바라본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연 속에, 그 어디엔가 엄마가 가을걷이하면서 일을 하고 계시는 듯하다.
연예인 김수미 씨도 아주 어렸을 때, 엄마를 여의었지만, 엄마 생각이 날 때마다 요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가 해준 맛을 기억하며 따라 하려고 하다 보니, 요리를 즐겨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요리하면서 엄마 생각이 나기도 하고, 엄마 생각이 나서 요리를 하기도 한다. 엄마가 해준 맛을 따라 하려고 하다 보니, 맛이 좀 더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주 목장 모임 땐 동태탕을 끓여볼까. 비린내를 없애주는 다진 생강과 마늘을 넣고, 엄마가 큰 솥에 한 손으로 무를 삐져 내듯, 나도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아예 넉넉한 곰솥에다가 무를 썰어 넣어 볼까.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를 적당히 넣어 과하게 맵지 않은, 칼칼하면서 뜨끈한 국물이 기분 좋게 목에 넘어갈 수 있도록!
한 시간 남짓, 구미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상상 속 레시피에 재료를 넣었다 뺐다 반복하면서….
엄마 없이 보낸, 나의 첫 번째 가을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